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00화 (1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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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의 잇따른 거절에 라디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히스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이예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얼굴 변화가 눈에 확연하게 드러났기에 정호준은 상황수습, 더 정확히는 그녀의 자존심을 살려 주기 위한 말을 횡설수설 내뱉었다.

"만약 이탈리아로 촬영을 떠나지 않았다면, 당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죠. 적어도 아리아가 제 맘속에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저 가정일 뿐이지만 정호준은 최대한 라디아 히스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본인의 매력이나 집안 때문이 아닌. 기회비용, 아니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로 유도했다.

그 말을 끝으로 라디아 히스트가 그녀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것을 배웅한 정호준은 자신의 집이 아닌 아리아 로슬러의 오피스텔을 향해 차를 몰아 이동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리아 로슬러는 계속 그에게 마음이 있음을 어필했고 정호준 본인이 밀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아리아 로슬러가 들어온 것을 알아챈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저번에 당신이 내려 주겠다던 커피, 오늘 맛보고 싶은데. 혹시 지금 가도 될까요?

결정하기까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지만 결정하고 나면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본인의 성향처럼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액셀을 강하게 밟으며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직설적으로 행동했다.

아리아 로슬러는 정호준이 보낸 문자가 깊은 관계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반영임을 알아챘다.

- 시간 괜찮으니까 와요. 운전 조심해요.

정호준의 문자에 아리아 로슬러는 짧게 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퇴역병의 복지를 위한 자선 파티가 열린 날 밤. 남녀 간에 생겨나는 역사가 쓰여졌다.

*****

남녀 간의 역사가 쓰여지긴 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정호준은 아리아 로슬러로부터 꽤 긴 비난과 추궁을 받아야 했다.

관계를 마친 침대 위에서 여운 때문에 상기된 얼굴로 호준에게 말했다.

"호준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아요?"

아예 한 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모를까 앞으로 나아간 이상 결국 져 주는 건 정호준의 몫이었다.

"미안해요."

정호준은 얼굴 가득 표정을 드러내며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하나 더. 지금껏 밀어내다가 왜 갑자기 관계를 진전시킬 마음이 생긴 거예요?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여자의 감은 무시할 게 못 된다는 말을 정호준은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말해 줄 수 없어요."

정호준은 또 한 번 사과를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 로슬러는 정호준을 추궁하는 대신 여우짓을 시전했다.

"호준이 곤란해하니까 더 묻지는 않을게요. 대신 호준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 해요."

정호준의 태도에 아리아 로슬러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척하면서 대가를 제시했다.

"부탁요? 무슨 부탁인데요?"

"조금만 더 있다 이야기할게요. 무리한 투자를 권하거나 하는 선 넘는 경제적인 요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아리아가 하고자 하는 부탁이 그녀의 조부와 부친을 만나는 건 줄 알았다면 정호준은 차라리 경제적인 요구를 하라고 했을 거다. 본인이 덜미 잡힌 것을 본인이 모르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지게 되었다.

*****

상속녀와 연애한다고 다른 연인과 다른 특이한 경험은 없었다. 다른 연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연애라는 행위를 통해 설레고 위로받으며 교감하는 시간이 이어 갔을 뿐.

- JHJ의 오너와 로슬러 가문의 상속녀 아리아가 사귄다는데?

두 사람의 연애는 시카고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를 넘어 미국 상류층에 빠르게 퍼졌다.

다만 행복한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언제나 금방 지나가는 법이다.

이 법칙만큼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 네 연인은 언제쯤 만날 수 있겠니?

누가 그랬던가?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들고 인내심이 늘어난다고.

그 말은 어디까지나 반만 맞는 말이었다.

필요하다면 기다리겠지만 기다릴 필요 없는 일, 혹은 당장 내일이 급한 상황에서 인내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조부인 찰스 로슬러와 부친인 찰스 주니어 로슬러의 재촉에 아리아 로슬러는 결국 정호준에게 자신의 상황을 모두 오픈할 수밖에 없었다.

"호준. 우리 부모님과 조부님을 만나 줄 수 있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아리아의 질문에 정호준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했다.

"우리 만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어요."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온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른 거 아니냐는 말을 내뱉었다. 그에 아리아는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냐며 약속을 꺼내 들었다.

그 때문에 정호준도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20년 가까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란 소문을 들은 적 있는데, 사실인가요?"

라디아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정보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준이 들은 그대로예요……."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로슬러 가문의 비사(祕史)가 아리아의 입에서 시작되었다.

*****

'크리테리온 오일(CRITERION OIL).'

크리테리온 오일은 미국을 넘어 세계 석유 시장까지 주무르는 힘을 가진 초거대 기업, 그리고 다국적기업이었었다. 지금은 정부에 의해 칼질 되어 갈가리 찢기고 존재했다는 기록만 남은 기업의 이름이지만 그 위명은 실로 대단했다.

