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97화 (9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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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은 아리아가 록펠러 재단 명의로 구매한 시카고의 오피스텔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아리아 록펠러는 정호준이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기 위해 운전하는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릭 오리하가 어디까지 갈 것 같냐는 물음을 던졌으나 정호준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 잠깐 올라와서 차 한잔하고 갈래요?

'라면 먹고 갈래요?'의 서양 버전 같은 발언에 정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 하루에 커피 3잔 이상 안 마셔서요. 아리아의 커피를 마실 기회는 다음번으로 미루도록 할게요.

점심에 한잔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릭 오리하와 한잔 마셨음을 언급하며 빠져나가는 정호준의 말에 아리아 록펠러는 말했다.

- 호준은 참 어렵네요. 사실 내가 더 어렵게 보여야 맞는 거 아닌가요?

서양이 동양(아시아권)과 비교해 오픈 마인드 성향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누가 더 빼는 게 맞냐 물으면 아무래도 여성이 빼는 게 통념상 맞다는 편견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칠 힘이 충분한 록펠러 가문의 상속녀다.

신분 같은 것을 따질 생각은 없지만 사실 행동거지는 자신이 더 조심하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데 다가간 만큼 멀어지려 하는 정호준의 태도가 이제는 좀 거슬렸다.

'호준은 내가 못나게 보이나? 동양인이라 취향이 다른 건가?'

그렇기에 아리아 록펠러는 그 부분을 지적했다.

- 미안해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 성적으로 개방적인 미국의 문화가 익숙치 않아요. 아리아가 이해 좀 해줘요.

여자는 모두 여우였고 자신이 예쁜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특히 그 정도(내숭이)가 심했다. 정말 기분이 상한 건지 그런 척 연기하는 건지 정호준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일단 사과했다.

그녀의 발언과 저 표정이 연기던 연기가 아니든 간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까. 무엇을 해도 상대의 기분이 나빠질 것 같으면 사과하고 져 주는 게 맞는 판단이었다.

사과와 함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 릭 오리하가 퇴역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기부금 모집하는 자선 파티에 이번처럼 같이 가주지 않을래요?

- 몰라요. 시간 되면요.

자기가 삐졌음을 어필하기 위해 새침한 모습을 보이는 아리아 록펠러의 반응에 정호준은 그저 난감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

아리아 록펠러는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 탑승해 주차장을 나서는 정호준의 차량을 지켜봤다.

'착한 사람이야.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고.'

자신이 정말 기분이 상한 게 아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대충이나마 알아챈 듯 보였는데 그럼에도 정호준은 내숭을 지적하기보단 그냥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사실 사과할 때 조금 느끼한 말을 해주는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저 정호준이란 남자가 원체 그런 쪽과는 인연이 없었기에 그러려니 했을 뿐.

'여느 때의 남자들처럼 허리 아래가 생각이 없는 것 같지도 않고.'

숫기 없는 게 이 여자 저 여자 찔러보는 것보다 낫다. 이 여자 저 여자 어디서 사생아를 데려오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물론 고요한 사람과 잔잔한 물을 조심하랬다고(Beware silent man and still water). 어디서 사고 칠지 모르긴 하지만. 생각이 많고 경계심이 많으며 계산적인 사람이니까 알아서 조심하겠지.'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부분을 고려하며 고민하고 계산적으로 활동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리아 록펠러는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많은 거랑 과감하지 못한 거랑 다르다는 걸 호준이 보여줬으니까.'

정호준이 지금껏 이어온 행보를 보면 생각이 많긴 하지만 또 과감하지 못한 건 아니다. 과감하지 못한 사람은 기회를 잡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부분을 고려하고 또 고려하지만 한 번 머릿속에서 결론을 낸 뒤에는 과감하게 움직이는 경향을 보였으니까.

'성격 좋아, 여자 관계 깨끗해 능력과 자산도 충분해. 호준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사람이야.'

지금껏 정호준과 만남을 이어가며 내린 결론이다.

그렇기에 먼저 다가가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아쉬운 소리도 하며 감정을 드러낸 거다.

'라디아, 미안하지만 난 네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

정호준과 자선행사에 참석하는 것 대신 일을 선택한 친우 라디아 히스트의 선택을 틀렸다고 폄하할 생각은 없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폄하하겠는가?

다만 정호준과 단둘이 만남을 이어갈 시간을 준 동안 그냥 무난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타인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포착하는 것,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

록펠러 가문에서 태어나 제왕학을 시작으로 여러 고급 교육을 받으면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릭 오리하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민주당 출신 하원 의원들을 움직여 법안이 제정을 위해 힘썼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고 정호준에게 연락해 퇴역병의 복지를 위해 기부하는 것을 철회하면 안 된다며 단단히 약속을 받아냈다.

'되게 급했나 보네.'

정호준의 생각이 바뀔까 두려웠는지 자선 파티는 정호준이 아리아 록펠러와 자선행사를 다녀온 때로부터 채 3주가 되기 전에 열린다는 정보가 적힌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 초대장을 정호준에게 전달해준 당사자 릴리 자넷은 정호준의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조용히 정호준을 바라봤다.

