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38화 (138/335)

< 138 >

정호준과 아리아는 얼굴을 팔리기도 했거니와 밖에 나가려면 경호원들을 바리바리 대동해야 해 여러모로 번거로웠기에 약속 장소는 자연스레 정호준의 집으로 정해졌다.

박기태가 정호준의 집을 낯설게 여기는 것도 아닌 터라 별다른 반대 없이 동의해 주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리자 일과시간 동안에는 정호준의 집에서 함께 활동하는 브리안 경호팀장이 부하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랫집과 윗집에 머무는 경호 인력들은 브리안의 연락을 받자마자 복도와 계단, 엘리베이터 등을 확인했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을 마친 뒤에야 브리안이 직접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만약 그들이 머무는 곳이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면 복장 검사까지 했을 거다.

총기 소지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정호준의 하나뿐인 절친이었기에 복장 검사를 하지는 않았다.

땡볕에서 죽어라 구른 탓에 까무잡잡해진 박기태를 보며 정호준은 인사와 사과를 건넸다.

"잘 지냈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인간관계도 변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연락도 없던 이들이나 친척들이 달라붙으며 친한 척을 해 대고, 누구보다 친밀하다 생각했던 관계가 거리감 때문에 갈라지기도 한다.

이번 인생에서도 쭉 함께 갔으면 하는 친우 박기태를 잃고 싶지 않았던 정호준은 최대한 박기태가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잔뜩 으스대며 장난기 가득한 말투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번 외박 때도 느꼈겠지만, 네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내가 생각보다 좀 많이 컸어. 이런 복잡한 절차가 당연할 정도로. "

박기태는 평소 성향, 행동 양식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정호준을 보며 정호준이 나름 거리감을 좁히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 또한 자기도 모르게 생기려고 하는 거리감을 떨쳐 내려 노력하며 안부를 건넸다.

"그나저나 열심히 굴렀나 보네? 아주 피부가 새까매."

"훈련받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난 힘들게 땡볕에서 구르느라 피부가 상했는데, 너는 오히려 때깔이 좋아졌다?"

"좋은 거 먹고 관리받으면서 사는데, 당연히 좋아져야지."

능청스럽게 잘 먹고 잘 살았음을 어필한 정호준은 화제를 돌렸다.

"일단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아빠한테 들었어. 너 내년에 결혼한다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리아 준비 다 됐나요?"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박기태의 행보에 맞춰 안방에서 아리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

"준비는 무슨 준비……."

아리아의 아름다움 때문에 박기태는 말을 끝까지 이어 가지 못했다. LA를 여행하며 동행했던 라틴 미녀들보다 더한 미모의 소유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얼타는 박기태 모습을 보며 웃음을 삼킨 정호준은 아리아에게 박기태를 소개했다.

"He is my best friend Ki Tae Park. I often talked about him."

미리 계획한 대로 영어로 말이다. 정호준의 소개를 마치자마자 아리아는 웃으면서 박기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Nice to meet you Ki Tae Park. My name is Aria Rosler. I'm Hojun's fiancee."

"나.나,,이스 투 미튜!"

그렇지 않아도 스피킹보다는 리딩과 문법 위주로 교육한 한국 교육과정 탓에 말하기가 익숙지 않은데 그런 영어조차 1년 이상 사용하지 못했다. 뭐든지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기 마련이잖은가. 지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Ma.. My name is Ki Tae, Ki Tae Park……."

박기태는 어버버하며 확신 없는 태도로 어렵게 소개를 이어 나갈 무렵.

"만나서 반가워요 기태. 호준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서,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아리아가 유창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자 어버버했던 박기태의 표정은 얼빠진 얼굴로 변했다.

아하하하!!

그 표정을 보며 정호준은 빵 터져 큰 웃음을 지었고, 정호준의 박장대소로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이 든 박기태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한국어 잘하면 할 줄 안다고 미리 이야기해 줬어야지!!"

아리아의 협조 덕분에 타오른 분노의 불길은 어렴풋이 쌓인 어색함과 거리감이란 감정을 태워 메웠다.

"미안 미안. 그래도 거리감이 좀 좁혀졌으니 됐잖아?"

목소리를 높이는 박기태의 말에 정호준은 황급히 웃음을 멈추고 사과를 건넸다.

"닥쳐!"

"미안해요 기태, 우리가 장난이 심했죠?"

정호준에게는 욕해도 차마 초면에, 미인이고, 정호준의 약혼녀이기까지 한 아리아에게 욕을 박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박기태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그래도 그렇게 한번 놀려 주며 감정을 터트려 줘서일까?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나저나 훈련은 할 만해?"

"할만하긴 뭘 할 만해, 당연히 힘들지."

본인의 입에서 꿀 빨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하게 군 생활을 한 게 아니라면 너나 할 거 없이 본인의 군 생활이 가장 괴롭고 힘들다. 박기태는 자신이 겪은 고생을 술을 마시며 토로했다.

"……."

1회 차 때 군 생활을 직접 경험했고 사회생활을 하며 박기태는 물론이고 이 사람 저 사람의 군 생활 이야기를 들은 터라 안 봐도 무슨 말을 할지 비디오였지만 리액션을 해 주며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호준이 억지로 흥미를 가진 듯한 태도를 연기했다면 아리아는 정말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박기태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외인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군대에 다녀와 남자친구나 선배로부터 군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잦은 한국 여성들과 달리 미국 여성들은 군인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는 한 군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었다.

