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
리버풀 보드진과의 만남을 마친 뒤로 시간을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6월이 중순으로 접어들었을 무렵 마이클 스팬서로부터 리스트에 적혀 있던 미국 은행들과 CDS 계약 체결을 완료했고 맨하튼에 분점을 낸 중국 6대 은행에 방문해 상품 제의를 마쳤다는 연락이 왔다.
- 대표님이 자신하셨던 대로 미팅 담당자들로부터 구미가 당긴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리만 브라더스를 인수하느라 큰돈을 사용했는데, 선물시장에서 큰 손해를 봤거든요. 돈 나올 구석이 간절할 겁니다. 급한 모습 보이지 말고 마저 마무리 잘해 주세요."
JHJ Capital이 WTI 원유 선물에 베팅한 탓에 중국계 자금은 홍콩 선물시장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사람이든 회사든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든 간에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길 집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물시장에서 비롯된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게 된 중국 공산당은 손해 본 것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금융계 종사자들에게 실적을 재촉하는 채찍질을 감행했다.
고점은 아직 멀었다는 듯 꾸준하게 증가세를 이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모기지 CDS(신용부도스와프) 상품을 만들어서 다달이 고액의 상품료를 납부하겠다는 마이클 스팬서의 제안은 중국계 은행 종사자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실적이었다.
거미가 열심히 쳐 둔 거미줄 위로 곤충이 알아서 날아든 격이랄까?
"위의 허가가 필요합니다만, 저희는 CDS(신용부도스와프) 계약 체결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중국계 은행 종사자들은 마치 단체로 짜기라도 한 것마냥 윗선을 핑곗거리 삼아 시간을 벌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며칠 후에 다시 방문해 달라며 약속을 잡은 뒤 마이클 스팬서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그가 제안한 모기지 CDS 선물 계약에 대한 내용이 각 은행 최고 책임자에게 보고 되었다.
은행 최고 책임자들은 미국 인맥, 미국 내 중국 커뮤니티를 동원한 건 물론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MSS)에까지 도움을 요청해 CDS 계약을 체결한 곳이 얼마나 되는지, 마이클 스팬서란 인물의 평판은 어떤지를 확인했다.
시간을 벌어 두고 모은 마이클 스팬서란 남자의 정보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우리에게만 CDS 계약을 제안한 게 아니네.'
미국 인맥과 중국 커뮤니티를 총동원해 마이클 스팬서란 남자의 정보를 찾았고 금방 알게 되었다. 마이클 스팬서가 본인들의 은행뿐 아니라 다른 6대 은행에 CDS 계약을 제안했고 미국 은행들과는 아예 CDS 계약을 체결한 상태란 걸.
'펀드 자금을 모두 끌어모은 것도 모자라 빚까지 낸 건가? 그러고 보니 마이클 스팬서가 아사백격(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지?'
'대체 뭘 믿고 정신 질병이 있는 놈한테도 거금을 맡긴 거지?'
'수천만 달러는 족히 손해 봤을 텐데,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베팅을 하는 걸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아사백격 증후군 때문이 아닐까?'
아스퍼거 증후군은 정신병의 일환으로 공식적으로는 전반에 걸친 발달 장애,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에 속했다.
사회상 상호작용을 조절하려는 눈 마주침, 표정, 자세, 몸짓 따위의 비언어성 행동 사용 시 현저한 장애를 보이거나, 발달 수준까지 인간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걸 시작으로 타인과 기쁨, 관심, 성취를 나누고자 하는 자발적인 욕구가 없었다.
게다가 이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있는데,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 끊임없는 집착을 이어 간다는 것.
안 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큰 손실을 이어 가고 있음에도 청산을 하기보다는 미련하게 존버를 이어 가는 이해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가정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두 번째 미팅날이 되었다. 마이클 스팬서는 약속했던 2차 미팅 날에 늦지 않게 나왔다.
"요청하신 모기지 CDS 상품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계약서를 뽑은 채로 마이클 스팬서가 방문해 주기를 기다렸던 중국계 은행들은 그 자리에서 CDS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계 은행들은 그렇게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넜다.
* * *
중국 상업은행(CCB), 중화 커뮤니티 은행(CCB), 중국 농업은행(CAB), 중국 건설은행(CCB), 중국 공상은행(ICBC), 중국은행(BOC) 등 맨해튼에 지점을 낸 6개의 중국계 은행들과 CDS 계약을 체결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정호준은 채비를 마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호준이 마이클 스팬서에게 일본의 은행들을 리스트에서 제외하라 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JHJ Capital에 분명 이를 갈고 있을 테니까.'
일본 정치인들이 말하길 한국인은 냄비처럼 빠르게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는단다. 정호준은 그 발언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불매운동이 길게 이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2019년에 시작된 불매운동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아베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반감이 치솟아 시작한 'No Japan' 운동이 유일하게 해를 넘기긴 했지만 이 불매운동도 게임과 애니메이션, 청소년관람불가 영상들과 같은 종목에는 관대한 불매운동이었다.
