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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음을 밝힘으로써 감정을 정리시키고 김명호와 강현태로부터 승낙을 받아 냈다. 이로써 정호준이 한국에서 해야겠다고 계획한 일은 모두 끝낸 셈이다. 계획한 볼일을 모두 마쳤으니 한국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지만, 미국으로 귀국하기보단 한국에 좀 더 머물렀다.
작년 12월에 외박으로 한 번 보고 7개월 동안 못 본 절친 박기태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머무르며 박기태가 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휴가 나오길 기다리기보다 직접 부대로 면회를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정호준인 면회는 선택지에서 아예 제외했다.
'내가 방문했다가 무슨 잡음이 생겨날지 알 수 없다.'
면회가 부정적인 효과가 아닌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으나 확실치 않은 것에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잘하고 있는 듯 보이는 박기태의 군 생활에 괜히 풍랑을 만들 필요는 없잖은가?
방학이라 학업과 관련해서 시간을 소비할 필요도 없었고 투자 계획과 관련해서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일도 없다. 박기태가 유격 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이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한국에 좀 더 체류하는 선택을 내렸다.
물론 박기태가 휴가 나오길 기다리느라 붕 뜬 시간을 서울에서 죽이진 않았다. 서울은 분명 멋진 도시였지만 붕 뜬 시간을 서울에서 기다리기보단 시간이 생긴 만큼 아리아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즐기는 게 더 가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갑작스럽게 관광을 다니자고 말했지만 아리아는 화를 내기보단 기뻐해 주었다.
"그거 알아요? 이게 우리가 함께하는 첫 여행인 거?"
기쁨이 가득한 상태에서 던진 질문이지만 추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사과를 입에 올렸다.
"미안해요. 아리아도 나도 바빴잖아요.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함께해요. 약속할게요."
"약속한 거예요?"
수원 화성을 시작으로 전주의 한옥마을, 목포 해수욕장, 해남 전라우수영을 찍고 여수에 당도했다. 여수에서 밤바다를 즐기며 물회를 한 접시 시켜 먹었으나 아리아는 입맛에 맞지 않는지 고기를 구워 먹었다. 한반도 반 바퀴를 돌았다 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대체로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여행하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탓에 이래저래 본인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아리아 로슬러의 미모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보다는 경호팀까지 동행한 게 더 컸다.
2006년은 아직 외국인 몰려다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시절이 아니었다.
'대체 연예인들은 이렇게 귀찮기만 한 관심을 갈구하는 건지 모르겠네.'
연인과의 여행이 즐겁기만 할 거라 생각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지금껏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봤고 개중에는 의견의 차이도 발생했다. 정호준의 경우 처음으로 아리아에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비키니는 입지 말아 달라니까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해요? 여자들이 왜 열심히 몸매를 가꾸는데요?"
"나만 보면 되지, 남들한테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요."
1회차 때 연애 경험이 꽤 존재한다 해도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연애 경험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 문제였다. 정호준은 남의 여자의 노출은 달갑고 내 여자의 노출은 달갑지 않은 한 명의 일관성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였다.
게다가 그냥 만나다 말 사이여도 질투가 날 판국에 결혼까지 할 정말 내 여자잖은가? 정략으로 엮였다고 아리아에게 감정이나 소유욕 등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정호준은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질투하는 거에요?"
"당연히 질투하죠. 다른 남자들이 내 여자의 살결을 보는데, 그게 뭐가 즐겁겠어요. 아리아가 예쁘고 몸매 좋은 건 다 알고 있으니까, 비키니는 별장이나 프라이빗 비치에서만 입어 줘요."
정호준이 목소리를 높여 당황하긴 했지만 아리아는 정호준의 질투 자체는 달가웠다. 남자가 질투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증거였으니까.
'여행하길 잘했어.'
뉴욕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뉴욕보다 더 덥고 습한 한국의 날씨가 달갑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아리아는 여행하며 정호준이 보여 주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좋았다.
정호준과 아리아는 여수의 한 호텔에서 사흘간 휴식을 취하며 열흘 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관광하며 생긴 피로를 푼 뒤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 * *
2005년에 인수한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의 명의으로 사들였던 수호이 로그 금광 개발이 완료되었다. 수호이 로그 금광에서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되었다.
계약한 대로 수호이 로그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가공한 금괴 중 23%는 러시아 정부에 흘러 들어갔고 남은 77% 중 절반이 조금 안 되는 35%의 금괴는 세계에 판매되었다.
나머지 42%의 금괴는 트리오플이 경비를 서는 미국의 어느 창고에 비밀리에 쌓아 두었다.
'굳이 금을 모두 팔 필요는 없지.'
