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04화 (104/335)

< 104 >

"……조부님이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나이도 한참 어린 아리아의 부친인 찰스 로슬러 주니어와 비교해도 40세 이상 차이가 나는 정호준이 찰스 로슬러의 생사를 논하는 건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도 될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찰스 로슬러도 찰스 로슬러 주니어도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뿐 정호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호준은 폭탄을 넘겨줄 당사자를 언급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폭탄을 건네줄 대상은 찰튼 주니어의 영향력이 깊게 서려 있는 사업체면 더 좋겠죠."

정호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면 누구나 예상할 법한 대상이었다.

"찰튼 로셀러 주니어의 영향력이 막대한 회사가 막심한 손해를 입고 파산하게 되면 로슬러 재단의 이사회가 찰튼 주니어의 능력을 다시 생각할 테니까요."

폭탄이 폭탄인 줄 모를 때 예쁘게 포장해서 경쟁자에게 넘긴다. 이것만큼 경쟁자를 단숨에 나락으로 보낼 방법이 또 있을까?

게다가 그들이 건넬 폭탄은 그냥 폭탄이 아니다.

'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 핵폭탄이지.'

잠깐 서로를 소개할 때를 제외하곤 정호준만 계속 떠들었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보따리를 모두 풀은 정호준이 할 말을 모두 마치고 입을 다물자 회의실은 다시금 정적이 맴돌았다.

"……."

정적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회의장을 잠식한 정적이 갖는 무게는 처음 정호준이 불편하다고 여긴 정적의 수 배는 무거웠다. 정호준의 내뱉은 이야기의 내용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정호준은 차마 시계를 볼 여유가 없어 정적이 얼마나 이어졌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무거운 정적은 생각의 정리를 마친 찰스 로슬러가 입을 연 뒤에야 깨졌다.

"정대표. 분명 자네의 논리는 듣기에 참 그럴듯하게 들리네. 하지만 자네도 알거라 믿네.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올라오는 모든 계획들은 다 그럴싸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는 걸."

21세기는 정보가 곧 돈이 되는 세상이다. 한 세기 전부터 거대 자본으로 불렸던 로슬러 가문이 정보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고 당연히 세계 전반 곳곳에는 로슬러 가문의 정보망이 존재했다. 미국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끼었다는 것쯤은 사실 정호준이 입 아프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문가들의 생각이 첨부되`어 있는 소식통들을 통해 소식을 매일 보고받는 찰스 로슬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보망을 통해 거품이 빠지기 직전 발생하는 삐걱거리는 징조를 파악하는 것쯤은 로슬러 가문 또한 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정확한 예측은 어디까지나 거품이 빠지기 직전에나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1년은 더 기다려야 터질 거품을 지금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고?'

거품이 빠지는 시점을 수년 전부터 미리 예견한다는 게 과연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일까? 찰스 로슬러는 거품이 언제 빠질지 그 시기를 정확하게 캐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확신이지. 확신은 얼마나 되나? 그리고 지금까지 한 말 책임질 수 있겠나?"

그렇기에 찰스 로슬러는 물었다.

확률은 얼마나 되고 지금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그렇기에 정호준은 또 한번 자신의 계획을 털어놔야만 했다.

"사실 저는 이번 사태를 이용해서 메릴리치 은행을 인수할 생각이었습니다."

JB로건체스트 은행의 영향력을 빼앗긴 지금 메릴리치는 찰스 로슬러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렇기에 정호준이 갑작스럽게 인수 계획을 밝히자 찰스 로슬러와 찰스 로슬러 주니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 했나?"

"작년에 월가 사람들에게 멍청이 취급을 받던 마이크 스팬서처럼 6~7월쯤 메릴리치에 신용부도스와프(CDS)를 체결하려 했습니다. 제가 계획 중인 미래를 위해서 은행이 하나쯤은 필요해서요."

