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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술은 정호준이 떴지만 그 뒷일은 정호준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뜻을 모으는 게 어렵지 이해관계와 생각이 일치함을 인지한 쟁쟁한 금융사들이 이익 극대화를 위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움직임을 취했기 때문이다.
리만 브라더스, JP스탠리. CSF, USB와 같은 금융사들은 월가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리는 금융회사들에겐 정호준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명성도 명성이지만 넓고 다양한 분야에 퍼진 인맥은 정호준이 앞으로도 시간과 공을 들여 구성해 나가야 할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쌓은 인맥을 활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 운이 좋았을 뿐, 저희는 그저 여러분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뒤로 정호준은 한 발짝 뒤로 빠졌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다는 말을 뱉으며 말이다.
제이컴 사태라는 크나큰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인 12월 9일. 일본 증권가에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의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다.
무디스, S&P, 피치와 같은 세계 3대 신용평가 회사로 분류되는 거대한 회사들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찌라시였다.
금융회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일본 시장의 반응은 어떠한지 지켜보기 위해 조용히 방관 중이었던 정호준은 정말인지, 그냥 흘린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참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이런 움직임을 기대하고 뜻을 모은 거긴 한데, 정말 어메징하긴 하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칠 거라는 의도를 갖고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으나 세계 3대 신용평가 회사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거대했다. 과장 조금 보태 한 회사를 넘어 한 나라의 운명(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뭐 거의 금융업계의 저승사자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신용평가가 한 단계 낮아진다는 건 그만큼 신용평가가 낮아진 나라에 투자하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합리적인 논리가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단점, 부패, 부정이 없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치 않았기에 이유를 설명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논리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셈이니까.'
3대 신용평가 회사가 일본 증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현재 큰 사고가 터진 일본 주식시장에게 치명적인 추가타가 될 법한 소재였다.
정호준은 흥미를 갖고 증권사들과 일본의 대응을 주시했다.
*****
세간의 평가를 신경 쓰는 건 달리 한국인들만의 습성은 아니었다. 중국이건 일본이건 구분할 것 없이 동아시아 삼국은 세상의 평판에 신경을 많이 쓴다.
중국인의 경우 정부에 의해 관리된 세간의 시선을 생각하긴 하지만 뭐 어찌 됐던 간에 그랬다.
'패권국인 미국을 시작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주류가 백인들이 주를 이룬 서방이라 더 그렇지.'
2005년 세계의 GDP 순위는 1위 미국(12조 4,165억 달러), 2위 일본(4조 5,340억 달러), 3위 독일(2조 7,949억 달러), 4위 중국(2조 2,343억 달러), 5위 영국(2조 1,266억 달러), 6위 프랑스(2조 1,266억 달러), 7위 이탈리아(1조 7,625억 달러), 8위 스페인(1조 1,246억 달러), 9위 캐나다(1조 1,138억 달러), 마지막 10위가 인도(8,057억 달러)였다.
경제력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국가라곤 단 셋뿐이었다. 20위까지 범위를 확대해도 대부분은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신대륙 국가들이 그 순위 안에 들어가 있다.
'러시아나 호주 같은 나라들은 사실 아시아로 보기도, 그렇다고 유럽이라 보기도 애매하지.'
러시아는 평소에는 유럽이라고 분류하다가 지들한테 유리할 때만 아시아권이라며 살며시 엉겨 붙는 나라로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였고 호주 또한 영미권 국가인 것을 고려하면 서방으로 분류되는 게 맞을 거다.
20개의 나라 중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대만. 이 다섯 나라를 제외한 남은 국가들이 전부 유럽 국가거나 유럽의 영향을 깊게 받은 유럽의 색체가 군데군데 묻어 있는 나라들이다. 2005년 현재도 그렇고 정호준이 죽기 직전이 2020년대에도 그렇고 세상의 주역은 서방세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일본만 봐도 식민지 경영을 일삼던 제국주의 시대(19세기, 20세기)때 탈아입구(탈아입구)를 외치며 자신들을 아시아에 분류하기보단 서양에 묶여 분류되길 바랬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전쟁에서 패망해 식민지를 모두 뱉어내고 주저앉았다가 한국전쟁으로 다시금 경제력을 회복해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2010년쯤 중국에 빼앗기기 전까지 줄곧 GDP 순위 2위를 벗어나지 않은 일본의, 정확히는 일본 정부의 자존심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국제 신용평가의 하락은 그 자존심에 큰 스크레치를 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 입을 경제적 피해도 피해지만 일본 정치인들은 체면을 더 생각하지 않을까?'
사진핑과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의 자존심(체면)을 우선시하듯 일본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공산주의 진영에 있고 민주주의 진영에 있는 차이만 있을 뿐.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정부는 일본이 사태에 책임을 지며 투자하기 좋은 나라임을 어필하기 위해 이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 짓길 희망했고 그를 위해 움직였다.
일본 재무성과 금융성의 최고 책임자인 사무차관에게 고이즈미 총리가 직접 연락해 지시를 내렸다.
- 당장 이 사태를 빠르게 정리하세요.
