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83화 (83/335)

< 83 >

2010년 말기 한국 대기업들은 계열사마다 사내보유금으로 적게는 수조, 많게는 수십조를 쌓아둔다. 한국에서 가장 큰 대기업이자 세계에서도 명성 높은 기업 삼성의 경우 가장 큰 계열사인 삼성전자 하나가 100조가 넘는 사내보유금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정호준이 보고 겪은 1회차 세상이 아닌 2005년이었다. 2005년은 기술도 경제 규모도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수준도 20년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시대였다.

누르빈스카야 다이아몬드 광산이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가 처음 제시한 250억 달러라는 액수에서 35억 달러가 줄은 215억 달러라는 가격으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지만 215억 달러를 단번에 낼 수 있는 재력이 있을 리 없었다.

폴류스는 금광채굴 회사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으로 2021년에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광회사 자리를 지켜내는 꾸준한 기업이었지만 한계가 뚜렷하다는 약점은 극복하기 어려웠다.

꾸준할 수는 있어도 생산량이나 수익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운 게 바로 채광기업들이었다. 2021년 기준 매출 49억 6,600만 달러 영업이익 29억 5,900만 달러에 머물렀던 폴류스가 2005년에 215억 달러를 일시불로 지불할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수십 년 동안 회사를 운영하며 쌓아온 비자금을 사용한다면 또 모르지만.'

아무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 해도 돈 있는 이들이, 부패한 이들이 자기 자산까지 동원하는 일은 드물디 드물다. 그도 그럴 게 회삿돈 = 내 돈이라는 공식은 성립해도 내 비자금 = 회삿돈이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

그들이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을 사용하는 경우는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당할 때.'라고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경영권을 위협받지 않는 폴류스사가 일시불로 대금을 지급할 일은 없었다.

그게 아무리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준다 해도 말이다.

정호준은 그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시켜주는 보고를 페레즈 부사장으로부터 받았다.

- 하아~. 215억 달러를 지불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거군요.

- 죄송합니다.

- 아뇨,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잘못한 게 없잖습니까? 200억 달러 정도 받아내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15억 달러를 더 받아내주셨으면서. 그거면 충분한 성과입니다.

가격협상을 마치고 지급 방안을 논의하는 협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폴류스사도 그렇고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도 그렇고 각자의 주인에게 1차 결과를 보고하는 시간, 다른 말로 휴식 시간을 가졌다.

- 일단 첫발을 잘 뗐네요.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휴식 시간 짧게 문자로 보고를 받은 정호준은 광산 매입가를 조금 더 낮춰 190억 달러까지 낮춰주는 대신 내년 중순까지 대금을 지급하는 제안을 던져보라고 요구했다. 만약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180억 달러까지 물러날 생각도 있다고 말이다.

아무리 은행에 빚을 진다고 해도 수십 조에 달하는 인수자금을 한 번에 지불할 능력은 폴류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은행에 빚을 지면서도 법인명으로 잡힌 자산들을 매각하며 3년, 혹은 4년에 걸쳐 분할지급 될 거다.

겨우 상환기간을 2년 혹은 1년으로 줄여보겠다고 35억 달러, 한화 4조원을 포기하는 건 페레스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반문했다.

'대표님, 그렇게까지 손해를 볼 필요는 없잖습니까?'라고.

정호준이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사를 인수한 후로 예스맨을 저처했던 페레즈의 첫 반대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정호준은 페레즈가 자신의 뜻에 반대해주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회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니까. 정호준이 손해 보는 것을 걱정해주는 페레즈 부사장의 언사에 정호준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작은 힌트를 입 밖으로 꺼냈다.

- 35억 달러를 포기하는 걸로 100억 달러, 어쩌면 그 이상을 벌어들일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누구나 후자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베팅에 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베팅에 성공했을 때 얻게 될 반대급부 또한 크다. 도박에서도 그랬고 국가가 허락한 도박이라 불리기도 하는 주식과 선물시장에서 마찬가지였다. 큰 판에 돈을 걸 수 없게 된 뒤로 4조를 더 받기보다는 손해를 보더라도 무대에 돈을 걸 수 있을 때 돈을 받는 편이 나았다.

정호준으로부터 최소한의 이유를 들었지만 페레즈는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정호준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준비 중이라고 합리화하며 오너의 제안을 전달할 뿐.

- 폴류스에서 대표님께서 제안하신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정호준이 지시한 바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폴류스의 주인 솔레이먼 케리프는 비자금을 꺼내 35억 달러의 값을 더 깎기보다는 제값을 다 치르는 선택지를 골랐다.

- 납부 방법은 3년 분할납부입니다.

정호준의 힌트 제공을 통해 2006년에 정호준이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눈치챘기에 페레즈는 2006년까지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 대표님께서 내년에 큰일을 준비하시는 것 같아 12월에 100억 달러를 선금으로 납부하고 반년 후인 6월에 60억 달러를 추가로 납부하기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12월까지 선금 100억 달러를 입금하고 2006년 6월 60억 달러, 그리고 2007년 6월까지 잔금 55억 달러를 지불하는 걸로 계약서 작성이 완료되었다.

