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98화 (98/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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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발언권이 큰 가정을 보고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가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집안이 많은 건 주로 동양, 아시아 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에 위차한 사람들은 동양이 가부장적인 게 부모에 대한 효를 중시하고 부친을 공경하는 유교 문화권에 오래 노출되어 있어서라고들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한 가정이 일반적인 건 아시아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이 동양보다 인권이 좀 더 빨리 발달했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서구권에서도 20세기 초반, 정확히는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부장적인 성향이 사회에 만연했었다.

'여성이 가정에 머무는 게 아닌 일터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여성 인권이 시작된 거지.'

세계 대전(World war)이라 불리는 전쟁 때문에 남성들이 전쟁터에 끌려가 공장과 같이 노동자가 필요한 곳에 일할 노동자가 없게 되자 여성들을 데려다 노동자로 써먹었다.

여성들이 일터에 나와 일을 시작하면서 여성들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 여성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라!

참정권과 같은 권리를 하나둘 요구하기 시작했다. 남성처럼 똑같이 일하고 세금도 내는데, 정치에 참여하지 못 하게 할 이유가 있냐며 말이다.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도 당장 공장은 돌려야 하는데 파업까지 불사하며 권리를 달라 외치는 여성들 요청에 각국 정부들은 요청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협상이 잘된 곳 국가들은 점진적인 변화를 약속하며 여성들을 달랬고 협상을 수월하게 끝내지 못한 나라들은 급격한 변화가 시작됐다.

어쨌든 결론은 여성에게 경제력이 생겼기에 발언권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어디나 그렇지. 경제력이 있어야 발언권이 생기는 건.'

간단한 논리였다. 현재 21세기도 마찬가지지 않던가?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동기와 몇 년째 공무원 시험 준비를 이어가는 동기. 둘 중 누구의 말에 힘과 관심이 쏠릴지는 불 보듯 뻔한 거 아니겠는가?

세상의 이치가 그랬다. 그리고 기득권이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가 느리다는 것 또한 경제력이 곧 발언권을 키워준다는 이치와 같은 당연한 이치였다.

여성의 인권이 정말 많이 올라온 미국이지만 미국 재계의 경우 아직도 가부장적인 성향이 짙게 이어지는 중이었고, 록펠러 가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문의 주인인 조부 찰스 록펠러의 말은 그 어떤 사안보다도 우선시해야 했다.

그렇기에 아리아 록펠러는 곤란하단 감정을 품었다.

'아직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것도 아닌데, 호준을 데려오라니.'

부친도 정호준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조부인 찰스 록펠러 또한 정호준을 만나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대체 이 말을 어떻게 호준한테 꺼내?'

동서양을 떠나 가족과 안면을 트는 건 보통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을 때나 할 법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보통 때의 성인 남녀보다 관계 진전이 느린 편인데. 부친과 조부가 본인을 보길 원한다고 말하면 이제 조금 진전된 관계가 와르르 무너지리라.

'부담스러워서 좁힌 거리보다 더 멀리 도망갈 거 같은데?'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사심 가득한 사람들을 주변에 두면서 살아온 덕분에 기른 안목과 처세술이 정호준이 멀어지려 할 거란 결론을 냈다.

그녀가 낸 결론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 말씀드리자.'

그런 말은 관계가 깊어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

레이싱카에 탓다고 여길 정도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제 1월을 맞아 오리하가 자선 행사를 연 거 같은데 벌써 2월이 찾아왔고 퇴역병 처우 개선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자선 파티 날이 됐으니까.

이번에 열리는 자선 파티는 저번 행사처럼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게 아닌 정호준이 뉴욕에서 처음 경험했던 파티 같은 사교 파티였다.

일라노이주의 연방 상원의원인 릭 오리하가 각 잡고 여는 자선 파티인 만큼 파티에는 거물들이 다수 초대되었다. 일라노이주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오너 가문은 물론이고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금융회사 CEO들, 로펌 대표 등. 일라노이주를 넘어 주변 주까지 민주당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모두 초대받았다.

'여자들 꾸미는 건 정말 하루 종일 걸리네.'

파트너로 함께 가달라고 부탁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아리아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오피스텔 앞까지 차를 끌고 가야만 했다.

"메이크업이 덜 끝나서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시간약속 어겨서 정말 미안해요."

"아뇨,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정호준은 메이크업이 조금 늦어졌다며 기다려달라는 말에 15분 정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쓸데없이 시간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알게모르게 신경질이 좀 난 상태였으나 한껏 꾸민 상태로 나와 사과하는 아리아 록펠러를 발견하게 된 뒤로 신경질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와, 정말 예쁘네.'

서양 여성 특유의 이목구비에서 오는 매력도 매력이지만 청순 단아하면서도 섹시함이 함께 공존하는 외모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쁘네."

자기도 모르게 뒷말을 작게나마 입 밖으로 낸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뭐라고요?"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말했고 워낙 작게 말한 터라 못들을 법도 했지만 아리아 록펠러의 귀는 밝았다.

"오늘 정말 예쁘다고 말했어요."

