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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의 계좌에 있는 돈을 자신들의 주머니에 있는 것처럼. 표정조차 조심스럽게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말하는 오시마 진타로 일본 대사의 말에 정호준은 말문이 막혔다.
'미친놈들. 나한테 뭐 맡겨 놨나? 뭐 이렇게 당당해?'
일본 대사의 발언에 정호준은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경험하게 됐다. 어이가 없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장에라도 쌍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욕을 뱉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귀국의 금융사가 범한 실수를 놓치지 않았을 뿐입니다. 금융계 역사에 자기가 번 돈을 돌려준 역사가 있습니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지만 완전히 감정 정리가 되진 않아서인지 정호준의 말투는 조금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정호준의 말투와 표정이 변화했음을 캐치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인지했음에도 무시를 하는 건지, 오시마 진타로는 한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다.
"타인의 실수로 얻게 된 정당치 못한 돈이잖습니까? 얼마나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 돈 때문에 피눈물을 쏟아내게 될지, 정대표께서 모르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정호준이 회귀했을 초창기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흔들렸을 수도 있다. 그때는 돈의 마력에 홀리지 않은 순수한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금융이란 게 누군가 이득을 챙기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게 제로섬(zero-sum) 논리가 가득한 판이란 것을 깨달아버린 지 오래였다.
"도덕적으로, 도의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자꾸만 도리(道理)를 이야기하는 오시마 진타로의 발언에 정호준은 1회차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12월에 마가 꼈나 싶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12월에 팻 핑거 사태가 발생한다. 크리스마스, 연말이 다가와서 해이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2013년 12월 12일 대맥증권에 다니는 한 직원이 주문 입력을 실수하는 사태가 똑같이 벌어졌다.
옵션 가격의 변수인 이자율 계산을 '잔여일/365'로 계산해야 하는데, 담당자의 실수로 '잔여일/0'로 적었다. 담당자의 실수로 모든 상황에 이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프로그램이 막대한 양의 거래를 토해냈다.
실수를 한 당사자는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깨닫고 전원코드를 뽑았으나 고작 143초 동안 약 3만 7,900건의 거래가 이루어져 462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코스피 수치가 2000을 넘고 15분간 폭등과 폭락을 반복해 증권회사들은 상당한 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증권회사들도 정부의 권고에 대맥증권에 자신들이 얻은 이익을 돌려주긴 하지.'
정부의 권고에 한국 증권회사들은 이익금을 반환했다. 덕분에 대맥증권은 20억 정도를 돌려받았으나, 360억의 이득을 챙긴 'Kassia Capital'과 80억 정도의 이득을 챙긴 일본계 자금들은 대맥증권의 환원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직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본인들도 이익을 뱉지 않았으면서, 나한테만 뱉어내라? 2013년에 이익을 뱉지 않은 녀석들은 그럼 뭔데?'
"푸하하하."
오시마 진타로가 하는 행동이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 뭐가 다를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봤는데 너무 가관이라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정호준의 폭소에 오시마 진타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또한 자신의 말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란 것쯤은 아는 듯한 반응이었다.
"무례하십니다."
예의 없다며 지적하는 오시마 진타로 대사의 비난에 정호준은 웃음기를 순식간에 지우고 정색한 채로 말했다.
"무례하긴요. 무례한 건 그쪽입니다. 애초부터 실수를 안 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대체 뭘 믿고 나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돌려달라 소리를 하는 겁니까?"
공격성 가득한 정호준의 질문에 우시마 진타로는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돌려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부터 2020년이 되어서까지 일본은, 정확히는 일본의 정치인들과 일본의 상류층들은 한국을 일본 아래라고 생각해 왔다.
'그냥 우리의 지배에 순응했으면 나라가 반으로 나뉘지도 않았을 거 아냐? 미개한 조센징들.'
둘로 나뉜 대한민국을 보며 비웃기도 했다. 자기들에게 지배를 받았을 때가 행복했던 거라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며 말이다.
'주인 말을 안 듣던 녀석들이 주인에게 큰 선물을 준 셈 치면 되려나?'
전쟁에서 패배해 식민지를 모두 뱉어내고 빚더미에 앉았음에도 한국전쟁이 발발한 덕분에 기사회생해 그 뒤로도 쭉 승승장구했으니까.
1978년에 들어서는 소련(소비에트 연방)을 누르고 GDP 2위를 차지했고, 1978년부터 중국에 2위를 내주는 2010년까지 줄곧 GDP 순위 2위를 이어갔다. 중국에게 두 번째 자리를 빼앗긴 뒤에도 정호준이 죽기 직전인 2021년 말까지도 GDP 순위 3위를 유지한 국가다.
일본 정치인들은 본인들이 이룩해낸(?) 나라에 대한 자부심, 고집 등이 마음 속 깊게 뿌리박혀 있어 세상이 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친의 정치 기반을 이어받아 정치인이 된 자녀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경제 성장이 멈췄다,' '잃어버린 15년' 등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비판들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세계 2위 자리를 유치하고 있는 2005년이었기에 일본 대사 우시마 진타로 알아서 기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강약약강(强弱弱强).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집요할 정도로 독하고 강하게 나오며 괴롭히는 일본인의 성향을 드러낸 듯한 모습이었다.
