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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이들과 실패한 이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건 지난날을 회상하며 후회라는 행위를 하곤 한다는 거다.
성공한 이들이 후회한다는 걸 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들도 후회는 했다.
실패한 것을 이렇게 했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이들과 달리 성공한 이들은 성공했으면서도 과거를 돌아보며 좀 더 성공할 수 있었던 방법을 찾고 그 당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을 반성했다.
후회라는 감정은 사회적인 성공 외에도 부모 자식 관계, 형제 관계, 친구 관계, 남녀 관계와 같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
김은주가 지금 열렬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 또한 후회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한번 해 볼걸.'
정호준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위태로웠던 삶을 구원해 준 남자라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몇 번씩 감정을 되돌아봤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정호준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이유만 떠올라 별 소득이 없었지만 말이다.
정호준은 아닌 척하면서 일일이 챙겨주고 신경 써 주었고, 자신보다 어리면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연이은 성공으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또한 멋졌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그녀가 의지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본인이 정호준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건 김은주가 소심하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은 아직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었다. 변화하는 시대상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는 10대라면 또 모를까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30대의 여성들은 특히 그랬다.
그들의 연애는 여자가 신호를 주고 남자가 고백하고 시작하는 연애이거나, 아니면 그냥 여성이 맘에 들어 남자가 대시하고 대시한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고백을 받는 그런 방식으로 연애가 이뤄졌다.
'괜히 고백했다 거절당하면, 지금과 같은 관계로도 지낼 수 없게 돼.'
동성이 아닌 남녀 사이라 더더욱 두려움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게 동성끼리야 기분 나쁜 일이 생겨 죽일 듯이 서로 물어뜯어도 다음 날이면 화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남녀 관계는 그렇지 못했다. 고백을 하는 순간 고백받은 상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고백을 받아 주면 더 바랄 게 없는 최상의 결과였지만 만약 거절당하기라도 하는 날엔 그 순간부터 관계가 어색해졌고 고백하기 직전의 관계로 회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망설였다.
김은주는 연예인답지 않게 소심하고 조용한 성향을 지녔지만 그게 둔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신호를 보내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정호준이 모른 척 자신을 밀어낸다는 것쯤은 이미 옛날옛적에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호준에게 고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끝날 짝사랑이었으면 용기를 냈어야 했어.'
고백 한번 못해보고 너무도 허무하고 한심하게 끝나 버린 짝사랑에 후회와 미련이 앞을 가렸다.
미련을 가지면 어쩌겠는가? 이미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후회와 미련을 흘려 보는 것밖에 없었다.
결혼식 날짜까지 이미 정해졌다고 알려 오는 정호준에게 지금 고백하는 건 어색해지는 것을 넘어 인연이 끝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호준이한테 미친년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뒤늦은 고백을 내뱉지 않고 삭히느라, 북받친 슬픔 때문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통제하지 못했다.
* * *
김은주의 볼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니 당장이라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해 주고 싶은 감정이 샘솟는 걸 보면 남자를 흔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미녀의 눈물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나 보다.
실시간으로 움직이려는 팔과 위로를 건네려는 입을 억누르는 데 큰 힘을 썼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김은주를 헷갈리게 만들고 여지를 주는 행동이란 걸 정호준은 잘 알고 있었다.
둔감해서 눈치를 못 챈 것도 아니면서 세상에 자신이 좋다며 호감을 표하는 미녀에게 별 감정 없을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것도 호감을 표하는 여성은 그냥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미녀 레벨이 아닌 배우 중에서도 예쁘기로 소문난 김은주였다.
여자는 예쁘면 3대 고시를 패스한 거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눈이 가고 모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정호준 또한 김은주에게 어느 정도 호감은 품고 있었다.
그저 미국 사회에 좀 더 잘 스며들기 위해 자신의 결혼을 늘 수단으로서 염두에 뒀기에 억지로 밀어냈을 뿐이다.
정호준은 조용히 김은주의 감정이 정리되길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20분 정도 지난 뒤에야 김은주의 감정이 조금은 추스러졌다.
"미…… 미안해. 갑자기 이상한 모습 보여서. 정신과 진료를 다녀온 지 오래 돼서 다시 증상이 나타났나 봐."
말하는 당사자인 김은주도 물론이고 정호준도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핑계로 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여러모로 모두에게 편했으니까.
"결혼 축하해. 너무 멀고 스케줄이 바빠서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누가 봐도 억지로 짜낸 게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 김은주의 행동에 정호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혼자서는 위험해요. 집에 바래다줄게요."
"호준이 너도 바쁘잖아? 매니저 부르면 되니까 괜찮아."
처음부터 직접 갈 생각은 없었다.
"사람 시키면 되니까, 내 말 따라 줘요."
정호준은 자신의 경호팀 직원 중 한 명을 차출해서 김은주에게 붙였다. 정호준은 차출한 경호팀 직원이 김은주가 가져온 차의 운전대를 잡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준비된 차량에 몸을 실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잘 추스르길.'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기쁜 일과 비극적인 일이 존재하는 데 개중에 이유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사건에는 이유라는 것이 존재했다.