"호준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이거, 열심히 꾸민 보람이 있는데요."

환한 미소를 짓는 아리아 록펠러의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일단 차에 타요. 드레스 차림이니까 뒤에 탈래요?"

잘 꾸민 드레스에 주름지거나 하지 않게 뒷 자석을 권했으나 아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앞에 탈 거예요."

철컥!

아리아의 단언에 정호준은 알겠다는 듯 조수석 차 문을 열어주었다. 드레스 뒷단을 잡아주는 센스까지는 발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했다.

'계속 호준을 찾아가길 잘했네.'

미운 정이 무섭고 싸우다 정든다는 한국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얼굴을 계속 마주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정이 쌓이기 마련. 그 사실을 잘 아는 아리아 록펠러는 3주 동안 주말마다 정호준을 찾았다.

그렇게 친밀감을 쌓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정호준이 동년배의 남자들이나 할 법한 반응을 보였다.

*****

자선 파티는 시카고에 위치한 5성 호텔인 더 랭튼 호텔에서 열렸다.

정호준이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파티를 열었을 때처럼 릭 오리하는 그의 부인인 미쉘 오리하와 함께 입구에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했다.

"옷이 날개라더니 오늘 정말 멋지군."

"정말 아름다워요. 오늘 남자들 시선이 집중되겠는데요?"

릭 오리하는 정호준을 미쉘 오리하는 아리아를 칭찬하며 띄워주었다.

"저희가 늦은 건 아니죠?"

"물론이네. 시작시간은 아직 10분이나 남았잖나?"

"미리 왔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뭘 그렇게까지. 늦은 것도 아니고 10분이나 일찍 왔음 됐지."

릭 오리하는 정호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뒤에 또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정호준은 이쯤 하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정호준이 릭 오리하와 이야기를 끝내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아리아 록펠러가 정호준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

"원래 파트너가 이렇게 리드해 주는 거예요."

정호준의 놀란 시선에 당연하다는 듯 대꾸해 따로 태클을 걸 곳이 마땅치 않아 그대로 그녀를 에스코트한 채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정호준은 사방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부담스럽네.'

아리아 록펠러는 미국 사교계 유명 인사였기에 아리아의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정호준에게 향하는 시선 중에는 적의가 담긴 시선도 다수 존재했다.

"오랜만이에요 정. 잘 지냈죠?"

아리아 록펠러만큼이나 미녀 상속녀로 유명한 라디아 히스트가 천천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저야 뭐 특별할 게 있나요. 히스트야 말로 촬영 잘 마쳤어요?"

"네, 저번 주에 일정 끝났네요. 잘 마무리 지었어요."

"좋은 결과 있길 바래요."

"고마워요."

정호준과 짧은 대화를 마친 히스트는 아리아 록펠러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아리아도 오랜만이야."

"저번 주에 촬영 끝났는데 너무 일찍 들어온 거 아냐? 이탈리아까지 갔는데 기왕 간 김에 관광도 좀 하고 오지 그랬어?"

"관광은 무슨. 촬영 끝나면 바로 귀국하는 거 다 알면서."

"그랬었나?"

남자는 알아듣기 어려운 여자어로 웃으며 말하는 둘을 보니 뭔가 섬뜩했다.

'끼어들지 말자. 끼어들어 봐야 괜히 내 머리만 아프지.'

두 상속녀 모두 취향 자체가 논외로 빠질 만큼 미모가 출중했고, 사교계에서의 입지 또한 막중했기에 파티에 참석한 이들 중 젊은 축에 속하는 유능한 트레이더들과 파트너 변호사들은 자꾸만 정호준과 두 상속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

정호준은 아리아와 팔짱 낀 채로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받았다. 인맥 관리는 사업의 기본이라는 듯 아리아는 정치인에 한해서긴 하지만 어느 지역, 어느 당에 소속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물론 반대로 다가온 사람들에게 그를 대신해서 정호준을 소개해주기도 했고 말이다.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아서인지 확실히 편했다.

그렇게 아리아 록펠러로부터 소개를 받고 받으며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작업을 이어갔다.

"자선 파티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파티는 어느새 피날레를 향해 달려갔다.

인사말을 끝으로 릭 오리하는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한 3인을 한 명 한 명 호명했다.

- 여러분의 자비심이 미국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 아리아 록펠러 500만 달러.

릭 오리하가 호명하는 명단에 아리아 록펠러도 들어가 있었고 릭 오리하의 호명을 들은 정호준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리아, 너무 크게 기부한 거 아니에요?"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 20억 달러가 넘어 500만 달러는 그녀의 재산에 채 1%도 안 되는 돈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500만 달러는 적은 돈은 아니었다.

- JHJ Capital, 1천만 달러.

자선 파티에 덥석 1천만 달러 공수표를 건넨 정호준을 보며 아리아 록펠러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민이 많아서 그렇지 결정하고 나면 참 화끈하다니까.'라고.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인데요 뭐. 그리고, 호준만 하겠어요?"

너만 하겠냐며 되받아치는 아리아 록펠러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정호준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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