세계 최대의 금광이라 알려진 수호이 로그에서 채굴을 이어 가고 있는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의 CEO 메이슨 페레즈는 러시아와 호주를 오가느라 바빴다. 러시아에서는 채굴 현황과 기타 애로사항들을 확인 후 해결했고, 호주로 와서는 휴식과 회계업무, 정치 등에 신경을 썼다.
바쁘게 활동 중인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의 메이슨 페레즈는 호주에 머물러야 할 일정에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너인 정호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
- 일로샤와 접촉해 주세요. 부투오빈스카야 광산도 마저 매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9,300만 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가 매장된 부투오빈스카야 광산을 마저 매각하기 위해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 이유로 메이슨 페레즈는 정호준이 아리아와 함께 한국 관광투어를 진행할 무렵 러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호준이 메이슨 페레즈에서 접촉하라고 지시한 '일로샤'라는 회사는 다이아몬드를 전문으로 채굴, 가공, 유통하는 러시아의 공기업으로 러시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8할, 어쩌면 9할 이상을 생산했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다이아몬드의 20%가 일로샤에서 나온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았다.
"너무 연달아서 광산을 매각하면 제값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가 누르빈스카야 다이아몬드 광산 매각한 게 바로 작년 일이다. 메가톤급 광산을 연 단위로 연이어 매각하는 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었다.
공급할 곳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값이 떨어진다는 걸 수요와 공급 법칙을 통해 배웠지 않은가? 광산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메이슨 페레즈는 값을 다 받기를 희망했다.
세계가 전체적으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던 2007년 이전의 시대였다면 메이슨 페레즈가 염려한 것처럼 광산의 가치를 내리는 행위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장은 계산법이 조금 달리 적용되는 게 맞았다.
"조만간 미국에서 큰일이 터질 겁니다."
굳이 메이슨 페레즈에게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고 그냥 매각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되는 위치였지만 정호준은 메이슨 페레즈를 납득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설명을 입에 담았다. 쓰고 버릴 게 아닌 이상 최소한의 정보 공유는 필요했다.
"큰일이요?"
페레즈의 반문에 정호준은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 주었다.
"예,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일입니다. 저는 지금이 제값 받고 팔 수 있는 몇 없을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가 쥐고 있을 광산은 수호이 로그 금광이면 충분합니다."
실물자산 중 하나로 인정받는 금은 사치품이지만 필수품이기도 한 오묘한 물질이었다. 가공하기 쉽고 전기 전도성이 뛰어난 금의 성질은 전자제품이나 반도체에 필요한 필수품으로 활용되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을 발견해 낼지도 모르겠으나 현재 그리고 나아가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금은 제조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물질이었다.
사치품이지만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기도 한 금과 달리 다이아몬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정말 그저 반짝이는 돌덩이에 불과한 사치품이다.
경제가 활황일 때야 사치품으로써 희소성을 갖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 자연스레 가치가 줄어들게 된다. 경제 상황이 나쁘면 사치품의 판매량이 급감하게 되는 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이치다. 사치품은 사치품이지 삶에 필요한 필수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공급은 그대로인데 수요가 줄면 당연히 가격 또한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정리해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약점이 될 소지는 최대한 줄이는 게 맞다. 괜히 들고 있었다가 약점이 될 수도 있어.'
정호준의 JHJ Capital은 러시아 은행 중 하나인 스비르 은행 뉴욕지점에 방문해 15억 달러에 이르는 CDS 계약을 체결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처럼 돈을 갖다 바쳐 주는 호구라고 당장은 좋다고 계약을 체결했을지 몰라도 2007년 하반기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진 뒤 JHJ Capital이 스비르 은행과 체결한 CDS 계약을 청산하면 스비르 은행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손해가 달가운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러시아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을 보복하고자 제재를 가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비 증가로 재정적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2020년과 달리 06~07년은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1998년으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제가 이제 막 회복세로 접어들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미국이란 뒷배를 둔 JHJ Capital을 건드릴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이 어디 상식으로만 돌아가던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게 현실이라는 말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다.
'특히, 러시아는 무늬만 민주주의의 탈을 쓴 나라니까.'
노빠꾸 상남자님께서 기분이 나쁘셔서 보복을 가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대로 움직이는 게 바로 러시아라는 나라였다.
사실 위와 같은 논리대로라면 수호이 로그 금광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정리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정호준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욕심과 욕망이란 감정이 그러한 선택지를 지워 버렸다.
'앞으로 수년 동안 최소 배 이상은 오른다.'
앞으로 수년 동안 금값이 천정부지로 계속 상승을 이어 갈 걸 알고 있기에 차마 금광을 매각할 수 없었다. 34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금광이 최소로 잡아도 68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광산으로 변모하게 되는 셈인데,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광산을 그냥 매각하겠는가?
지금 금광을 매각하는 건 제 손으로 한화 42조를 남에게 주는 꼴이었다.
'절대 안 되지.'
아무리 안전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