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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꽉 채워 인천공항에 당도한 정호준은 도착하자마자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을 경험하게 됐다.
"정대표님! 한국에 입국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JHJ Capital의 리버풀 구단 매입은 투자가 목적입니까? 대표님의 욕심입니까?"
"이번 한국행이 한국 선수를 뽑아 가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K리그나 KBO에 구단을 인수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한 손에는 사진기를 한 손에는 녹음기가 설치된 마이크 비스름한 것을 들이대며 질문을 던져댔기 때문이다.
경호원들의 제지와 인천공항 측의 협조 덕분에 기자 중 정호준의 지근거리까지 당도하는 이는 없었지만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리 정호준이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왔다지만, 그래도 장시간 비행은 피로를 가져왔다.
'이미지 메이킹을 도와주는 걸로 나와 거래가 끝났다지만. 이건 너무 나를 무시하는 처산데?'
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법의 종이다. 하지만 때로는 돈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렇게 거리낌이 없는 걸 보면.
'한국에 기반이 없다 생각해서 그런 건가?'
속으로 날 잡아서 한번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천공항 쪽에 양해를 구하고 기자회견장을 마련했다.
철컥.
준비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회의장에 들어서니 기자들은 노트북을 펼쳐 놓고 타자 칠 준비를 마쳤다.
회의장, 단상 위에 오른 정호준은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기자회견을 길게 이어 가진 못합니다. 딱 20분만 시간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정호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은 하나같이 손을 들었다.
"오늘경제의 이석현입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민감한 사안이지만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사안이라 여쭙겠습니다. 대표님께서 리버풀 구단을 인수하신 건 투자 목적입니까? 아니면 대표님의 소유욕 때문입니까?"
"둘 다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정중하지만 부족하다는 의미를 담은 말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한 명의 축구팬으로서 구단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든 것도 맞고, 투자를 염두에 둔 선택도 맞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욕망을 채운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 아닙니까?!"
기자석에 앉아 있기는 하나 절차를 밟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소속조차 대지 않는 걸 보니 자극적인 기사로 관심을 끌어 보고자 하는 3류로 보였다.
"우문이군요."
정호준은 질문한 당자사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프리미어리그를 향한 관심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증가하고 있는 그 관심 중에는 큰 자산을 보유한 부호들 또한 존재하죠. 이번에 리버풀 구단을 영입한 후로 더 나은 성적을 내길 바라며 1,000억 원이 넘는 이적료를 사용한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정부지로 몸값이 오르는 건 선수만이 아닙니다. 구단 또한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그 가치가 올라가고 있죠. 구단 운영으로 본 수익에 욕심내지 않고 정상적으로 구단을 경영하기만 해도, 훗날 구단을 매각해야 할 상황이 오면 최소 3배 이상은 먹고 나올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구단주가 되고 싶은 버킷리스트 때문에 시작한 구단주 생활이지만 투자의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2010년 6월. 조지 힉스와 토미 갈랫이라는 두 미국인 구단주 손에서 망가진 리버풀 구단을 인수한 FSC(Fenway Sports Company)가 인수했고, FSC는 리버풀을 인수한 뒤 마이크 에드워드라는 남자를 단장으로 임명해 구단 경영을 맡겼다.
에드워드 단장은 클롭을 감독으로 데려와 리버풀 구단을 다시 명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강한 구단으로 재건했다. 암흑기를 겪다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리버풀조차 구단 가치가 한화로 4조 원에 달했었다.
만약 암흑기를 겪지 않고 노말원을 데려오기 전까지 프리미어리그 우승이나 챔스 우승을 한 번 이상 쟁취해 낸다면.
'최소 구단 가치가 1조 이상은 더 오르지 않을까?'
만약 구단을 매각하고 싶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2020년도쯤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프리미어리그 구단 인수를 위해 움직이지 않던가. 1회차 때보다 더 올랐을 구단 가치보다 더 큰 금액을 받아 낼 자신이 정호준에게는 있었다.
물론 그것도 정호준이 매각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음 질문을 받겠다는 정호준의 말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고 정호준은 다시 한번 지목했다.
"대한 스포츠의 박영주입니다. 리버풀이라는 세계적인 구단의 구단주가 되셨는데, 혹시 한국 구단 인수나 한국 선수를 영입하실 계획 있으십니까?"
한국 선수를 데려다가 쓰길 원하는 건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사항이었다. 골수팬들은 한국 선수를 써 주기를 바라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닌 더 많은 것을 바랐다. 맨체스터 씨티를 인수한 기름국 왕자가 미국에 새로운 구단을 창립해 위성구단으로 사용했듯, 정호준이 한국 구단을 하나 인수해 운영하며 리버풀의 위성구단이 되길 바랐다.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자매결연이라도 맺어 리버풀 유스의 시스템을 전수받길 원했다.
"질문 두 개나 하셨는데요? 한국 선수를 영입하지 않겠냐는 질문에만 대답하겠습니다. 리버풀은 빅클럽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정지성 선수처럼 그럴 자격이 된다면 영입하겠지만, 자격 없는 선수를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지만 20분이 되자마자 정호준은 칼같이 끊고 기자회견을 종료했다.
