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58화 (58/335)

< 58 >

박기태와 자넷 다음으로 인생이 변한 이를 뽑으라면 정호준은 강현태를 뽑을 것이다.

'당선될지 안 될지는 투표 결과를 열어봐야 알겠지만. 장희팔 사건 때문에 인지도가 있는 건 사실이지.'

강현태 변호사가 본래 19대 총선 하반기 보궐 선거에 출마해 정치 인생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강현태는 무려 8년은 더 이르게 정치에 입문한 셈이다.

'1회차 때 성격 문제가 수면 위로 제기된 적은 없으니.'

정치를 일찍 시작한 만큼 10년대 후반이나 죽기 직전일 20년대에는 좀 더 높은 곳에 있게 되리라.

'저 사람이 좀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게 돕는다.'

그들이 좋은 인연으로 시작된 관계는 아니었지만 장희팔 사건을 다루면서 서로의 능력은 확인했다. 큰일은 한번 함께 치러냄으로써 최소한의 신뢰를 구축된 상태였다.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정호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줄 정도는 된다는 말이었다.

당장은 한국에 들어갔다가 몰매나 맞을 상황이지만 이 감정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거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살 생각이지만 최소한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하고 사업이 가능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정계의 중진이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시기는 좀 더 빨리 오게 될 거다.

"그럼, 내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전언의 뒷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바쁜데도 불구하고 멀리 있는 미국까지 오게 만든 반대급부는 있어야 할 거란 표정으로 강현태가 먼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번처럼 변호사님의 명성을 높여드릴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김가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아십니까?"

"김가엔터테인먼트라,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거기도 무슨 문제가 있나 보죠?"

"주가조작을 위해 움직이는 중입니다."

"주가조작이라…. 호준군은 항상 어려운 것을 가져오네요. 호준 군에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하늘이 두 번째 기회를 준 만큼 알든 모르든 선한 영향력이란 것을 끼치고 싶었으니까.

강현태 변호사의 중얼거림을 분명히 들었지만, 정호준은 그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 연기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장은 수면 밑에서 밑밥을 까는 중이라 수면 위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주가를 조작하는 것도 소재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 한국 드라마나 연예인들이 아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소재로 써먹을 겁니다."

"대단합니다. 미국에 살면서 어떻게 저보다 더 한국 소식에 능통한지 모르겠군요."

"인터넷 신문에서 워낙 자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정호준이 인터넷 신문을 거론하자 강현태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단계 사기범들이 돈을 국외로 빼돌리기 전에 서민들의 돈을 지켰던 것처럼, 주식 시장에서도 한 번 보여주시죠."

정호준은 잠깐 말을 끊고 강현태를 힘 있게 쳐다봤다.

"국민의, 서민의 돈을 지키는 정치인이란 이미지, 꽤 매력적이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이 된 걸로 만족하지 마시고, 좀 더 위를 노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번 보궐 선거가 치러지기 전임에도 정호준은 당선을 당연시하며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를 거론했다.

"호준군,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닙니까? 아직 선거에서 이긴 게 아닙니다."

뒤로 빼는 듯한 강현태의 말에 정호준은 곧장 답했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승산이 충분하니까 출마하셨을 거 다 아는데 말이죠. '이&박'로펌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나요?"

한국은 입법(정치), 사법(법조계), 행정(관료, 기업)가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는 나라다. 하지만 그 경계는 심히 가벼워 혈연, 학력, 인맥 등으로 얽혀있어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인다.

법조계 최고봉, 로펌업계 1위인 '이&박'로펌 또한 그들과 말이 잘 통하는 이가 국회에 많으면 많을수록 막강한 파워를 지니기에 로펌 출신인 강현태를 밀어주는 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정호준의 발언에 강현태의 표정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정말, 너무 아깝다.'

유비가 제갈무후를 데려가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듯 그 또한 그렇게라도 해서 정호준을 영입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다만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지는 않았다.

천억(?)을 굴리는 정호준에게 자신의 보좌관 자리는 너무 부족한 자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호준군 말대로 김가엔터테인먼트를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

강현태 변호사와 만남을 가진 다음 날 정호준은 공항에 나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로 대한민국의 자살율은 높았다. 2002년 이후로 일본의 자살율을 추월하며 OECD 회원국 중 자살 사망률 1위를 기록한다.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 일본의 것을 빼앗은 것.

'이것까지 일본을 추월할 필요는 없었는데.'

한 달에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걸 무슨 수로 막겠는가?

나라도 못 막는 걸 일개 개인인 정호준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게 무리수다. 본인이 무슨 초인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본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은 좀 다르다.

'연애이야기'란 작품을 도운 적 있던 박남정은 '태극기 흩날리며'의 여주인공이었던 김은주와 작게나마 인연이 있었고, 이번 생에는 박남정을 넘어 정호준과도 인연이 있었다.

김은주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태극기 흩날리며'가 바로 정호준이 투자한 첫 작품이었다.

정호준은 투자 자문을 해주면서 박남정을 움직였다. 2월 21일 그녀가 생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린 전날 박남정에게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 같다는 말을 해 박남정을 움직였다.

생을 포기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독하게 마음먹어야 가능한 것이었기에 박남정이 그녀의 계획을 방해하며 위로해준 걸로 1차 위기를 막았다.

김은주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박남정은 환경을 바꿔보는 게 어떻겠다는 말로 여행을 제안했다.

