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99화 (9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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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오리하가 정호준으로부터 제안 받아 계획한 자선 파티는 큰 잡음 없이 끝이 났다.

'보통 이런 경우 한 번쯤 시비가 걸려오곤 하던데, 나는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사건사고가 없네?'

영화나 드라마 소설 같은 데서 보면 꼭 이렇게 아름다운 상속녀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비를 걸어오는 무리가 있던데, 파티 시작부터 파티가 끝날 때까지 정호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는 없었다.

'시비가 걸려올 수 있다고 염두에 두고 있는 내가 생각이 많은 건가?'

인정하기 싫지만 미국에서 황인종이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건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긴 그렇지만 은연중 상식 같은 거다. 그런 황인종이 상속녀를 둘씩이나 데리고 있는 광경은 영화나 드라마에 연출되는 상황보다 눈꼴이 셔도 몇 배는 더 시렸을 텐데.

그런데도 정호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이는 전무했다.

'거물급들이 모인 자리여서일까? 아니면 내 곁에 머무는 두 사람의 뒷배경이 너무 커서 그런걸까?'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이 정답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귀찮은 일이 없으면 좋은 거지.'

파티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귀찮은 일. 정확히는 정호준에게 부담스러운 일은 파티가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

남자라고 다 둔할 리 없고 여자라고 둔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남자는 둔하고 여자는 감이 좋다라는 사고방식이 세간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평균치를 내서 보면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은가?'

물론 이 모든 판단의 전제에는 상식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전제가 깔린 상태에서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라디아 히스트는 해리스 헬튼처럼 파티를 즐기고 끊임없이 남들의 시선을 갈구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다. 타고난 아름다운 외모를 뽐내는 모델업에 종사하는 만큼 관심에 아예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개인적인 시간만큼은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기질을 가진 여성이었다.

하지만 내성적이란 말이 둔감하단 말은 아니다.

라디아 히스트는 남녀 간에 흐르는 기류를 읽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 않았다.

'촬영을 취소하고 남았어야 했어.'

1개월 반 전에 만났을 때 정호준과 아리아 록펠러 관계와 지금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얼핏 봐도 느껴질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서로 이름을 부르네.'

미국은 일본만큼 성과 이름을 부르는 것에 따라 친분을 구별하는 게 극명하게 갈리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름을 텄다는 건 그래도 서로 간에 좀 더 친근해졌다는 의미는 있다. 자유의 나라라 불리는 미국이지만 변화가 느린 상류층에 한해서는 아직 그런 경향이 남아 있는 편이다.

둘사이의 분위기 진전도 진전이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최고 상류층이라 봐도 무방할 록펠러 가문의 영애가 성 대신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했다는 것, 정호준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 등을 보면 그만큼 둘 사이 관계가 진전됐다는 걸 의미했다.

라디아 히스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

첫 번째 선택지는 그냥 이대로 조용히 포기하고 친우인 아리아 록펠러와 정호준의 관계를 응원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본 채로 물러나고 싶지 않아.'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게 자기주도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주도적인 성향은 '성격'보다는 '당사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 왔냐.'로 결정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자본, 외모, 학력, 집안, 교육.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 중 무엇 하나 부침 없이 충만하게 가진 라디아 히스트는 학창 시절 내내 아니 성인이 돼서도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아왔다. 본인의 성향이 내성적이더라도 쭉 화려하고 떠받드는 인생을 살아온 그녀가 자기주도적이지 못할 리 없었다.

가지기 싫어서 안 가진 건 있어도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진 건 없던 그녀의 자존심에 이대로 액션 한 번 못 해보고 순순히 물러나는 건 여러모로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는 일이었다.

"정, 미안하지만 나도 집에 좀 데려다줄래요?"

그렇기에 정호준, 아리아 록펠러의 중간에 달라붙어 술을 마셔서 운전하기 곤란하다며 본인도 집까지 데려다줄 것을 요청했다. 라디아 히시트는 술 마시면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실제로 살짝 취기 오른 모습을 한 채 서 있었기에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호준과 아리아 록펠러, 라디아 히스트의 숙소는 모두 비슷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저 아리아의 숙소가 가장 가까웠고 라디아 히스트의 숙소가 가장 멀었을 뿐.

아리아 록펠러를 내려주고 라디아 히스트의 오피스텔 앞까지 가 그녀를 내려주었을 때 라디아 히스트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 정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정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어요."

난감함이 정호준을 급습했다.

*****

라디아 히스트의 고백을 들었을 때 정호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다름 아닌 아리아 록펠러의 얼굴이었다.

자주 보면 관계가 깊어질 거라 생각하고 노력했던 아리아 록펠러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고백을 받자마자 아리아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내가 아리아에게 마음이 있나 보네.'

마음속에 들어왔으면서 1회차까지 합산한 나이보다 십수 년 어렸기에 어리다는 이유로 지금껏 외면했던 모양이다.