-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정호준은 자넷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 그.. 호준이 록펠러 가문의 상속녀와 만남이 잦다던데, 사실인가 해서요.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 아직 깊은 관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사람 같더라고요. 종종 만나고 있어요.

- 축하해요 정. 같은 여자가 봐도 예쁜 은주가 관심을 표해도 모른 척 밀어내길래, 누구랑 연애 할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호기심을 푸네요.

- 아직 깊은 관계 아니라니까요.

- 아직이라는 단어는 추후 언제라도 그럴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단어 하나까지 증거삼아 들이미는 자넷의 추궁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연애는 뭐 나 혼자 하나요?

- 호준이 어디가 뭐 어때서요. 성격 좋지, 능력 좋지, 돈 많지. 자신감을 가져요. 호준 정도면 록펠러 상속녀한테도 꿀리지 않아요.

정호준의 재산 형성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자넷이다. 정호준의 자산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이른바 '네가 꿀릴 거 없다'를 시전했다.

- 그 와중에 외모가 잘났다는 칭찬은 없네요?

- 정의 외모가 못난 건 아니지만, 록펠러의 상속녀쯤 되는 사람이 한눈에 반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죠. 그 위치에 있으면서 잘난 외모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요.

- 빈말로라도 해줄 수 있잖아요?

- 난 법조인이예요. 정이랑 더 알고 지냈다고 해도 없는 말,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죠.

곧 죽어도 옳은 말만 하겠다는 자넷을 말에 정호준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말로 먹고사는 변호사라 그런지 도저히 말로는 못 이기겠다. '그래 너 잘났다.'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꾹 삼켰다.

말해 봐야 능청스럽게 인정할 자넷의 행동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

정계나 법조계가 아닌 미국의 재벌 가문의 경우 유대계와 백인계 딱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인권을 시작으로 흑인들의 권리가 성장한 탓에 개인에 한해서는 큰 부를 이룩해낸 흑인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그래봐야 그들이 가진 부는 기껏해야 개인이 이룩한 부에서 그칠 뿐이었다.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며 미디어에 자주 노출된 이들이나 성공한 4대 리그 스포츠 선수들은 큰 부를 이룩해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지만 그래봐야 일개 개인에 불과했다.

그들의 성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개인이 수천 억원을 번 건 분명 질시에 대상이 되기 충분하고 찬사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저 그들이 터전이 미국이고 비교 대상이 미국 재계의 상류층, 백인과 유대계라는 게 문제일 뿐.

2009년 미국 흑인 부자 서열 2위로 꼽힌 남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드의 재산이 6억 달러 정도 될 거라고 보도되었는데 미국에 적을 둔 유대 가문 상속자들이나 백인 재벌 가문 상속자들은 이미 수십억 달러를 상속 받곤 했다.

막대한 부를 쌓고 미국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 가문과 백인 가문들은 또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순혈을 중시하며 그들만의 바운더리를 중시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말이다.

잡스와 게이츠 같은 신흥 IT재벌들은 순수혈통을 유지하는 것과 가문의 결합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고 이민자 출신과 결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오랜 전통을 유지하는 가문들은 주로 그들끼리 만나 결혼을 하곤 했다.

- 아가씨께서 남자를 만나고 계십니다.

아리아 록펠러의 가문인 록펠러 또한 미국의 유서 깊은 가문으로 백인 혈통을 이어왔으나 백인 혈통을 중시해서 이어온 건 아니었다. 그저 급에 맞는 가문이 전부 백인이었기에 쭉 백인 배우자를 맞아왔을 뿐.

경호팀장의 보고에 찰스 록펠러 주니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자네가 알고 있다는 건 아버지도 알고 있다는 말이군.

형재자매들이 일찍 죽어 당주가 된 그의 부친 찰스 록펠러가 아리아를 말리지 않았다는 건 딸이 만나는 남자가 쓸만한 녀석이란 걸 증명하는 거였다. 결혼하겠다고 찾아오면 또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장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걸 보면 딸이 만나는 녀석이 영 맹탕은 아니란 소리다.

- 그래, 누구지?

- JHJ Capital의 호준 정입니다.

- 이민자 출신인가 보군. JHJ? 호준 정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찰스 록펠러 주니어의 중얼거림에 경호팀 팀장 바니 고든은 정호준과 관련된 서류를 건네주며 말했다.

- 이번 카트리나 사태 때 1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해서 잠깐 언론을 탔었습니다.

바니 고든이 찰스 록펠러 주니어에게 건넨 서류에는 정호준의 가족관계를 시작으로 교우관계, 성향 분석, 자산 등이 모조리 적혀 있었다.

- 제법 유망한 친구구먼.

서류에는 정호준이 스포츠 도박을 통해 거금을 번 것을 시작으로 국제 유가 선물을 통해 큰 돈을 번 것, 그리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폴류스에 매각했다는 사실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아리아 록펠러의 조부이자 그의 부친인 찰스 록펠러가 그랬던 것처럼 정호준에게 합격점을 준 찰스 록펠러 주니어가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한번 만나보고 싶군,

아직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연애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건 둘째치고 정호준이 들었으면 기겁할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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