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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했다. 정호준은 늘 하던 것처럼 약속 시간 10분 전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호준보다 먼저 도착한 이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참 오랜만입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약속 상대인 강현태가 정호준보다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 처음이네. 강현태 의원이 먼저 와 있는 건.'
사적으로 만나는 첫 만남에서 강현태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당도했었다. 차가 막혔다며 사과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그 사과에 딱히 진심이 담기지는 않았었다. 그냥 의례상의 사과랄까? 그 당시 아쉬운 건 정호준 본인이였기에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을 뿐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부터는 정호준이 범상치 않은 이임을 확인해서인지 5분 일찍 오거나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왔었다. 그랬던 이가 10분 먼저 도착한 정호준보다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강현태의 행동 하나만 보고도 본인의 급이 많이 올라갔고 내적으로 많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커 보였던 이가 지금은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만 보였다.
"일찍 온다고 일찍 왔는데, 제가 조금 늦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앞의 일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사과는 안 하셔도 됩니다."
강현태는 정호준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나저나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절 보자 하신 겁니까? 한국으로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습니다만."
보궐선거를 치르기 직전에 만났을 때도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말투를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존칭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나 차기 대통령이 될 서울시장 앞에서도 제 할 말을 다 했던 정호준인지라 그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팬덤엔터건 때처럼 주가조작 사건을 제보하고자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어려운 부탁도 하나 해야 할 게 있고요."
"주동 세력이 누굽니까?"
"JS그룹의 조수도 회장입니다."
정호준의 대답을 들은 강현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다 이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정호준을 바라봤다.
"거절하고 싶으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의원님께 무조건 해 달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조수도 회장이 깡패 출신이고, 조폭들과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장희팔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여서 정치권이나 검찰, 경찰에 돈을 뿌리지 못해 위험도가 높지 않았지만 조수도 회장은 달랐다. 조수도는 IMF 외환 위기 당시 한번 크게 엎어져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먹고살 길이 없던 조수도는 수려한 외모와 말빨을 앞세워 다단계 업체 수코를 설립했고 수코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35만 명의 회원을 유치한 수코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조수도 회장은 백화점, 편의점, 슈퍼마켓과 같은 유통업과 건설업, 레저업(관광), 영화제작, 자원탐사 및 개발 사업에도 잇따라 진출하며 문어발식 확장을 이어 갔다. 그 모습은 70년대 80년대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대기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수도 회장이 창업한 JS그룹은 성장 과정 말고도 그 시대의 대기업들과 닮은 게 있었는데, 바로 정경유착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시작됐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기업으로 성공하는 이치고 정치권에 전혀 줄이 없는 이는 없었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 올바르지 않지만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바르지 못한 일들도 종종 저질러야 했다.
과거에 정치인이 되고자 정치 쪽에 기웃댄 과거를 가진 만큼 조수도 회장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정치 인맥은 상당했다. 당연히 사업을 원활하게 꾸려 가기 위해 검찰과 경찰과 정치권에 돈을 뿌리며 기름칠도 많이 해 뒀다. 장희팔이나 팬덤엔터 주가조작 사건 때와는 감당해야 할 원한의 힘이 달랐다.
자신의 일을 방해받은 조수도 회장은 홧김에 깡패들을 동원할 수도 있고, 자신의 돈을 받아먹은 검찰이나 정치인을 활용해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강현태가 모를 리 없었다. 법조계 커리어는 고등법원 수석 판사에서 끝이 났지만 1회차의 강현태는 2012년 4월 11에 실시된 19대 총선에서 승리해 국회의원이 된 뒤로 20대, 21대 총선에서 모두 승리해 진정한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정호준만 기억하고 있는 미래였지만 어쨌든 선출직 3선을 달성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이가 그 정도 정치력이 없을 리 없다. 그렇기에 정호준은 퇴로를 주며 강현태에게 자신을 도와 움직일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정대표님. 제가 정대표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말 궁금했던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말씀하시죠."
정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강현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이렇게 발 벗고 나서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주가조작이 범죄고 투자자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은 대표님과는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이잖습니까?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심력을 소비하고 위험까지 부담하시는 이유가 뭐죠?"
"이게 올바른 일이니까요."
강현태는 정호준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태클을 걸었다.
