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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시작한 입장에서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갖는 힘과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정호준의 말이 끝났음에도 그저 조용히 심사숙고를 이어 갈 뿐 강현태는 그 어떤 대답도 내뱉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 국가의 행정부 최정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었으면 대한민국 재계의 한 축이자 자수성가의 표본인 미래의 창업자 박주영이 낙선하고 박주영의 아들인 박명준이 대선에서 중간에 합당을 선택했을 리 없다.
정치인들과 재벌들이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영화가 종종 한국에서 개봉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미래'의 창업자와 2세가 실패한 이유는 국민들이 미래가가 정치와 경제 모두를 독식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탓이니까.
'미래의 서포트를 받은 박주영 회장조차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렵게 여겨지는 건 당연했다.
다만 정호준은 강현태가 하기로 결심한다면 전력으로 도와줄 의지가 있었다.
국민들이 호감을 느낄만한 커리어를 쌓게 도와주고. 선거에 나가야 할 최적의 시기를 알려 줄 거다.
'최소한 당선 확률은 높여 주겠지.'
그에 더해 선거에 필요한 돈을 불려 줄 정보를 제공할 계획 또한 존재했다.
선거 자금을 받았다가 괜히 탈이 날 소지를 사전에 차단함과 투자를 통해 천억 단위 이상의 돈을 굴리게 해 줌으로써 돈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명예욕 부채질할 거다. 그런 말이 있다. 인간은 처음에는 돈을 좇지만, 충분한 돈을 보유한 후로는 본능적으로 권력이나 명예를 좇는다고.
관짝에 들어가기까지 짧으면 10년, 길어도 30년밖에 안 남은 이가 자식은 물론이고 손자 대까지 쓸 수 있는 돈을 벌어 놓고 욕심을 부리면 얼마나 부리겠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운 상태이니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주력하리라.
'자산 공개하면 또 한 번 놀라게 되겠지. 경제는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니.'
대선에 나가면 차명으로 숨긴 것이 아닌 이상 보유한 자산을 공개해야 한다. 자산을 공개하고 천억 단위가 넘는 재산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내용증명을 제출함으로써 투자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 줘 경제에 문외한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가 되리라.
'물론 인간인지라 욕심에 끝이 없어서 계속 돈을 탐할 수도 있고, 내 충고를 안 들어 먹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건 강현태 의원이 몇 차례의 시험을 통해 자격을 입증한 뒤에야 이뤄질 협조였고 강현태가 그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눈에 보이면 그때 잘라 내면 그만이었다.
* * *
강현태는 대답 없이 30분을 넘게 숙고를 이어 갔다.
사람을 앞에다 두고 반 시간 넘게 생각에 잠기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정호준은 강현태가 생각을 정리하는 걸 재촉하지 않았다.
도와줄 의향이 있다는 말만 듣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감과 정치적, 생명의 위협을 저울질하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믿을 만했으니까. 만약 강현태가 쉽사리 제안을 받았다면 강현태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 밑으로 수정했을 거다.
강현태는 1시간을 넘도록 심사숙고를 이어 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정대표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강현태가 장시간 고뇌를 이어 가긴 했지만, 결국 이긴 건 야망이었다.
강현태의 질문에 정호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당장에는 아무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조수도 회장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요. 저쪽이 주가 부양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뒤에 움직여야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저 의원님의 각오가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시험받는 듯한, 아니 시험받은 게 분명한 상황에 강현태는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러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아마추어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정호준이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현재 사회적인 지휘만 놓고 보면 위가 맞았다.
"위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팬덤엔터 때처럼 확실하게 움직여 줄 분이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함께 움직였던 조규석 차장검사는 윗선의 압력에 굴할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이 친구가 아쉬운 게 정치를 전혀 못 합니다."
강현태가 정치질을 하다가 선을 잘못 대서 조금 이른 나이에 변호사로 이직했다면 조규석은 정치질 없이 대쪽 같은 기질을 유지하며 소신을 지킨 대한민국에 몇 없는 검사다. 장희팔 사건이 아니었으면 차장검사 승진은커녕 2004년, 오래 버텨도 올해쯤에는 옷을 벗었으리라.
"이번에 승진하지 못하면 길어야 2년 안에 옷을 벗게 될 겁니다."
장희팔 사건으로 승진하긴 했으나 부장검사, 부부장검사 시절에 워낙 여러 차례 승진에 실패한 지라 옷을 벗어야 하는 미래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중이었다.
"하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힘을 써 보도록 하죠."
직접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김명호 서울시장에게 줄을 대서 도와달라는 돌려 말하는 강현태의 말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김명호 서울시장의 돈을 불려 줘야 한다는 말이네.'
김명호 서울시장은 정호준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자신의 자금을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감정도 없었던 정호준은 당연히 그 부탁을 거절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김명호 서울시장의 투자 요청을 거절할 수 없게 됐다. 아쉬운 게 생겨 부탁을 하려면 저쪽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했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내어줘야 하는 게 정치라지?'