마이크 스팬서. 2005년 초부터 미국 주택 시장의 큰 거품이 끼어 있음을 깨닫고 주목한 펀드매니저였다. 마이크 스팬서는 부실 규모가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고 얼마 안 있어서 시장이 붕괴될 것이라 예측해 상품까지 만들어 가며 하락에 베팅했다.

마이크 스팬서가 생각하기에 2005년에 터졌어도 터졌을 부실이었지만 부실이 터진 건 2005년이 아닌 2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

'경제라는 게 꼭 논리만으로 가는 게 아님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지.'

사람들의 광기, 그들만의 잔치를 이어 가고 싶었던 은행과 보험사들의 야합으로 시간이 끌리게 될 것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다달이 내는 상품 보험료만 모두 합쳐도 액수가 꽤 크리라.

적지 않은 상품 가입 요금을 매달 지불해야 했기에 정호준은 마이클 스팬서처럼 너무 이르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2006년 중순쯤 신용부도스와프를 체결해 쥐고 있다가 2007년, 혹은 상황을 지켜보며 2008년까지 쭉 갖고 있다 리만 브라더스가 몰락한 후 미연방정부 그리고 메릴리치 경영진과 딜을 하려 했다.

"자네 생각대로 됐다면 메릴리치는 자네 품에 들어갔겠군."

정호준은 찰스 로슬러의 체면을 생각해 부정하는 겸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예, 그랬을 거라 확신합니다."

메릴리치가 아리아 조부의 입김이 잔뜩 실려 있는 곳임을 몰랐다면 정말 그대로 진행했으리라. 그리고 이런 확신을 보여 줘야 정호준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조부님의 입김이 잔뜩 스며 있는 곳임을 알았으니 다른 물건을 골라 봐야죠."

"따로 생각해 놓은 곳이 있나?"

"메릴리치와 와코르비아 은행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했었습니다. 최선은 메릴리치였지만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선택해야죠."

와코르비아 은행은 메릴리치와 함께 미국 10대 은행 말석 언저리에서 경쟁하는 은행으로 서브 프라임 사태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2008년 월스&파고에 인수되었다.

'사실 여유가 되면 둘 다 노릴 생각이었는데.'

정호준은 CDS를 인질 삼아 미연방정부와 부채 감소 및 탕감 협상을 진행하고 두 은행을 모두 인수해 합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정호준의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면 2008년 후로는 4대 은행 체제로 흘러갔을 미국 은행 업계가 5대 은행으로 바뀌었으리라.

* * *

메릴리치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아도 본인이 예측한 서브 프라임 사태를 확신하고 최대한 이득을 보기 위해 움직일 거라는 정호준의 발언은 찰스 로슬러에게 믿음을 주게 되었다.

'녀석의 자산 규모는 약 100억 달러 정도 된다고 했었지? 위험을 감수하는 배팅인 만큼 자산이 부풀기는 하겠으나, 은행을 인수하려면 최소 자산의 절반은 투자해야 한다.'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된 계획을 아무리 가져와도 자신의 판단을 믿어 본인의 재산을 반절 이상 투자할 생각이란 투자계획을 밝히는 것만큼 큰 보증 수표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돈이 바로 내 돈이지 않던가?

그러나 믿음과는 별개로 찰스 로슬러는 찰튼 주니어에게 폭탄을 건네자는 정호준의 의견에는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호준이 골드만식스를 공격해 주겠다는 제안 또한 거절했다.

"골드만식스 같이 찰튼 주니어의 손에서 움직이는 은행을 공격해 준다는 말을 자네가 어떤 마음으로 했을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네. 하지만 그러지 말게. 본인이 스스로 미끄러진 거면 모를까 나서서 망치는 건 안 될 일이네."

'도대체 왜?'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시선에 의문이 가득한 것을 알아챘는지 정호준이 질문하지 않았음에도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일단 먼저 다시 한번 자네의 마음은 씀씀이에 감사를 표하지. 정말 고맙긴 하지만 로슬러 가문의 3대 당주로서 재단과 재단이 운용하는 자금에 흠집 낼 수는 없네. 흠집을 내려고 움직이는 걸 알면서 그냥 두고 볼 수도 없고."