"그런 마냥 듣기 좋은 말 말고, 대표님의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그에 정호준 또한 강현태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다단계나 주가조작이 국민과 정부에게 있어 좋은 일은 아니잖습니까? 둘 다 한번 벌어졌다 하면 피해 규모가 최소 수백억 단위에 이릅니다. 규모가 클 경우 수천억은 기본이고 조 단위의 엄청난 손실이 나기도 합니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피해액을 누적되면 훗날에는 피해액이 수십조 원에 달하게 될 겁니다."
정호준의 말은 정론이라 강현태는 정호준의 말에 태클을 걸지 못했다. 그저 대한민국을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땄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걸 막느라 혼났다.
정호준이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면 강현태는 실례될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삼킬 수 없었으리라.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고 저도 바쁜 사람이라 모든 사건 사고를 챙길 수는 없지만, 최소한 눈에 보이는 손실은 막아 주고 싶습니다. 그게 내가 나고 자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며 올바르고 당당한 정호준의 발언에 강현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고개를 치드는 것을 억누르기 바빴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다.
이 당연한 이치조차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위선적인 태도가 부끄러웠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일단 식사부터 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할 말이 없어 식사를 핑계로 이야기를 돌리는 것이 강현태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청담동이라는 지역의 막대한 땅값과 한식집이라는 고풍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가격은 밖에 나가 한우를 사 먹는 것보다 비쌌지만 맛 자체는 참 깔끔했다. 비싼 값을 한다고나 할까? 하여튼 그랬다.
이번 만남에 사실 큰 기대는 없던 터라 정호준은 별생각 없이 배를 채웠다. 반면 강현태는 정호준의 올곧음 때문에 흔들렸던 본인의 마음을 추슬렀다.
주문했던 식사가 모두 나오고 마지막 순서인 차와 다과를 맛보며 강현태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가 대표님께 빚진 게 많죠. 그것 채무 삼아 강요해도 됐을 걸 굳이 선택지를 준 이유는 뭡니까?"
"의원님께서 어디까지 가실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 할까요?"
정호준은 강현태를 보며 약하게나마 짓던 업무용 미소를 완전히 지운 채 질문했다.
"강현태 의원님. 의원님께서 바라시는 정치 생활의 종착점은 어디십니까? 3선? 4선? 저는 좀 더 욕심내라고 권해 드리고 싶군요."
"욕심을 내라니요?!"
3선, 4선 의원보다 더 큰 자리가 무엇이겠는가. 강현태의 상상 속에는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을 일컫는 그 자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봉황의자라니!"
"김명호 서울시장이 다음 대통령으로 유력하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전해 들었습니다. 의원님이라고 못 할 이유 있습니까? 김명호 서울시장께서 경제 전문가란 이미지로 봉황의자를 차지했듯 의원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 만드시면 됩니다. 이를테면 공정과 정의의 수호자 같은 이미지, 좋지 않습니까?"
정호준은 강현태의 야망을 부채질했다.
"김명호 서울시장께서도 이런저런 위기를 겪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의원님께서 봉황의자를 꿈꾸신다면 리스크를 감수하셔야 합니다.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모르실 리 없으리라 믿습니다."
위험한 다리를 건널 각오를 확인하고자 한다는 정호준의 말에 강현태는 물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대체 왜 나를 봉황의자에 앉히려는 겁니까?"
강현태는 어리석지 않았다. 어리석기는커녕 현명한 사람이었다. 강현태는 정호준이 장희팔 사건을 알려 주는 순간부터 지금 이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호준 대표가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잖습니까.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해도 됐을 텐데, 왜 나입니까? 아니라는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강현태는 정호준이 거짓을 이야기하면 알아차릴 수 있다는 뉘앙스로 경고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진실되게 이야기 좋겠다는 계산을 마친 정호준은 말했다.
"악연도 인연이니까요.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한테 찾아가서 장희팔을 잡으라고 알려 줘 봐야 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보를 전달해 줬다고 장희팔 일당을 일망타진할 인력을 동원할 힘을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고요. 의원님은 그 당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패였습니다."
"팬덤엔터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구할 충분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잖습니까?"
"자금이 생겼다고 익숙한 것을 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할 이유는 없죠. 한번 합을 맞춘 만큼 쓸데없는 곳에 힘을 쓸 필요도 없고요. 구관이 명관이래잖습니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이치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저는 아직 저는 의원님이 봉황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돕겠다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강을 건널 담력이 있으신지 확인하지 못했잖습니까? 제가 결정했다고 정말 의원님이 봉황의자에 앉으실지도 알 수 없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