검사들 특히 고위직 같은 경우 승진의 유무는 대통령의 권한이 아닌 검찰총장의 권한이라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권한은 없었지만, 누가 승진할지를 결정할 검찰총장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 게 바로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대통령 취임 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총장을 선임해 왔다. 본인에게 유리한 이러한 관행을 김명호 서울시장이 이어 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누구를 총장으로 앉힐지에 대해 힘을 갖고 있는 그가 차장검사 하나를 검사장으로 끌어올릴 힘이 대통령에게 없을 리 없었다.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듯 말기만 해도 충분히 압박이 갈 테니까 말이다.
누군가 물어볼 수 있다. 김명호 서울시장이 싫고 돈을 불려 주고 싶지 않으면 검찰총장한테 직접 선을 대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 질문에 정호준은 대답하리라.
'누가 될지 모른다'라고.
그도 그럴게.
'세상에 검찰총장 계보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법조계에 종사하거나 재계 인사, 정치인이 아닌 이상 누가 검찰총장이 되는지를 달달 외우고 다닐 이가 얼마나 될까? 세상에 별종은 존재하니 딱 잘라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정호준은 그 예외의 경우에 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 * *
정호준이 강현태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한국 인천공항에는 또 한 명의 거물이 입국심사를 마쳤다.
거물의 이름은 아리아 로슬러. 정호준에게야 익숙해져 이제 별 부담이 없어진 이름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무거운 이름이었다. 그녀가 입국했다는 것만으로도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난리가 날 정도로 말이다.
"미국에서 봐도 되는 데 뭘 여기까지 왔어요."
"어쩐 일은요? 비서로 일하면서 호준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때 이야기했잖아요. 오너가 움직이는데 비서가 따라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한국에 올 거라고 이야기를 해 줬으면,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요."
"그럴까 봐 이야기 안 했어요. 서프라이즈 좋잖아요?"
아리아 로슬러의 생일 때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그날 분위기에 휩쓸려 무리한 게 아닌 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버렸고 아리아는 악동 같은 미소를 한번 지으며 말했었다.
"나 호준의 비서로 일하고 싶어요"라고.
양다리를 걸치는 등의 켕기는 행동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정호준도 남자였기에 부인 될 사람이 자신의 스케줄을 일일이 꿰게 될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의 부탁을 물려 보려고 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인정한 호준이 회사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일을 하는지 게 일하는지 궁금해요. 들어주지 못할 만큼 무리하거나 어려운 부탁이 아니잖아요?"
아리아는 여우짓을 해서 받아 낸 정호준의 약속을 무기 삼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정호준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다. 그 대가로 당일 제대로 서비스받긴 했지만 껄끄러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호준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1회차 때 아리아 로슬러는 졸업하고 UN에서 인턴 생활을 경험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UN에서의 인턴 생활, JHJ Capital에서 정호준 직속 비서로 일하기. 어느 쪽이 직업상 더 가치가 있는지는 일일이 따져 봐야 알겠지만.
어쩄든 아리아가 학기를 마치고 진실로 졸업생이 되자마자 한국을 방문한 데는 그런 이유가 섞여 있었다.
"이제 곧 손님이 찾아올 텐데, 괜찮겠어요?"
아리아가 오늘 한국으로 올 거라고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 정호준은 박남정을 집으로 초대했었다. 정호준의 질문에 아리아는 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님이라면, 박남정 감독을 말하는 건가요?"
"예."
"그렇지 않아도 식을 올리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호준에게 크나큰 은인이라면서요."
차기작을 성공시켜 영화감독으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박남정의 성공을 늦게나마 축하하는 자리가 얼떨결에 아리아 로슬러를 소개하는 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띵동!
박남정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벨을 눌렀다. 박남정의 손에는 대한민국의 트레이드마크인 후라이드 치킨이 양손에 가득 쥐어져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저야 뭐 잘 지냈죠. 아저씨도 잘 지내셨죠?"
현관으로 나오는 정호준을 보며 박남정은 손에 바리바리 들고 있던 치킨을 건넸다.
"이거, 경호하시는 분들 드시라고 해라."
지난 만남에서 경호원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경호에 힘쓰는 것을 경험했기에 경호원들의 몫까지 사 온 것이다.
"그나저나 이 여성분은 누구시니? 네 비서?"
"비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결혼할 사람이라 소개하는 게 맞겠네요."
조심스럽게 묻은 박남정의 질문에 정호준은 두루뭉술한 어조로 말했다.
"뭐?!"
정호준이 아리아를 소개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에 아리아 로슬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리아 로슬러예요. 호준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아리아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도 어색한 한국어가 아닌 유창한 한국어로 말이다.
"어?"
"박남정입니다. 그 호준이 녀석 삼촌쯤으로 생각하면 될 거 같네요."
유창한 한국어에 정호준은 자기 맘대로 삼촌 포지션을 잡는 박남정의 발언에 태클을 걸 정신이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듯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아리아다.
수년은 배운 것 같은 한국말이 아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지라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자연스럽나요? 호준을 놀래켜 주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결혼할 사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던 박남정은 아리아가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만으로 플러스 점수를 듬뿍 주었다.
"자연스러워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나 봐요? 한국인이 와 있는 줄 알았어요."
자신을 생각해준 아리아의 마음이 느껴져서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