-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최고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차선 혹은 차차선 정도는 되는 결과에 정호준은 페레즈를 치하했다.

말로만 치하하고 끝내는 게 아닌 계약서를 새로이 작성해 그의 임기를 연장해주었고 그와 별개로 100만 달러의 성과금도 지급했다.

*****

CIA, FBI, DNI. 정보기관의 수장들과의 만남은 갑작스레 이루어졌다.

누가 정보집단의 수장 아니랄까 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야심한 밤에 그들을 따르는 요원을 하나씩 데리고 찾아왔다.

-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하면서 말이다.

민간보안회사로부터 한 국가의 수반이나 받을 법한 V.VVIP급 경호를 받고 있었기에 정보기관이라고 경호를 뚫고 만남을 갖지는 않았다. 경호를 뚫고 몰래 찾아왔으면 그동안 들인 돈이 헛되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다행히 들인 돈이 아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호준을 만나는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 직업이 직업이시니 만큼 이해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또 어쩔 건가?

어차피 딱히 추궁할 방법이 있지도 않은데.

- 감사합니다.

- CIA 국장 포터 E. 고든입니다.

- FBI 국장 로메로 밀러입니다.

- DNI 초대 국장 존 M. 폰트입니다.

DNI 국장의 소개는 앞의 두 국장과는 조금 달랐다.

DNI는 2001년 벌어진 911테러로 경각심을 느낀 미국인들의 심리에 의해 2004년 12월 7일 상원의 통과를 받고 탄생한 부서다. 따끈따끈한 신생 부서인 만큼 열정도 있었고.

- 어떻게 차라도 한잔 내드릴까요?

- 괜찮습니다.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마실 것을 가져다주겠다는 제안에 똑같이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 미국을 위해 뛰어다니시느라 바쁘실 국장님들께서 저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속으로 '정보요원들은 남이 준 음료는 안 마시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시선을 마주본 정호준은 자신을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 메가밀리언 복권 당첨 후 미국에서 살겠다고 영주권을 신청하셨던데, 맞습니까?

- 그렇습니다만?

뭔가 신분 조회를 하는 듯한 모습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정호준의 반응에 FBI 밀러 국장은 정호준과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 거짓 없이 솔직히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호준씨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상검증 하는 건가?'

뭔가 심문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 정호준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 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의 몰락을 보고자라서인지 미국의 패권 운영은 이전보다 더 세련되게 변모했다. 패권을 잡았음에도 앞선 다른 나라들보다 억지도 덜 부리고 최소한의 먹을 거라도 남겨주는 관대함이 있었다.

타국인이 자국을 욕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 국민이 없듯 정호준의 입에서 팍스 아메리카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팍스 아메리카를 수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국장들은 정호준을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시선도 잠시 다시 눈에 힘을 주며 CIA의 고든 국장이 물었다.

-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서 생활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호준 대표님은 시민권까지 획득해서 미국인으로 살아갈 생각이십니까?

한국 국적이 아닌 해외 국적을 선택했더라도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방법은 몇 존재한다. 한국 국적을 지닌 여성과 결혼을 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게다가 정호준 앞으로 입영통지서가 발부된 것이 아니었기에 아직 한국 국적이 상실되지도 않았다. 정호준이 꺼림칙하게 여기는 군대 문제도 서울대나 카이스트와 같은 곳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것으로 군대를 뺄 수 있었고.

고든의 질문은 그러한 경향을 모두 꿰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 미국 시민권을 따서 미국인으로 살 생각입니다. 한국 국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미국 국적을 가지고는 할 수 있으니까요.

- 그렇습니까?

- 예, 다만 미국에 이익을 위해 한국을 쳐야 하는 상황이 오고 동참하라고 의사를 밝혀도, 그러한 일에 동참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동참하지 않는 것을 넘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나라라는 감정이 남아 있으니까요. 저는 한국도 잘 되길 바라니까요.

- 이해합니다.

굳이 정호준이 아니라더라도 이민자에게 나고 자란 나라에 감정이 남아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정호준이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었지만 박기태, 박남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정호준의 생각이 정호준을 찾아오기 전에 그들이 정한 기준치 통과하자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주로 해외 파트를 담당한다고 알려진 CIA 국장 고든이 대표로 말했다.

- FSB가 정호준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는 걸 아십니까?

-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정보기관과 접촉한 이유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 지금부터 정호준 대표님은 특급 보호 대상이 되셨습니다. 혹여나 대표님께 위해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따겠다는 의지를 가진 능력 있는 이를 지키는 건 미국 정보기관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 레이첼, 준비해두었던 것 좀 가져다주세요.

본인이 먼저 부탁하기도 전에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국장들의 장담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서 있는 경호원을 불렀다.

정호준의 지시를 받은 레이첼은 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둔 007가방 세 개를 들고나왔다. 정호준은 레이첼에게 전달받은 가방을 그들의 앞으로 하나씩 놔두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007 가방 안에는 미리 사둔 300만 달러에 달하는 미국 국채가 담겨 있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 지금 이 기름칠로 조금이나마 더 신경을 써준다면 그걸로 됐다.

미국 정보기관들과 연을 만들기 위해 100억쯤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