주식 시장을 넘어 일본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재무성과 금융성은 총리의 명령을 재빠르게 이행했다.
본래 결론이 낫던 13일보다 이틀이나 이른 11일 일본 증권결제기구가 1회차 때와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 미즈에 증권은 회수하지 못한 주식 23만 1천 주를 주당 90만 엔에 매입하십시오.
91만 2,000엔이 90만 엔으로 줄어들었지만 정호준은 이만하면 선방했다고 판단했다.
발표가 난 뒤에 정호준은 천천히 제트컴 주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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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다 보면 종종 언론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한국 대통령 제도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변에 위치한 나라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약과나 다름없었다. 한국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강해 봐야 중국 공산당이나 러시아 독재자, 그리고 일본 정부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진 권력의 강력함을 증명해주는 사례는 멀리 있지 않았다. 1회차 때 미즈에 증권은 일본 증권결제기구의 명령을 따른 것 그리고 이후 자민당에서 나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제이컴 사태로 이득을 본 일본 금융 그룹들은 돈을 환원하기까지 했으니까.
'그 돈이 미즈에 증권에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환원금은 일본증권업협회의 제안에 따라 미즈에 증권이 직접 가져가지 않고 향후 대형 증권시장 사고나 인프라 정비에 쓸 수 있도록 증권시장 기반정비기금이 되었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일본해서 활동하는 외국계 기업들 또한 환원의 움직임을 보였다고 한다.
'외국인들에게 배타적인 일본의 성향을 알고, 알아서 긴 걸까?'
정답은 환원한 본인들만 알리라. 다만 1회 차 때와 달리 정호준이 끼어든 탓에 유령주식을 주당 90만 엔에 사들이면 무려 2,000억 엔(한화 2조)을 손해 봐야 했다.
1조와 2조는 와 닿는 느낌이 또 다르다. 그리고 정확히는 미즈에 증권이 본 손해가 1조인 거지 유령 주식을 매수하는데는 4천 억 정도가 소요됐었다.
지금껏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쓴 돈까지 합치면 2조 3천억은 소모해야 했다. 2조는 미즈에 증권이 일본 금융가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라도 순순히 포기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증권결제기구의 명령을 번복시키기 위해 미즈에 증권 또한 나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번 판결을 번복해주게.
미즈에 파이낸셜 그룹 회장 사토 야스하라는 그동안 구축해 놓은 인맥을 활용해 일본 증권결제기구의 임원들에게 결정을 번복해달라고 요청했다.
-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선에선 아니, 일본 증권결제기구의 선에서 들어드리기 불가능한 부탁입니다. 이 결정은 저희의 결정이 아닌 재무성과 금융성, 그리고 총리의 결정이니까요.
- 그들이 대체 왜 이번 사태에 신경 쓰는 거요?
-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무디스, S&P, 피치(Fitch)사가 이번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서라 들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정부의 결정을 따르셔야 합니다 회장님.
사토 야스하라 회장의 연락을 받은 지인들은 어쩔 수 없으니 따르란 말만 할 뿐이었다. 다만 돈을 받아 먹은 게 있어 이유 정도는 설명해주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말에 사토 야스하라는 결정을 번복하는 것을 포기했다. 결정을 번복하려고 발버둥 치다 더 큰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알겠소. 귀띔해 줘서 고맙구려.
당금의 사태가 벌어진 이유가 미즈에 증권의 실수가 시발점이었음은 분명했고 말이다.
다만 사태가 모두 정리되고 누가 얼마를 벌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 됨과 동시에 일본 정부는 다시 한번 자존심을 구기게 되었다.
누가 얼마를 벌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호기심이다. JHJ Capital과 함께 보폭을 맞춘 빅네임들은 JHJ가 주식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어림짐작이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 JHJ가 또 한 건 크게 했다던데 내가 들은 게 맞아?
- 응. 나도 JHJ가 제트컴 사태에서 10억 달러 정도 벌었다고 들었어.
- JHJ는 사람 따로 안 뽑나? 예전에는 그냥 초심자의 행운 같았는데, 요즘은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네.
- 난 그것보다 이번에 JHJ에서 일하는 녀석들이 성과금을 얼마나 받았는지가 궁금해. 성과금을 부동산에 다시 투자하면 그 돈이 얼마나 불어날까?
미국 다양한 분야에 로비스트와 소식통을 두고 있던 일본은 금융가에 성횡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정호준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사실 정호준은 접견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는지 다 알고 있는데 얼굴 한 번 안 보고 돌려보낼 수 없었던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접견을 허락했을 뿐이다.
"접견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한 일본 대사 오시마 진타로입니다."
예의 바른 가면을 쓰는 일본인답게 고개를 숙이며 정호준에게 예를 차렸다.
"정호준입니다. 어떻게 한국말을 잘하시내요?"
"주한 대사로 파견 나왔는데 한국말은 당연히 잘해야죠."
"그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왔는지 묻는 정호준의 질문에 처음으로 미소를 띄고 있던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정호준 회장님께서 이번 제트컴 사태에서 번 수익을 일본에 환원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