"어서 와요. 정호준이라고 합니다. 김은주씨가 주연으로 나온 '태극기 흩날리며'에 투자한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게 정호준이 아침부터 공항에 나와 있는 이유였다.

잘 모르겠는 표정을 보이는 김은주에게 정호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한국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선택한 메가밀리언 당첨자는요? 그건 더 유명해서 좀 알 텐데?"

"아!!"

좀 더 자극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린 뒤에야 김은주가 기억난다는 듯한 표현을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일단 움직일까요?"

*****

한국에서는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지만 외국에 나오면 그냥 평범한 동양인에 불과했던 터라 별다른 시선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이 관광을 다녔다.

강현태가 찾아온 날로부터 사흘 후인 3월 11일.

애플은 스티븐 잡스가 언급했던 대로 주식분할을 시행했다.

애플이 2005년 2월 28일에 주식분할 시행했던 본래의 역사를 생각하면 시기상 큰 차이는 없었다. 분할 비율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2 대 1'이었다.

91.31불까지 올랐던 주가는 2분할 되었다가 2.5불 값이 상승해 48.15달러로 장을 마감했다.

정호준이 쥐고 있던 애플 주식 '6,599,586'주는 보유 주식수 천만 단위를 넘기며 13,199,172주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유한 주식 수가 2배로 증가한 만큼 정호준은 주가가 오른 영향을 크게 받았다.

'돈이 복사된다는 말을 여기다 쓰면 되는 건가?'

내가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돈이 들어오게 만들어야 부자가 된다고 했던가?

주식이 분할됐을 뿐 아무런 액션을 취한 게 없음에도 가만 앉아서 돈을 벌었다.

정호준이 보유한 애플 주식 13,199,172의 시장가치는 3월 18일 종가 기준으로 계산하면 635,540,131.8달러다. 전날과 비교해 32,931,934.8달러를 벌어들였다.

3,293만 달러는 한화로 약 379억원에 달하는 돈이었다.

장이 마감되기 무섭게 텐션이 꼭대기까지 올라간 자넷이 찾아왔다.

환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띤 채 말이다.

- 정! 고마워요. 나가요 우리. 내가 밥 살게요,

- 손님도 같이 먹어도 되죠?

- 물론이죠!

주식분할의 혜택은 자넷 또한 함께 누렸다. 정호준만큼 자금 규모가 크지는 않아 정호준처럼 100억 단위의 이득을 보진 못했지만, 전에 다녔던 로펌의 연봉만큼은 벌었다.

돈을 벌었다고 한턱낼 거면 수백억을 번 정호준이 사는 게 맞았지만 정호준은 굳이 사겠다는 자넷을 말리지 않았다. 번 돈의 규모를 떠나 감사의 의미가 담긴 식사 자리였으니까.

'맛있게 먹는 모습 보여주면 됐지 뭐. 그나저나 뭘 밥을 사준다고 미국까지 오시겠데, 아저씨는.'

고마워서 밥을 사려 시도한 건 자넷 만이 아니었다.

박남정도 고맙다고 밥을 사러 미국으로 넘어오겠다 해서 말리느라 혼났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1주일만 있다 한국으로 귀국할 계획이었던 김은주가 한 달 넘게 라스베가스에서 머물렀다.

새해가 밝은 게 엊그제 일인 것 같은데 벌써 4월이 반이나 지났다.

훈련소에 입소했던 박기태의 5주 기초 군사 훈련이 끝났고 수료식 날 전화 통화를 나누기도 하며 다가오는 입시 D-Day에 호준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정호준이 이야기했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깔끔하게 해내겠습니다."

작게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던 '김가엔터테인먼트' 대표 김해일은 명동의 사채꾼과 세력들을 찾아가 일본과 중국을 넘어 동남아까지 퍼진 한류의 인기를 틈타 크게 해먹자는 그의 계획을 설명했다.

"덜미가 잡히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기껏해야 10년 정도 살지 않겠습니까? 투자 부탁드립니다."

김해일은 뒷마무리가 깔끔하게 안 될 경우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와도 괜찮다며 각오를 들어냈다.

금융 범죄에 관대한 한국이다. 미국처럼 종신형을 때리는 일은 절대 없다.

전관예우 변호사를 써 최대한 형을 줄여 10년 안팎으로 받고 모범수로 나오면 된다는 계산까지 모두 마쳤다.

'한 5~6년 고생하고 남은 인생 떵떵거리면서 살자.'란 마음가짐이었다.

자금을 투자(?)받고 세력을 확보한 김해일은 곧바로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에 돈을 투자했다.

기업 이름은 '고스트'.

고스트는 진성화학그룹이라는 견실한 중견기업의 계열사로 골프공, 골프의류 등을 제작하는 회사였다.

[김가엔터테인먼트 코스닥에 상장 기업인 '고스트'를 인수하다.]

[연예인 마케팅을 통해 판매량을 늘리겠다는 김해일 대표의 야심찬 도전!!]

미리 약을 쳐둔 인터넷 신문 기자들은 '김가엔터테인먼트'의 고스트 인수를 엔터 사업으로 돈을 잘 벌어 사업을 확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강현태 변호사는 재보궐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바쁘게 유세 활동을 벌이면서도 인터넷 기사들을 통해 이런 상황을 확실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대체 호준군은 어디까지 내다 보고 있는 건지.'

다음에 만나면 혹시 자신의 자금을 맡아줄 수는 없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