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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행사는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평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큰 일이었다. 작게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지만 크게는 집안과 집안의 결속이었다.
괜히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는 말이 시대를 이어 내려왔겠는가.
인생에 그보다 중한 일이 없다 봐도 무방할 결혼이란 행사를 겨우 21살에 결정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박남정은 정호준이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어린 나이에 이미 일가를 이룬 정호준이라 해도 이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는 건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리아가 연인인 정호준을 위해 한국어를 배운 정성을 확인해서 염려는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지만.
그럼에도 정호준이 서두른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문뜩 드는 생각도 있었다.
'혹시 사고 쳤나?'
일찍 결혼하는 이들을 보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게 되는 편견이다. 하지만 자신이 차를 타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간 아리아가 임신했다면 모든 상황이 수월하게 설명이 됐기에 자기도 모르게 임신으로 생각이 쏠렸다.
박남정은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아들인 박기태나 할 법한 행동을 했다.
주방에 들어간 아리아가 듣지 못하게 정호준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호준아, 너 혹시 사고 쳤냐?"
"예?!"
"쉿!"
터무니없는 소리라 자신이 방금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듯한 짧은 반문에 박남정은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의사를 표했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이 얼마 안 남은 중년의 태도치고는 심히 가벼웠으나 그 행동이 밉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박기태에게 친구 같은 아빠 역할을 했듯 정호준의 기억 속에도 엄숙한 모습보다는 항상 친근하고 유쾌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이 아니면 네가 이렇게까지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박남정은 정호준을 보며 자신이 가진 의문을 토로했다.
'아저씨라면 이야기해 드려도 되겠지.'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정호준은 세계의 중심인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자신의 상황을 간략하게 간추려 이야기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정략이란 행위를 드라마나 뉴스에서 잠깐 보고 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박남정은 주변 친지가 정략의 당사자가 되자 참 복잡하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 한국어까지 공부해 주는 여자잖아요. 인성 좋겠다, 배경 좋겠다, 외모도 빼어나겠다. 굳이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정호준이 웃으면서 말을 마칠 무렵 아리아 로슬러가 커피잔과 맥주 등을 쟁반에 바리바리 챙겨 부엌에서 나왔다.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왔어요. 이리 줘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아찔하든지 정호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를 도왔다.
'으음,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울리네.'
박남정은 아리아를 돕기 위해 재빨리 달려 나간 정호준의 모습을 보며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란 생각을 했다.
"일단 먼저 축배부터 들고 시작하죠. 차기작을 성공으로 이끈 박남정 감독님의 승승장구를 위하여!"
정호준과 박남정은 따로 소주와 막걸리를 섞어 소막을 제조해 먹었고, 아리아는 한국 술은 영 입맛에 안 맞는지 맥주로 위와 간을 적셨다.
본업부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정호준과 박남정이 나눈 대화 중에는 박기태의 이야기가 없을 수 없었다.
"기태 녀석은 잘 지내나요?"
"최전방이라 처음에는 고생 많이 했는데, 그래도 군번 자체는 풀린 군번이라 이제는 살 만한 것 같더라. 분대장 견장도 달았던데?"
훈련이나 작업 등으로 몸이 고단하고 군대라는 밀폐되고 특수한 환경이 주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군복무를 하며 견뎌야 할 사안이었지만 가장 힘든 건 역시나 인간관계였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다름 아닌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스트레스였다.
회귀 전에는 군번이 꼬여 분대장을 달지도 못했는데, 작지만 또 한 번 박기태의 인생이 변했다.
"그거 다행이네요. 군번이 풀리고 분대장 견장까지 달았으면, 군 생활 참 잘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개인적으로 난, 기태와 함께 군 생활하는 장교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더라고. 얼마나 견장을 달 사람이 없으면, 기태놈한테 분대장을 맡았을까 싶어서."
자기 자식 이야기하면서 남을 이야기하듯 흉을 보는 게 좀 이상했으나 이 또한 박남정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휴가는 언제쯤 나올 수 있데요? 저는 해외에 있고 녀석도 군대에 있어서, 아무래도 직접 연락하기가 힘드네요."
"그렇지 않아도, 너 한국 들어왔다는 소식은 전했다. 근데 당장은 못 나온다더라. 유격 훈련이 잡혀 있어서 다음 달은 돼야 나올 것 같다던데?"
유격 훈련은 그냥 훈련이 아니다. 부대 전체가 움직이는 큰 훈련인 만큼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유격 훈련이 시작하기 전주에 준비기간이라는 명목으로 1주, 유격 훈련 1주, 그리고 유격 훈련 후 정비 기간 1주. 총 3주간 분대장이 분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휴가를 나올 수 없다는 말에 정호준은 조용히 박남정의 무사를 기원했다.
'만약 미국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입대했으면, 나도 녀석처럼 땡볕에서 열심히 굴렀겠지.'