한국인들을 빨리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면 한국인들은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른 국민성을 지녔다고 말하리라. 앞에서는 친절하고 챙겨 주고 환하게 웃음 지어도 뒤로 가서는 뒷담화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우는, 신뢰하기 어려운 이들이 바로 일본인들이었다.
물론 일본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50년대, 60년대생과 같이 일본이란 나라가 잘나갈 당시의 사회를 보고 자란 50년대생, 혹은 그 이전 세대들이 구축한 회사 문화를 경험한 이들이 주로 그랬다.
정호준은 일본인들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의 연장선으로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보통 집요한 게 아니라는 특징이다.
'쪼잔함의 대명사로 봐도 되지 않을까?'
한국 사람들이 생각날 때 화끈하게 따져 빠르게 갈등을 해소하거나 해결 본 뒤 혹은 해결을 못 해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잊고 넘어가는 것과 달리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손해를 보거나 불합리한 대우, 감정이 상했던 걸 마음속에 담아 뒀다가 훗날 결정적일 때 그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행동을 보이곤 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충동적이면서도 끈덕지게 기다리고 인내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잘하는 나라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요동 반도 점유는 그리 오래 이어지질 못했는데,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렇게 3개국이 뜻을 모아 일본에게 청나라에 요동 반도를 반환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에서는 삼국간섭이라 불렀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낀 느낌이 강했고 주로 러시아와 독일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이에 악감정을 품은 일본은 체급을 키워 10년 뒤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20세기 들어 동양 국가가 유럽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최초의 사례였지 아마?'
사실 완벽한 승리라고 말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은 판정승이었지만.
어쨌건 과거에도 자신의 것을 빼앗은 사건을 주도한 나라 중 하나에게 보복을 감행했는데, 지금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는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사람보다도 더 변하지 않는 게 바로 국민성과 국가의 기질이었다.
'사실 손해를 본 게 이번 타겟인 미츠바시 은행과 미츠이나 은행이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한국도 그렇지만 개인을 넘어 집단, 더 나아가 국가에 강한 소속감을 갖고 있는 일본이다. 미국인, 미국 법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진실은 금융 후진국이라 불려도 부정하기 어려운 한국계 자금과 한국인 오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을 리 없다.
정호준과 JHJ Capital은 일본 은행들을 낚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미끼였다.
"지시하신 대로 미츠바시, 미츠이나와 CDS 선물 계약 체결을 완료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가서 챙기지 않고 심복인 조나단을 시켰지만 어쨌든 중국의 은행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츠바시와 미츠이나 또한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아직 CDS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체결하라고 준 자금까지 합하면 모두 합쳐 245억 달러.
JHJ Capital이 원유 선물로 벌어들인 수익의 반절 가까운 돈이 다시금 시장으로 풀렸다.
* * *
미츠바시, 미츠이나와 CDS를 체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정호준에게 기쁜 소식이 전달되었다.
- JHJ Capital이 최종 인수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인상을 심어 준 뒤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리버풀 인수 건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매각금을 지불하기만 하면 되는 협상 막바지로 접어든 것.
정호준은 연락을 받자마자 법무팀을 동반해 전세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갔다
"리버풀을 잘 부탁드립니다."
.
마지막 사인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무리스와 만나게 되었는데. 조나단 무리는 걱정과 미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리버풀이라는 구단의 성공을 기원했다.
"무리스 가문이 매각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잘 키우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조나단 무리의 질문에 정호준은 무리스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94%가 넘는 주식을 모두 넘겨받는다는 조항을 1%의 주식을 남겨 두는 쪽으로 수정한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구단 명예 회장 자리를 마련할 테니, 괜찮으시다면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동양인이 인수했다는 이유로 초기에 꽤 큰 반발이 일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거든요. 저와 JHJ Capital의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구단주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구단을 운영해 온 무리스 가문에 대해 리버풀 팬들은 이런저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명예 회장 자리를 마련하고 그로부터 조언을 받는 식으로 구단 운영에 계속 참여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해 자신을 향한 비난과 반발을 해소하고자 했다.
일종의 방패막이라고나 할까?
정호준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2007년 2월 인수가를 기준으로 15년 뒤에는 15배 이상 성장할 리버풀이다. 1%의 주식이 갖게 될 가치는 수천억 원에 달했기에 아깝기는 했지만.
'아깝긴 하지만 쓸 때는 써야지. 끝까지 구단을 위하는 모습이 멋지긴 하니까.'
정호준이 생각하기에 조나단 무리스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에게 남긴 지분 1%를 제외하고는 전부 빨아들일 생각이니 경영에 문제가 생길 소지도 전무하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 리버풀. 2억 5천만 파운드에 JHJ Capital에 매각되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경악할 구단 인수 소식이 세상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