찰스 로슬러의 말에 정호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정호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감지했고 약점을 찾았으면 물어뜯어야 맞는 거 아닌가? 일단 이기는 게 먼저잖아? 페어플레이, 정정당당을 지키다 다 빼앗기면 그게 뭐야. 제일 어리석은 짓 아닌가?'

그의 모국이었던 한국의 재벌들도 그랬고 옆 나라인 일본 재벌가도 그랬다. 회사가 몇 개가 망가지든 그룹의 중요 계열사가 얼마나 망가지든 일단 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하고자 했다. 후계 싸움에서 패배해 자리를 빼앗기는 것보다는 조금 망가지더라도 아니 많이 망가지더라도 일단 자리를 차지하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승계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얌전히 승복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몫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꿈틀대며 망가진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어차피 자신의 것이 되기 그른 기업이라는 이유다.

회사의 운명보다 제 이익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뻔히 보일 정도로 말이다.

1회 차 때 정호준이 보고 들은 재벌 가문은 거의 대부분이 한 차례 진흙탕을 굴렀다.

'LS 가문이 1등을 못 했음에도, 재벌임에도 그나마 이미지가 좋은 게 다 그래서지.'

가진 놈들이 더하다며 손가락질과 욕을 먹지 않는 유이한 가문이 바로 LS의 고씨 일가와 함씨 일가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재산에 초연한 걸까? 아냐 정말 초연했으면 전에 이사회가 찰튼 로슬러 주니어를 선택했을 때 얌전히 물러났겠지.'

정호준이 속으로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을 무렵 찰스 로슬러는 못 박는 듯한 뉘앙스로 따르라는 듯 말했다.

"찰튼 주니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공유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기회는 이때뿐이란 것처럼 모든 것을 걸고 공격할 생각도 없네."

'1안은 실패네. 그럼 혹시 몰라 준비한 두 번째 안으로 넘어가야겠다.'

"조부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폭탄을 사 줄 수 있는 대상은 다섯. 아니 정확히는 셋 정도 되겠군요."

리만 브라더스 사업부 중 부동산과 연관되지 않은 알짜배기 반절 이상을 다른 금융사의 서브 프라임 연관 사업부와 교환해 만들 거대한 폭탄을 매입할 수 있을 자금력을 가진 집단은 세계에 몇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위스와 같은 서구자본, 그리고 미국 상류층의 한 축인 유대자본, 동남아 전반에 걸쳐 형성된 화교자본, GDP 2위를 기록 중인 일본계 자금, 그리고 무섭게 성장세를 이어 가는 중국 때문에 몸집을 불린 중국자본. 이렇게 총 6곳이었다.

다만 아무리 흑막처럼 세계 경제를 주물러 온 로슬러 가문이라도 한 세기 전부터 미국과 깊은 연관을 맺어 온 서구자본이나 미국 상류층 한 축인 유대자본과 척지고 싶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이 두 집단을 보기에서 제외하면 자연스레 화교자본, 일본자본, 중국자본. 이렇게 셋만 남았다. 자신의 생각을 꿰고 있는 정호준의 발언에 찰스 로슬러는 정호준이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를 높였다.

"우리 손녀가 참 거물을 물고 왔군."

착하고 예쁘고, 능력도 있는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고 그 어떤 사내놈을 데려다 놔도 손녀딸이 아깝다고 여기던 찰스 로슬러와 딸이 아깝다고 생각해 온 찰스 로슬러 주니어였지만 정호준은 아리아가 부족하단 생각을 할 정도로 큰 사람이었다.

놓치지 않게 도장이라도 찍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 손녀는 언제 데려갈 건가?"

그래서 찰스 로슬러는 대뜸 혼인을 입에 담았다.

"아버지!"

"할아버지!!"

아직 딸을 시집보낼 준비가 안 됐는지 찰스 로슬러 주니어는 딸과 마찬가지로 찰스 로슬러에게 소리를 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