자국이 아닌 타국 군대의 상황이나 환경을 전해 들을 일은 더더욱.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축구,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썰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기저기서 계속 주워 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인간은 남녀와 같은 성별을 떠나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환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존재였다.

"내 군 생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아까 당황해서 따로 말을 못 했는데, 약혼 축하한다. 호준이 네가 이렇게 일찍 결혼할 줄은 몰랐어. 아리아 제수씨 호준이 녀석을 잘 부탁합니다."

"제수씨 아니다. 이름만 부르던가, 호칭을 붙일 거면 제대로 붙여서 형수님이라 불러."

"형수님은 얼어 죽을. 제수씨지."

"생일도 내가 더 빠르고, 사회생활도 내가 더 먼저 했고, 결혼도 내가 먼저 한다. 이쯤 되면 당연히 제수씨가 아니라 형수님 아니냐?"

남자들이 흔히 하는 형수, 제수 논쟁은 2회차에 와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다.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으며 말싸움을 벌이며 20대 초반이 보일 법한 행동을 보였다.

"시끄러, 제수씨라면 제수씨야."

물론 유치하기로는 박기태도 만만치 않았지만 말이다. 말꼬리를 잡으며 논리적인 이유를 대는 정호준과 달리 논리에서 밀리자 그냥 억지를 부렸다.

뭐 제수씨면 어떻고, 형수님이면 또 어떻겠는가?

그저 술을 마시며 안주 삼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로 삼았으면 족했다.

"마지막까지 안전한 군 생활이 되기를, 건배!"

"Cheers!"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당연한 인간의 심리상 정호준이 수배한 고급 와인, 위스키, 양주 등을 차례로 맛봤다. 처음부터 좋은 술을 꺼내 들었다면 껄끄러웠겠으나 소맥으로 시작해 복분자주 등 차차 단계를 이어 가며 마시자 취기 때문에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양주를 끝으로 다시금 깡소주로 돌아왔을 무렵 아리아가 필름이 끊긴 듯한 모습을 보이며 정호준의 다리에 엎어졌다.

"I don't wana lie in bed. Just, I'll rest a little while."

자신의 다리에 엎어진 아리아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 안아서 안방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싫다고 잠깐만 쉬다 일어나겠다고 애교를 부려 대는 바람에 쿠션을 얹혀 주는 걸로 다리를 구원했다.

물론 1시간이 지나도 아리아가 일어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아리아가 리타이어한 후로 1시간 정도 술잔이 더 오갔다. 옛날이야기와 복학은 언제 할 계획인지 등을 묻고 대답을 듣는 시간이 이어졌다.

정호준도 박기태도 서로가 취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까지 발개졌을 무렵 박기태는 조심스레 물었다.

"호준아! 나 하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물어보지 말라면 안 물어볼 거야? 뭘 그리 조심스럽게 굴어. 그냥 말해."

"너 은주 누나한테 마음 없는 거지? 내가 은주 누나한테 대시해도 괜찮은 거 맞지?"

알딸딸한 것을 넘어 취한 게 분명한 상황이었으나 박기태의 질문에 취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뎠으면 치정으로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게 새삼 와닿았다.

"나 둔한 놈 아니다. 은주 누나가 너를 좋아한다고 티를 낸 것도, 네가 은주 누나를 밀어내면서도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도 나는 다 눈치챘어. 티 안 내고 정리하려 했는데, 네가 아리아와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묻는 거야."

박기태는 김은주가 리조트에 찾아온 순간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바깥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김은주가 정호준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고 정호준 또한 그녀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싫지 않아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주 누나, 내가 잡아도 돼?"

미련을 남기지 않고 감정을 깨끗이 정리했는지 묻는 박기태의 질문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하는 거면, 괜히 내 눈치 보지 말고 잡아. 대신 이거 하나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은주 누나가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은주 누나는 사실 정신적으로 굉장히 연약한 사람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 상처를 남기며 헤어질 것 같은 연애라면, 아예 시작을 안 했으면 해."

박기태가 정말 그녀를 사랑해서 고백하겠다면 정호준은 말릴 생각이 없었다. 박기태는 정호준에게 있어 1회차, 2회차를 통틀어 가장 선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정호준이 쥐여준 주식만으로도 박기태가 도박에 빠지지 않는 한 경제적으로 궁핍할 일이 없었다.

정호준의 OK 사인에 이런 말을 한 것에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드러내던 박기태의 얼굴이 기쁨의 감정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사실 정호준이나 박기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더 있었다. 자신이 취해서 잠든 척하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거란 계산을 술을 마시며 끝낸 후부터 취한 척 연기를 시작했던 아리아 로슬러의 내숭에 당한 것.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안 가도록 꾸준히 관리해야겠지만, 일단 다른 남자들처럼 딴 여자한테 시선을 주진 않을 것 같네.'

1회차 2회차 합쳐 40년을 넘는 세월을 살았다. 40년 동안 풋풋한 연애부터 질척이는 연애까지 이런저런 연애를 경험한 정호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맘먹고 연기하는 내숭을 간파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