군대에 두 번 가는 끔찍한 상상이 떠올라 정호준은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렸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날이 있잖은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술이 잘 들어가는 날.
정호준이 바로 그랬다.
오랜만에 완전하게 마음을 연 사람과 만나 마시는 술이어서 그런지 빈틈을 보여 줄 정도로 취했다.
"아리아, 좀 전에 아저씨께서 우리의 결혼을 놓고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알아?"
"나야 잘 모르죠. 뭐라고 이야기하셨나요?"
"야! 호준아!"
박남정이 황급히 정호준을 만류했지만, 정호준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둘 다 어린데, 결혼을 너무 서두른다고. 임신했냐고 물으시더라."
정호준은 박남정이 했던 말을 그대로 아리아에게 일러바쳤다. 박남정에게 작은 무안을 주며 놀리고자 한 말이었다. 본인이 취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술을 마신 데다가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도 채 여섯이 안 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대상 앞이었기에 나온 빈틈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호준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박남정을 골려 주기 위한 장난이었으나 아리아의 대꾸가 범상치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응?"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님이랑 아버지께서 손주를 보고 싶으시다고 노래를 부르시는데, 아이를 먼저 갖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고요."
미국 여성의 화끈함은 정호준의 상상 이상이었다.
"제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화내시기보단 좋아하실걸요?"
정호준은 착하고 배려심 있는 좋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선을 그어 놓고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랬던 정호준이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풀어진 모습을 보이니 자기도 모르게 부린 심술이었다.
심술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정호준이 로슬러 가문에서 반대하는 상대도 아닌데다 관계가 깊어져 이미 결혼식 날짜까지 언급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갖는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적어도 아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 서양에서는 결혼식은커녕 혼인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을 크게 흠으로 여기지 않는 문화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정호준이 미국에 거주한 시간은 2년 남짓. 이러한 사실을 직접 체감하기는 짧은 시간이었기에 정호준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배불러서 결혼하려고요?"
"그건 안 되죠. 결혼사진은 예쁘게 찍고 싶거든요. 결혼식을 조금 뒤로 미루고, 산후조리 잘 마쳐 여름의 신부가 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취기가 확 달아나게 만드는 말이라, 눈만 껌뻑이며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흘리는 정호준에게 아리아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장난이니까, 그만 표정 풀어요."
"장난 맞죠?"
정호준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장난이긴 한데, 아이를 빨리 갖고 싶은 건 사실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호준과 아리아가 나눈 대화를 들은 박남정은 정호준을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호준이 녀석 잡혀 살겠는데?'
본인은 부정할지 모르겠으나 부부생활 선배인 박남정이 봤을 때 정호준은 아리아 로슬러에게 휘둘릴 게 분명해 보였다.
* * *
박남정과 술자리를 즐긴 날로부터 정확히 1주일 후 김명호 서울시장, 정확히는 김명호 '전' 서울시장과 미팅이 잡혔다.
'한결같은 사람이야 진짜.'
6월을 끝으로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고 야인이 됐지만 정호준이 생각하기에 김명호는 쉴 시간이 없었다.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창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기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준은 김명호와 미팅 약속을 잡는 데 큰 노력을 필요치 않았다. 김명호 전 서울시장이 정호준이 연락하자마자 취소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듯 빠르게 미팅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참 돈 좋아해.'
돈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냐 싶다만 김명호는 좀 심한 편이었다.
노민현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 대통령이라 소탈함이 배 있어서 그런지, 압구정 청담동 등에서 만났던 지금까지와 달리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의 어느 오리백숙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정호준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방을 예약해 두셨네요. 따라오시죠."
약속 시간보다 최소 10분 이상 빨리 당도하는 습관을 지닌 정호준은 먼저 도착해 김명호를 기다렸다.
'사람이 많지 않네.'
대로변과 멀지 않긴 하나 포장도로가 제대로 깔리지 않은 곳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평일 저녁이라 그런 건지, 손님은 몇 없었다. 다만 손님이 없는 것과 다르게 한옥식으로 지어진 음식집에는 룸까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명호 전 서울시장은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방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십시오."
"하하, 이거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김명호 전 서울시장은 승자의 미소 비스름한 것을 보였다. 김명호는 몇 번이고 연락을 해도 무시로 일관하던 정호준이 먼저 연락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호준이 만남 요청 자체가 자신이 권좌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 주는 것 같달까? 하여튼 그랬다.
"좀 오래 기다리긴 했는데, 습관이 된 지 오래돼서 괜찮습니다. 어글리 코리안 타임처럼 늦게 오신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하, 어째 말에 날이 서 있습니다만?"
미국물을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한국의 보편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보여 김명호는 속으로 정호준을 욕했지만 입가의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김명호 전 서울시장이 자신이 '갑'이라고 생각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아 보인 반응이었다.
"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밥부터 먹읍시다. 여기가 좀 외진 곳에 있어도 음식은 참 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