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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19화 (11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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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은 미리 정해 둔 식순에 의거해 진행됐는데, 따로 추가된 일정이 없음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 이어졌다. 식을 시작한 후로 짧으면 30분, 길어도 1시간 정도면 끝이 나고 사진 찍으러 다니는 한국의 졸업식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막 사회에 들어갈 어린 친구들에게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값진 이야기지만 1회차 때는 공무원으로 조직 생활을 해 보고 지금은 아예 오너로 활동하는 정호준에겐 아는 이야기 또 하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연설하러 나온 이들이 위트 넘치게 이야기해서 버틸 수 있었지 교장의 훈화와 같은 연설이 이어졌다면 졸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으리라.

'그나저나 꽃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네?'

미국에서는 졸업식 때 꽃을 받는 건 자녀가 여성인 가정뿐이란 걸 정호준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졸업 축하해요 아리아."

식순이 모두 끝난 뒤에야 정호준은 아리아 로슬러를 만나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아리아의 대답을 들으며 정호준은 미리 준비해 둔 꽃다발을 건넸다.

"예뻐요."

꽃을 건네받은 아리아는 활짝 웃으며 꽃다발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았다.

"졸업식에 꽃이 빠지면 허전하잖아요. 그래서 하나 사 왔어요.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호준이랑 만나고 난 뒤로 처음 받아 보는 선물이네요. 고마워요."

미국 커플들은 한국인 커플들처럼 100일, 200일, 1년 등의 만난 시간과 관련한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

그들이 연인을 위해 챙겨 주는 기념일은 서로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 정도다. 그리고 그조차도 밸런타인데이는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남자들이 많았다.

결혼을 하는 경우 결혼기념일까지 추가로 챙겼고 말이다.

생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아직 깊은 관계로 발전하기 전인지라 딱히 선물을 주거나 교환할 기회가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호감을 사기 위해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그런 행위가 종국에 가서는 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1회차 때 경험한 연애들을 통해 꿰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이 문화가 다르기는 아리아도 여자지.'

아니 남녀를 떠나 해 주다가 안 해 주면 섭섭한 게 사람이잖은가?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게 줬던 거 뺏는 거란 말마따나 처음부터 안 주는 게 주다가 마는 것보다 나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호준의 사정과 생각이었다.

"자네, 내 딸과 교제하면서 선물 한번 안 해 준 건가?!"

자녀와 교제하는 애인이 딸에게 선물을 해 준 적 없다는 말을 듣게 된 부친의 입장은 또 달랐다.

손녀라 해도 믿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 딸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에게 정호준이 무심하게 대한다고 받아들인 찰스 로슬러 주니어는 목소리를 높였다.

찰스 로슬러 또한 정호준을 뭔가 불만이 섞인 눈초리로 바라봤고 말이다.

장인과 처조부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정호준은 뇌세포를 총동원해 상황을 무마할 말을 찾았다.

다행히 정호준의 뇌는 그의 간절함에 응답해 주었다. 문뜩 뇌리에 아리아 로슬러의 생일이 5월 31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달 말 있을 아리아 생일에 선물을 챙겨 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럼요!"

딸(손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정호준의 대답에 터질 뻔했던 찰스들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큰일 날 뻔했네.'

갑작스런 위기에 알맞게 대처하긴 했지만 안쓰럽게도 정호준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호준이 무슨 선물을 줄지 기대해도 되겠죠?"

선물을 준비했다는 정호준의 답변에 아리아 로슬러가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산 넘어 산이네.'

위기는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기대하면 곤란해요. 준비한다고 준비했는데, 그게 아리아의 마음에 들지는 다른 문제니까요."

아직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일단 준비한 척 연기하면서도 한 발 뒤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래도 기대할 거예요."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졸업식을 마친 뒤에도 정호준은 장장 이틀 동안 붙잡혀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국도 졸업식에 당일에는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정호준은 아리아와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찰스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해야 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고 이전보다 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불편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과 졸업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파티에 아리아 로슬러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동행했다. 로슬러의 휘광 위에 JHJ Capital이라는 이름이 추가돼서 그런지 정호준이 황인이라고 시비 거는 삼류잡배는 존재하지 않았고 큰 문제 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있다. 오다가다 얼굴을 이야기를 듣고 안면을 익혀 졸업생 간에 최소한의 친분은 존재하던 한국과 달리 같은 날 같은 과에서 졸업식을 마쳤는데도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보여 놀랐다.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졸업을 못 하다니 조금 특이하네요."

1년에 두 번 있는 졸업식 중 전반기 졸업식이 중간고사가 끝난 1개월 후인 5월, 6월에 열리는 만큼 졸업식을 마쳤음에도 학교에 계속 다녀야 하는 아이러니를 지켜보게 되었다.

덕분에 정호준은 아리아의 선물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 * *

계획이란 건 상황에 따라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호준의 투자 계획 또한 그랬다.