짧은 찰나였지만 정호준의 머릿속, 정호준의 뇌는 끊임없이 사고했다. 생각 보다 아리아 록펠러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최대한 라디아 히스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숙고의 숙고를 거듭한 정호준은 이내 결론을 냈다.

'이런 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경우는 없다.'

어떻게 돌려 말해도 상처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낫다. 정호준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민자에 불과한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혹시 그 사람이 아리아인가요?"

어떻게 보면 뻔한 거였다.

"설마, 다 알면서도 저한테 마음이 있다고 말한 건가요?"

"고백 한 번 못해 보고 아리아에게 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아리아 록펠러와 십수 년 친구로 지냈지만 그녀들의 우정은 단단하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겹치는 게 없어 싸울 이유가 없으니 필요에 의해 친분을 이어갔을 뿐이다.

남녀 관계와 사업에 영원한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똑같이 한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상 지금부터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만 나뉠 뿐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라디아는 정호준이 아리아와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 힘든 이유를 나열했다.

"록펠러 가문에서 과연 정과 아리아의 만남을 허락할까요? 백인, 그것도 항상 미국 재계 순위 30위 안에 들어가는 재벌 가문이나 정치 명문가와의 자제와만 혼례를 이어온 게 록펠러 가문이에요."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정치, 경제할 것 없이 모두 백인 가문 소유에 존재한 게 미국 사회다. 인종에 큰 편견을 가지진 않았다지만 결혼 상대가 백인으로 정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람 사는 곳 정말 똑같구나.'

라디아의 설명을 들으며 정호준은 문뜩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70년도 중반부터 쭉 재벌가끼리 혹은 법조인, 정치인의 자제와 정략결혼을 벌여왔잖은가.

전쟁 때문에 찢어지게 가난해 파이가 전무했던 때야 정치인들과 맺어지는 것 외에는 정략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파이가 생긴 군사독재 이후부터 3~40년간 가문(기업)의 이득을 위해 정략결혼을 벌여왔다.

미국 재계는 그저 훨씬 더 오래전부터 정략을 이어왔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히스트 가문이라고 뭐가 다를까요? 재벌가나 정치 명문가가 가문의 위세를 이어가기 위해 정략을 택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요?"

"가문의 당주가 남성 위주로 결정되고 록펠러 재단 이사장 자리를 계승 받는 록펠러와 우리 히스트 가문은 달라요. 돌아가신 증조부와 조부께서도 배우자를 많이 바꾸시기도 했고 우리 집안 사람 중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많아, 록펠러 가문처럼 당주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을 하지는 않거든요."

자기 가문의 추태까지 알려주는 라디아 히스트의 발언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정보들이 자꾸만 라디아 히스트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만! 그만요. 제가 들어서 좋을 것 없는 말들이에요."

정호준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라디아 히스트의 입을 멈춰 세웠다.

록펠러도 그렇고 히스트도 그렇고 둘 다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인 가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덜 부담스럽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금방 나온다.

'히스트 가문이지.'

그녀의 말마따나 히스트 가문이 록펠러 가문보다 덜 부담스러웠다.

히스트 가문이 경영하는 히스트 코퍼레이션은 20세기부터 줄곧 미국에서 신문왕 혹은 언론 황제라 불렸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그 위명을 줄곧 이어가며 2016년 포브스가 조사한 미국 재벌 가문의 부 순위 발표에서 9위에 랭크된 만큼 결코 가볍게 여길만한 가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록펠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보다는 훨씬 덜했다.

1회차 때 라디아 히스트가 자기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많은 헐리우드 배우와 결혼했던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히스트 가문이 록펠러 가문보다 덜하리라.

누군가 정호준에게 록펠러 가문이 운영하는 록펠러 재단은 포브스가 매긴 순위에서 23위에 랭크되어 있는데 히스트 가문을 더 어렵게 여겨야 맞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정호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리라.

"포브스 순위를 그대로 믿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말이다.

포브스 순위는 어디까지나 적당히 참고만 하는 게 좋았다.

그만하라는 정호준의 말에도 라디아 히스트는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본인 가문의 치부가 아닌 록펠러 가문의 속사정이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리아의 조부 찰스 록펠러와 아리아의 삼촌인 찰튼 주니어 록펠러가 20년 넘게 록펠러 재단의 이사장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아나요? 만약 찰튼 록펠러가 그 싸움에서 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의 사업에 먹구름이 낄 거예요."

그녀가 정호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라디아 히스트의 고백을 받아 히스트 가문과 결합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하지만 말이다.

'마음에 들어오기까지가 어렵지, 내 마음에 들어온 걸 인정하니까 포기하기가 싫네.'

이성은 이대로 히스트 가문과 결합하는 게 좋다고 말하지만 감성(정)은 달랐다. 사랑과 같은 감정은 이성보다는 감성(정)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정호준도 그랬다.

"미안해요. 그런 이유로 마음을 바꾸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헤쳐나가는 데까지 헤쳐나가 볼래요."

정호준은 다시 한번 히스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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