정호준이 기자회견에서 뱉은 말들은 곧바로 기사화돼 인터넷에 배포됐다. 다만 왜곡된 기사로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칼같이 끊고 자리를 나가면서 한 정호준의 경고 때문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질의응답 저도 개인적으로 녹음했습니다. 혹시나 없는 말을 지어내서 작성한 기사가 있을 시 말을 지어낸 기자님과 그 기자님이 소속된 언론사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자리에 모인 기자들은 정호준이 대한민국에 별다른 기반이 없어 한국 대기업의 재벌 총수들처럼 어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과실을 저질렀을 때 보복하겠다는 말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한국에서 주름 잡는 재벌조차 들으면 몸을 사릴 말이다. 일개 기자들에게 조 단위 자산을 가진 이를 적대할 깜냥은 없었다.
* * *
7월, 습하고 더울 어쩌면 장마 때문에 불쾌함을 겪을 수도 있을 한국행을 선택한 이유는 세 가지 볼일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중 첫 번째 볼일을 보기 위해 정호준은 김은주와 약속을 잡았다.
정호준은 약속 장소에 10분 일찍 도착해 김은주를 기다렸다.
딸랑!
한껏 힘을 준 김은주가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공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배우 포스를 풀풀 풍긴달까?
"어쩐 일로 먼저 보자고 한 거야? 그렇게 연락해도 먼저 만나자고 안 했으면서."
인사를 공격으로 대신하는 김은주의 말에 정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나 스케줄이랑 안 맞아서 그랬지,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야."
"그래? 그렇다고 치지 뭐. 그나저나 미국에 살면서 잘도 여기를 알고 있네. 예약하기 어려운 식당인데."
"좋은 곳에서 한 끼 사고 싶어서 아저씨께 부탁했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박남정을 통해 청담동의 유명 예약제 레스토랑에 예약해 뒀기에 겨우 김은주와 여기서 식사를 약속에 맞출 수 있었다.
"축하해. 이번에 영화 들어간 거 700만 넘겼다며. 아, 천만 배우한테 700만은 크게 안 와닿으려나?"
대성공은 아니더라도 누적관객 450만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긴 박남정은 곧바로 두 번째 작품 '이름 없는 영웅들'이란 작품을 찍기 위해 움직였다. 박남정은 김은주를 차기작의 주연 여배우 낙점했다.
'프라하식 연애' 촬영을 마치고 CF를 찍고 휴식 중이던 김은주는 시놉시스도 나쁘지 않은 데다 박남정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어 출연을 결정했다. 전쟁 영화의 특성상 주연으로 캐스팅됐음에도 비중이 적었던 '태극기 흩날리며'와 달리 박남정의 영화에서는 주연이라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졌다.
박남정의 차기작 '이름 없는 영웅들'은 소련 붕괴 직후 핵물리학자들과 농축 우라늄을 북한에 넘어가지 않도록 움직이는 국정원 요원들을 다룬 첩보 영화로 4월 말에 개봉해 6월 말에 스크린을 내렸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하지 마. 박감독님 오해하실라. 그나저나 영화는 보고 물어보는 거야?"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내가 영화를 어떻게 봤겠어. 그냥 소식만 들었어."
"그래?"
정호준의 대답에 잠깐 화색이 돌았던 김은주의 표정이 죽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할 말도 없으면서 네가 먼저 나한테 연락할 리가 없잖아?"
'내가 그렇게 무심했나? 그건 그렇고 여자들은 참. 귀신같네.'
정호준은 자신이 그렇게 무감정한 사람이었나 싶어 돌아보면서도 김은주의 질문 속에 작게나마 드러난 두려움을 읽어 냈다.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
용건이 있는 건 맞지만 용건을 끝낸 뒤에도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기에 정호준은 이야기하는 것을 뒤로 미뤘다.
음식은 충분히 맛있었지만 긴장하며 밥을 먹는 김은주 때문에 정호준도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직접 로스팅한 커피와 제조한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왔다.
예쁜 접시와 다소곳하게 담긴 케이크 조각은 평소였다면 감탄사가 내뱉었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여자의 감이 발동해 정호준이 할 이야기가 자신에게 이로운 이야기가 아님을 눈치챈 김은주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내년 4월에 나 결혼해요."
"뭐……, 뭐?!"
잘못 들었길 바라며 되묻는 김은주의 물음에 정호준은 확인사살을 가했다.
"내년 4월에 결혼한다고."
찰스 로슬러는 아리아가 졸업하자마자 바로 혼례를 올리기를 원했지만 정호준은 뒤로 미루고자 노력했다.
'정략으로 하는 결혼식이지만 그래도 결혼식인 만큼 박남정 아저씨랑 기태 녀석이 결혼식에 와 줬으면 좋겠다.'
가족처럼 여기는 두 사람이 참석해 주기를 원한다는 말에 찰스 로슬러는 혀를 차며 결혼식을 뒤로 미루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
"누구랑?"
"로슬러라는 이름은 들어 봤지? 그 가문의 여식이야. 아리아 로슬러라고 미국 사교계에서는 꽤 유명해."
정호준은 자신을 좋아하는 여성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 않았다. 연애 한 번 못해 본 대학교 세내기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모르겠는가?
그저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 마음이 어려울 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고 도와준 것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정호준은 한국에 있지도 않았다.
'활동하는 곳도 다르니까 기대해 볼 만했는데. 연예인답지 않게 은주 누나가 순애보였지.'
정호준은 만날 때마다 김은주가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한국까지 찾아와서 가장 먼저 김은주를 만난 거다.
매체나 다른 사람을 통해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 자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은 여성에게 정호준이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정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음을 터트린 김은주를 조용히 지켜봤다.
북받친 김은주의 감정이 조금은 추스러질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