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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국가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뭘까?
인구? 영토? 아니면 군사력?
셋 다 틀렸다. 20세기부터 전 세계의 국가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건 다름 아닌 '경제력'이었다.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하는 시대다.'
전쟁의 패러다임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총력전'으로 변하게 된 20세기부터 경제력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사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사일, 전투기, 군함, 탱크는 물론이고 보병에게 쥐여 주는 대포나 소총까지 다 돈이다. 적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전부 돈이 들었다.
군사력조차 경제력이 없으면 유지하기 어려운 시기가 됨에 따라 20세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는 상식이 박힌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라면 어느 곳이든 경제 발전에 신경을 쏟았다.
아시아로 분류되는 대륙에는 세계 최빈국으로 분류됐던 과거를 지닌 나라가 둘 존재했다. 하나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일구어 낸 대한민국.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의 불친절한 이웃 중국이었다.
대한민국이 위치한 한반도는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장장 35년이나 이어진 일제강점기 동안 매장되어 있던 자원의 70%를 일본에 수탈당했다. 꿈에 그리던 광복도 잠시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갈등에서 촉발된 전쟁(대리전)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3년간 계속됐던 전쟁은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좋지 못한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거기다 전쟁을 3년이나 지속했음에도 명확한 승자 없이 휴전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는 바람에 본래의 국토마저 인구가 반으로 토막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영토를 노렸던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중공업 시설이 북쪽에 몰려 있던 한반도 남쪽을 영토로 소유하게 된 대한민국의 국토는 폐허만 남았다.
'조상님들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허허벌판과 밀도 높은 인구가 전부인 남한에 미국은 자본과 식량을 지원해 주었고 그 덕에 남한, 대한민국은 마지막 숨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전후의 위기를 미국의 지원으로 넘긴 후에도 미국의 지원은 계속 이어졌다.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이 정말 고마운 나라임은 분명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미국의 지원은 결코 인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반도가 완전히 적화통일되어 공산주의 세력이 미국의 바다가 된 태평양으로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미국의 필요에 의한 지원이었다.
'그렇다고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도와주는 쪽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한국에게 미국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저 맹목적으로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한국은 충분히 지원받을 만한 자격을 증명한 나라라는 거다.
'그도 그럴 게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유일한 사례잖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국가는 세계에 셋뿐이었고 그중 공산주의나 다른 세력에 의해 통일되지 않은 나라는 지구상에 단둘, 한국과 독일뿐이었다.
한국도 한국이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서독에 의한 통일된 통일 독일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준 사례가 되어 주었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기적과 라인강의 기적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독일과 일본, 한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각 나라와 세계는 라인강의 기적, 일본의 기적(고도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호준은 한국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이 가장 기적이라 부르기 합당하다 생각했다.
'국뽕과 사심을 빼고 생각한 결과다.'
앞의 두 사례를 부정하거나 대단하지 않다고 폄하하는 게 아니다. 그저 한국의 경제 성장과 독일, 일본의 경제 성장은 궤를 달리한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게 두 나라가 아무리 전쟁에서 패망한 국가라지만 독일이나 일본은 한국보다 더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한 데다가 다수의 기술자와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반면 한국은 독일이나 일본처럼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았고 기술자와 지식인의 수도 두 나라와 비교해 극단적으로 적었다. 대한민국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제로부터 시작해 경제 규모 15위 안으로 진입한 세계 유일의 나라였다.
세계사와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었다.
그런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들을 베껴다 중국식으로 조금 바꿔 적용한 게 바로 옆 나라인 중국이었다.
한국은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은 최소 5% 이상의 성장을 매년 기록하게 된다. 5%라고 말했지만 대게 매년 7% 이상의 성장을 했다. 1956년(미국의 지원 감소), 1960년(4.19혁명), 1962년(쿠바 미사일 기지로 세계 경색), 1980년(2차 오일쇼크), 1998년(IMF 외환위기)과 국내 정치나 세계적으로 심각한 일이 발생했을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1953년 이후 곤란한 사건이 벌어진 해를 제외하면 근 50년간 꾸준하게 성장한 대한민국조차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이라 말하곤 하는데.
'중국은 우리보다도 더 급속하게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런 한국보다 더 빨리 성장한 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1970년대 말 중국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으로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넓은 국토, 세계 제일의 인구를 보유하고도 세계 최빈국으로 분류되었다.
중국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82%를 차지하는 자본과 기술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후진국이었다. 이대로 두고 보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에 의해 80년대에 베이징과 멀리 떨어져 있는 광둥, 푸젠 지역의 세 개 도시를 개방했다.
개방한 3개 도시의 성장, 그중에서도 대표격인 광저우가 기록한 거대한 성장률을 확인한 중국 공산당은 3개의 개방 도시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적용하며 도시를 개방했다.
점에 불과했던 도시 개방이 시간이 지날수록 동부를 잇는 선으로 변모했고 선은 다시 면이 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잠깐 다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미 중국 내수시장의 돈맛을 본 세계는 중국 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그렇게 9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겨우 세계 최빈국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중국이 이룩한 성장은 한국의 성장보다도 더 빨랐지. 하지만 빠르다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지.'