시카고로 복귀한 정호준은 곧장 마이클 스팬서에게 전화 통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특유의 늘어지는 톤으로 전화를 받은 마이클 스팬서의 수신에 정호준은 조용하지만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 JHJ입니다. 지금 전화는 보안 작업이 완료된 전화라 길게 이야기하기 어려우니 전화를 드린 용건만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시카고로 돌아오기 전에 뉴욕에서 만나 해결해도 될 문제긴 했으나 괜히 접점을 남기지 않도록 조심했다. 한 번은 우연이어도 두 번 세 번은 아니라는 말처럼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 의혹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 처음 드렸던 CDS 체결 은행 목록에서 미츠바사 은행과 미츠이나 은행은 제외해 주십시오. 두 은행은 우리 JHJ Capital에서 직접 CDS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일본이 빠르게 무너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미츠바사 미츠이나 은행을 CDS 계약을 체결할 은행으로 둔 건 어디까지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서가 남아 있기에 행한 방침이다.

'한국인으로서 전범 기업이 잘 사는 꼴을 그냥 두고만 보고 싶지 않다.'

미츠바사, 미츠이나. 두 대기업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직전까지 대한민국의 선조들을 강제로 동원해 값싼 임금으로 부려 먹은 기업들이다. 싼값에 노동력을 사용하는 건 기본이었고 임금을 체납하고 위험한 일에 투입시켜 많은 사상자를 냈다.

패망 후 지폐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사업을 활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싼값에 사용했던 조선인들에게 준 임금을 아예 휴짓조각으로 만들기도 했고 말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선조들의 피눈물을 쏙 뽑아낸 놈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미츠바사와 미츠이나는 잠깐 흔들리기는 했으나 대기업으로써 명맥을 이어 갔다. 1회차 때야 정호준에게 별다른 힘이 없었기에 그냥 욕을 한번 찍 뱉고 말았지만.

또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정호준은 자본과 적절한 기회를 모두 손에 쥐고 있었다. 물러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 일까지는 대체로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일본 돈을 빼먹는 일만큼은 예외지.'

정호준의 기반은 전부 미국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한국에도 존재했다. 미국 국적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겠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죽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감정만 갖고 움직인 건 아니다.

'전범 기업을 털어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을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만들 수 있다.'

국민 정서가 일본이란 나라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을 생각하면 일본의 돈을 빼먹은 일로 추후 한국 투자가 수월해질 거다.

돈도 벌고 투자 환경도 좀 더 수월하게 변화시키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였다.

- 수수료가 줄어드는 게 아쉽습니다만.

마이클 스팬서는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수수료를 걱정할 뿐.

'펀드매니저는 펀드매니저라는 거네.'

서브 프라임 사태로 큰돈을 번 뒤 시스템에 회의감이 들어 잠적해 수년간 휴식을 취하고, 그 이면으로는 애국심으로 정부에 협조하려 했다지만 마이클 스팬서가 월가에서 일하는 펀드매니저로 차가운 심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일을 깔끔하게 잘 끝내 주시면, 중국의 6개 은행에서 체결한 CDS로 얻게 될 수익의 비율을 올려서 정산액을 맞춰 드리겠습니다.

세상 가장 치사한 게 줬다 빼앗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정호준이었기에 마이클 스팬서의 요청에 따라 본래 받아야 할 수수료를 맞춰 주었다.

'떨어지는 게 있어야 열심히 일하는 게 사람이지.'

* * *

2007년 봄이 오기 전에 스마트폰을 세상에 알릴 계획을 짜 둔 스티븐 존스 일정에 맞추기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일정에 맞출 수 있겠다.'

JHJ Capital 때문에 프로젝트를 조금 늦게 시작했음에도 다행히 처음 세운 계획대로 끝날 것 같다 안도하는 스티븐 존스에게 동료인 짐 쿡이 다가왔다.

"어쩐 일이야?"

"JHJ Capital이 주식을 매수하고 있어."

"또?"

"저번보다 심각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 지난번처럼 다짜고짜 찾아가서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잡스."

"내가 언제 무례했다고 그래?! 그리고 그때는 내가 아파서 평소보다 더 예민했어. 컨디션이 나쁘면 쉽게 화를 내게 된다는 걸 쿡 너도 알고 있잖아."

짐 쿡은 스티븐 잡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민함과 까칠함은 잡스라는 인간의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짐 쿡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JHJ Capital은 자신들이 엔플 주식을 7.3% 넘게 갖고 있다고 공시했어."

"미친놈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티븐 존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주식분할을 통해 발행주식을 2배로 늘렸음에도 5%의 지분을 지분을 확보했다는 건 JHJ Capital의 자금력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이야기였다.

"모르겠어. JHJ는 시장에 풀리는 주식을 쉬지 않고 매입을 이어 갈 뿐이야.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선 전혀 전달해 온 바가 없어."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해 트라우마를 갖게 된 스티븐 존스는 턱밑에 칼을 들이대는 행위에 또다시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JHJ가 이대로 3%를 추가로 소유해 10%지분을 채운 뒤 여러 재력가들과 힘을 합친다면 최악의 경우 또 한 번 바닥으로 내쫓길 수 있다.

그런 미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스티븐 존스는 정호준에게 만나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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