'정말 대단한 기업이지.'

갈가리 찢겨 나간 파편들이 죽은 크리테이론 오일의 시체를 먹고 성장해 다시금 세계 석유 시장을 움직이는 중추가 됐을 정도다.

1890년 기준으로 크리테리온 오일은 미국 석유 시장 내에서 88%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한다. 한 기업이 한 산업에서 50%를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즉 독과점이 의심되는 상황인데.

미국이란 거대한 시장에서 산업에 가장 필요한 원료로 떠오른 석유를 민간기업이 88%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이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19세기 후반부터 로슬러 가문은 정치인들에게 줄곧 견제를 받았다. 정치인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로슬러 가문은 회사를 점점 키워 나갔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리테리온 오일의 위명은 20세기 초반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기업의 힘이 국가보다 강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백악관의 주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반트러스트법(반독점법)을 근거로 기업을 해체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십 년 정도만 더 시간을 주었다면 크리테리온 오일은 독점의 과실을 양분 삼아 정부가 손댈 수 없는 국가를 넘어서는 기업이 됐을 것이다.

어쨌건 1911년 5월 15일. 미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크리테리온 오일은 34개의 회사로 쪼개졌다

크리테리온 오일 해체는 자본주의의 최선두로 훗날 민주주의의 병기창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도 독점이란 이유로 기업을 찢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공산주의가 아니어도 정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힘이 강한지는 크리테리온 오일을 찢어 버린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행보가 증명해 주는 셈이지.'

미국 재계가 정치인들을 후원하며 인맥을 쌓고 혈연까지 맺는 이유였다.

다만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두는 나라다.

기업이 공공이익을 해치고 정부에 위협이 된다 해도 공산주의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아니 정당한 대가 없이 빼앗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해도 그러한 행보를 보이는 건 상류층 전반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독과점의 과실을 계속 이어 가며 얻게 될 과실은 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연방정부는 로슬러 가문에게 대가를 지급했다.

로슬러 가문에게 연방정부에 의해 쪼개진 34개 회사의 지분을 각각 25%씩 소유하게 해 준 것. 이러한 조치 덕분에 '너무한 거 아닌가?'와 같은 뒷말은 나와도 상류층과 완전히 척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웃긴 건 그다음부터예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로 분명 우리 가문의 영향력을 줄어든 건 맞지만, 우리 가문의 재산은 줄어든 영향력과 반비례해 배 이상 증식했죠."

미국의 반독점론자들과 미연방정부는 독점기업을 해체하면 소비자들에게 더 큰 이익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근거로 크리테리온 오일을 해체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크리테리온 오일이 해체된 후로 석유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산업의 집중화와 결합을 통해 원가를 절감하는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겪게 된 손해는 유가 상승만이 아니었다.

크리테리온 오일은 집 앞까지 석유를 배달하는 서비스를 실시했었다. 이 또한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한 서비스였다. 크리테리온 오일이 해체된 후 생겨난 34개 회사들이 이 서비스를 이어 갈 이유가 없었다.

석유 배달은 요금을 크게 지불하지 않는 이상 꿈도 꿀 수 없는 서비스가 되었다.

"그들은 몰랐던 거죠. 우리가 사세를 확장하고 점유율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고 있었다는 걸."

창업주들은 회사의 성장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상황을 종종 감내해 낸다. 내 회사였으니까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 본인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가 성장하면 종국에는 이득으로 돌아온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이익을 회사에 투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어쩌면 그 주주들이야말로 21세기 미국 금융권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인간들이라 할 수 있겠네.'

아리아 로슬러의 설명을 들은 정호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감수할 손해는 감수하고 사세 확장을 위해 이익을 투자로 전환한 로슬러 가문과 달리 크리테리온 오일의 해체로 생겨난 34개 회사의 주주들은 손해를 보는 것을 감수하지도 이익을 투자로 전환하는 정도도 줄였다.

34개 회사의 주주들은 이익을 투자로 전환하기보다는 배당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산업의 발전이 계속 이어져 석유 수요는 늘어만 났고 34개 회사들의 이익도 늘어만 갔다. 기름값이 오르는 것과 별개로 34개 회사의 주가는 큰 폭으로 올랐다.

배당금도 심심치 않게 지급됐고 말이다.

경영하는 회사를 강제로 해체당해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별다른 경제 활동을 이어 가지 못한 로슬러 가문의 재산이 2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석유 회사들이 얼마나 큰 성장을 이어 갔는지, 주주들이 배당금으로 재산을 얼마나 불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행히도 시어도어의 뒤를 이은 태프트는 시어도어만큼 강경하지 않아, 우리 가문은 다시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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