서유럽, 일본, 독일 등이 100년 이상의 세월을 축적해 이룩해 낸 성장이다. 그러한 경제력을 반세기, 또는 반세기도 안 되는 세월에 따라잡았는데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대기업을 먼저 키우는 한국형 모델을 따라간 것 또한 중국에 있어 불행이 되었다.
중국의 인구가 한국보다 30배 많은 만큼 내수시장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고 이런 환경은 중국의 부자들이 한국의 부자들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커다란 빈부격차를 만들어 버렸다.
'그나마 수십 년 영국에게 홍콩이랑 홍콩 지근거리에 위치한 선전의 증권사들은 다른 업종처럼 격차가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1회차 때 홍콩은 1997년 이후에도 도쿄와 함께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불리는 곳이었는데. 2회차인 현재는 정호준 때문에 홍콩과 선전의 상황이 변했다. 홍콩과 선전에 위치한 증권사들을 통해 WTI 원유 선물을 매수했던 정호준의 행보 때문에 두 도시에 적을 두고 있는 중소 증권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호준이 홍콩 선물시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약 273억 달러. 순이익 273억 달러에 원금 65억 달러를 더한 338억 달러(38조 8,700억)가 한꺼번에 시장에서 빠져나간 셈. 금융이 한쪽이 따면 한쪽은 잃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의 성질을 띠는 것을 고려하면 시장에 아무런 타격이 없을 리 없었다.
"대체 왜 추가 대출을 못 해 주겠다는 거요?!"
"당국의 지시입니다."
"이대로 그냥 혼란을 방치하는 게 당의 선택입니까?"
홍콩은 물론이고 지근거리에 위치한 선전에 이르기까지 대출에 제동이 들어갔다.
파산!
체급 덕에 버틸 여력이 존재하는 거대증권사 십수 개를 제외한 증권사들은 하나같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유서 깊은 증권사까지 파산하는 형국임에도 선물에 손을 댔다 돈을 잃은 개인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사실이 중국인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중국 공산당 주도의 정보 조작과 강력한 정보 통제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선물 손해를 증권사들의 사내보유금 등을 활용해 갚아 나가는 공산당스러운 조치를 단행했지만, 홍콩과 선전시는 하루에 하나씩 증권사가 파산하는 사태는 말로 설명하는 게 어려울 정도의 패닉 상황을 몰고 왔다.
* * *
항공기에 탑승해 뉴욕에 당도한 정호준은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JHJ Capital의 대표 호준 정입니다."
정호준이 약속을 잡은 남자의 이름은 마이클 스팬서. 2005년 초 미국 주택 시장의 문제점에 인지하고 시장이 붕괴될 것이라 예측해 하락에 투자하는 공매도를 진행한 남자였다. 그것도 주택 시장의 모기지 채권 상품에 보험이나 옵션이 없어 골드만식스, 도이치뱅크, 베어스프링스 등의 대형 투자은행에 찾아가 없는 상품까지 신용부도스와프(CDS)로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MathScience Asset의 마이클 스팬서입니다."
마이클 스팬서는 나른해 보이고 뭔가 어색함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는데, 정호준은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가 뛰어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1회차 때 서브 프라임 사태 때 공매도로 가장 큰돈을 번 건 조나단 폴슨이란 남자지만, 가장 먼저 이 사태에 주목한 건 바로 눈앞의 남자 마이클 스팬서였다.
'시장의 광기와 인간의 욕심이란 변수를 계획 수립할 때 고려하지 못해 너무 일찍 진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뛰어난 사람이다.'
너무 이른 진이븡로 많은 보험료를 납부해야 했으나 동원한 투자금이 크다 보니 버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험료를 지급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렸으니 높은 보험료를 매달 낸 것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물론 스카우트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정호준은 통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사고 치는 능력자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사교성 없고 까다로울 것 같다는 첫인상처럼 마이클 스팬서는 과묵했다.
마이클 스팬서는 서로를 소개하며 악수를 한 뒤부터 그저 조용히 정호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 번쯤 얼굴을 뵙고 싶었습니다."
"월가의 신성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질 행동을 한 적은 없는데요?"
자기소개 외엔 그 어떤 예의상의 인사치레도 하지 않는 마이클 스팬서의 모습에 정호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심호흡을 한 번 하며 말했다.
"스팬서씨는 모기지에 이상이 있다는 데 베팅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스팬서씨처럼 모기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사를 나눌 때부터 쭉 뚱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라는 게 생겼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펀드 자금을 너무 많이 동원한 것도 문제지만, 투자자들이 스팬서씨의 말을 신뢰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재촉을 없애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수로?"
마이클 스팬서의 질문에 정호준은 나지막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에 대해 운을 뗐다.
"당신이 펀드의 자금으로 체결한 부동산 관련 CDS를 저희 JHJ Capital이 매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지급한 상품 보험료 또한 챙겨드릴 거고요. 그거면 스팬서씨의 자리가 위협당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정호준은 나지막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에 대해 운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