"풋! 크크크."
한국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듯 협박하는 오시마 진타로의 발언에 정호준은 다시 한번 폭소했다. 정호준의 얼굴을 뚫어지라 노려보는 오시마 진타로의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기를 죽였다
"한국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네요. 추가로 운용할 투자금이 필요해서 한국에 왔을 뿐, 당신들이 한국에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난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니까요. 조금 전에 했던 그 말 미국 정부한테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 애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냉정하게 잘라내며 미국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정호준의 발언에 오시마 진타로 일본 대사는 발만 동동 굴렸다.
"제가 미국 5대 정보기관의 국장들과 꽤 진한 친분을 이어가는 중인데, 당신들이 협박했던 말 그대로 가서 전해줘도 되겠습니까?"
"정호준 회장님께서 이번에 벌어 들인 수익은 일본 국민들의 피와 땀이 서린 것들이라, 일본 국민들의 고통을 생각해 도의적인 책임을 고려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까지 깨무는 오시마 진타로는 결국 정호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을 사죄했다.
오시마 진타로에게 사과를 받는 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씁쓸하긴 하네.'
분명 이럴 의도를 갖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실제로 한국 국력이 미국의 국력과 비교해 월등하게 차이를 보이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씁쓸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일본 대사가 정호준을 방문한 사실과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지 않았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한국 정계와 재계에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예 접견 사실 자체를 듣지를 못했으면 모르되 의견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인간의 심리였다.
일본만큼 미국 정재계에 로비스트와 정보원들을 파견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또한 나름대로 정보통이 존재했기에 정보를 수소문했고 사건의 배경을 알게 되었다.
국정원에게 가장 빨리 정호준이 제트컴 사태에 개입해 큰돈을 벌었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노민현 대통령은 다시 한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돈 버는 재주가 이리 특출난 데 놓치다니. 국가적인 손실이네.'
펀드 모집을 마친지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1조를 벌었다. 2년 후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인지, 추측조차 못 할 지경이었다.
국정원이 아니어도 미국에 파견한 소식통을 통해 정호준이 조 단위의 돈을 벌어들였다는 사실이 언론사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다.
화제를 모을 게 확실한 정보에도 언론사들은 기사로 내보내기보단 정호준에게 먼저 허가를 구했다.
- 이번 제트컴 사태에 대표님께서 이득을 보신 것을 기사로 실어도 되겠습니까?
정호준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적대하려 한다면 그들에게 크나큰 손해를 안길 힘이 충분하다는 걸 이미 이런저런 정보를 통해 파악한 지 오래인 데서 비롯된 행보였다.
"그렇게 하시죠. 허락하겠습니다."
먼저 잘못한 탓에 자신의 이미지를 만다는 것을 도와주긴 했지만 적당히 주고받는 관계를 이어가는 게 정호준 본인에게도 좋았기에 정호준은 흔쾌히 허락했다.
[JHJ Capital 1조가 넘는 수익을 올리다!]
[대한민국에서 모집된 펀드 자금으로 1조 원의 수익을 올린 JHJ Capital.]
[정호준 대표는 어떻게 1조를 벌게 된 걸까?]
언론사는 정호준이 제트컴 사태에서 큰 이익을 챙겼음을 알리며 그 자금이 한국에서 결성된 펀드 자금이라 보도했다. 한국 사람치고 일본 정부에 좋은 감정을 픔은 사람은 드문 점을 노린 일종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사였다.
⌎ 일본 자금이 한국에 들어와서 분탕 친 일은 많아도, 한국 자금이 일본에 들어가서 큰 이익본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 누가 큰돈을 번 건지 궁금했는지, 얘가 끼어있네.
⌎ 얘는 정말 돈복을 타고난 듯.
⌎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펀드 마감하고 정호준이 일본을 주식 시장을 주시 중이라는 말 듣고 설마 했었디.
⌎ 도박하는 심정으로 정호준이 만든 펀드에 가입했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 됐네. 3년 후에 정말 내 돈이 2배로 돌아오겠는데?
⌎ re: 너 제가 만든 펀드에 돈 넣었음? 얼마나?
⌎ re: 한도까지 넣었지. 사실 빚내서라도 더 입금하고 싶었는데, 명의당 허용하는 게 얼마 안 되더라고.
⌎ re: 나도 정호준이 펀드 만든다고 했을 때 돈 넣었어야 했는데, 제길! 그때 펀드에 돈 안 넣은 나를 원망한다.
⌎ re: 나도 후회 중이다.
정호준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음에도 한국계라는 이유 만으로, 혹은 한국에서 설립했던 펀드 자금으로 일본 돈을 벌어 들였다는 이유로 통쾌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펀드 모집할 때 정호준을 신뢰하기 어려워 자금 투자를 하지 않았던 이들이 후회란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국 언론이 미국 기사를 베껴다가 인터넷에 업로드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미국 언론사들이 한국 기사를 퍼다 날랐다.
자금을 한국에서 끌어왔을지는 몰라도 돈을 번 주체는 미국 법인인 JHJ Capital이었기 때문.
한국도 미국도 적지 않게 시끄러운 밤이었다.
유일하게 비난적인 논조로 알리는 곳이 있다면 그건 일본 측 언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