'만약 있다 치면 재벌의 갑질 정도랄까?'
아니 재벌의 갑질조차 평소부터 그들이 돈 없는 이들을 밑으로 내려보는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가 있었다.
정호준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다단계 사기를 막는 데도 이유가 존재했다.
'작게는 서민들의 돈을 지키는 거고, 크게는 대한민국을 위해서지.'
사기꾼들이 대중에게 사기 쳐 해외로 빼돌리는 돈은 모두 평범한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 모은 돈이다. 남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훔쳐 놓고 사기꾼들은 해외로 도망쳐 해외로 빼돌린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을 할 거다.
당연히 범죄자로 낙인찍힌 만큼 그 돈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고 말이다.
범죄자들이 호의호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줄고 내수시장에서 건강한 소비로 이어졌을 선순환을 없앤 꼴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약화시키는 행위인 것.
'큰 사건들만 막아도 최소 십 수조는 지킬 수 있다.'
좀 더 나은 투자 환경을 위해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한국 국적을 버렸지만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남아 있었다. 정호준은 2회차의 삶을 시작한 후 장희팔과 팬덤엔터 사기. 이렇게 두 차례의 사기를 막아 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호준이 직접 막아 낸 사기는 건 위의 두 건에 불과했지만 정호준의 행보가 나비 효과를 일으키며 본래 발생했어야 할 엔터주 주가조작 사건들 또한 자취를 감쳤다. 팬덤엔터 주가조작 사건 때문에 한창 집중되던 엔터주 투자에 대한 관심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호준이 한국에 들어온 목적 중 하나는 추후 있을 주가조작 사건을 막아 내기 위해서였다.
'플레닛72도 막았어야 했는데, 사는 게 바빠서 잊고 있었다.'
'플레닛72'는 어두운 곳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나노 이미지센서의 상용화칩을 개발했다는 신기술 개발을 호재 삼아 주가를 띄운 주가조작 사건이다. '플레닛72'측은 그들이 개발한 신기술이 시장 규모 7조 원에 이르는 세계 이미지센서 시장에서 경쟁 중인 일본을 제칠 수 있게 해 줄 기술이라고 홍보했다.
일본이 거론돼서일까? 아니면 철저히 준비되어서일까? 기술이 정말 그렇게 효과적인지 검증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플레닛72'는 주식시장의 광풍에 휩싸였다.
2005년 11월, 정확히는 11월 13일부터 주가가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12월 6일까지 이틀을 제외한 15일 동안 상한가를 기록했다. 연이은 상한가에 2,000원대에 머물던 주가는 무려 20배 뛰어올라 4만 원을 돌파했다.
이러한 폭등은 사람들의 욕심이 어우러진 주식시장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다.
'플레닛72'라는 회사가 아예 견실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주가조작에 이용된 뒤에도 22년까지 회사의 명맥은 계속 이어 갔지만, 중요한 건 신기술이 그들이 말한 것만큼 가치가 있지 않거니와 신기술을 개발했다는 발표 자체도 거짓이라는 데 있었다.
'황우식 때문에 시작된 바이오 광풍은 내가 막을 수 없는 거였다 쳐도, '플레닛72'는 막을 수 있었는데……. 바보같이 잊고 있었네.'
정호준이 방송에 나와, 아니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플레닛72'가 개발한 기술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게 아님을 언급했다면 광기 어린 상한가 행보에 브레이크가 되었으리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정호준은 잠깐이지만 괜한 자책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감정을 흘렸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뭐.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정호준이 한국에 들어온 두 번째 이유 또한 주가조작, 다단계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루보 사태를 일으킨 조수도 회장을 잡아야지.'
조수도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피라미드 사기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다. 장희팔고 달리 지주회사 아래로 문어발 확장을 이어 간 그는 전성기 때는 산하 계열사가 무려 20개를 넘기기도 했다. 신흥재벌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물론 금방 탈이 났지만.'
2006년 PD수첩을 시작으로 조수도의 JS그룹의 부실 경영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해 감옥에 갈 처지에 놓인 조수도는 비자금 마련을 위한 한탕을 준비했다.
그게 바로 루보 사태였다.
'이런 데 사용하라고 쓰는 말이 아니긴 한데, 참 안 좋은 의미로 꾸준한 사람이지.'
조수도가 참 대단한 게 루보 사태를 일으켜 크게 한탕 한 뒤 경찰에 잡혀간 후에도 옥중에 있으면서도 1,000억 원대 다단계 사기를 또 일으켰다.
그 의지와 머리를 좋은 데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보 사태를 막아야 다단계 사기를 일으킬 자금확보를 막을 수 있다.'
루보 사태로 수많은 사람이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보 사태는 수익을 조수도가 또 다른 다단계 사기를 일으킬 자본이 된다. 루보만큼 피해 규모가 막심하진 않지만 조수도가 이후에도 다단계 사기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면 루보 사태에서 큰 손실을 보게 만들어야 했다.
그를 위해 정호준은 강현태 의원과 약속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