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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IPO를 시행한 다음날인 8월 20일 금요일. 정호준은 자넷의 차를 다시 한번 얻어 탔다.
정호준의 목적지는 오리건주 포클랜드,
운전기사는 당연히 자넷이었다.
자넷의 차를 또 한 번 얻어탄 정호준은 자넷에게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 차 주문했으니까, 올 때까지만 좀 이해해줘요.
- 차를 샀다고요? 언제요?
- 캘리포니아 다녀온 다음 날요. 자넷 쉰 날 있잖아요. 그때 쉐보레 코르벳 C5 컨버터블로 샀어요.
BMW나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를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고민했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 미뤄두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지구에서 자국에 대한 가장 큰 애정을 가진 국민은 다름 아닌 미국인이었다. 적어도 정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옆 나라인 중국의 국민들이 중화가 최고고 중화민족이 최고라고 외치는 걸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한 정호준이지만 정호준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정말 국민 전부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가 죽기 직전까지 봐온 중국 사회에 만연하게 자리한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중국이 궤도에 오른 2020년에도 그렇거늘 2004년에 중국에서 정말 중국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과거에 최고였고 추후 그럴 잠재력을 갖고 있을 뿐 당장은 최고가 아니란 걸 그들도 알고 있을 거다.
넓은 영토 곳곳에 묻혀 있는 자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 안정된 정치(공산독재)에서 비롯된 급격한 성장으로 매년 몸집을 불리고 있지만 미국은 20세기 들어서 팍스 브리타니카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팍스 아메리카가 된 뒤로 쭉 패권국이었다.
세계 최고의 자리를 100년 넘게 이어가며 패권을 유지 중인 국가의 국민이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작을 리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되도록 미국 제품을 애용하며 미국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당장 누가 그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해도 꾸준히 그런 태도를 보여주면 언젠가 그런 태도도 조명 받지 않겠는가?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귀화해서 그 나라 상류층에 끼어들고자 하는데 그 정도 가식은 떨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의 덕을 앞으로 종종 보게 될 테니까.'
- 옵션은 어떻게 했어요?
- 옵션요? 아 옵션은 그냥 풀옵션으로 구매했어요.
- 풀옵션요?
- 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젤 거 없으니까요. 제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던 건, 자넷도 잘 알잖아요?
질문이 섞인 대답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예의 상 빈말을 던졌다.
- 혹시 피곤하면 이야기해요. 운전 바꿔줄 테니까.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 정말 운전 잘하거든요. 친구와 미국 관광할 때도 운전은 내 몫이었어요.
아무리 절친한 사이여도 차는 빌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예민한 사람은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운전대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넷이 운전대를 허락할 확률이 낮다는 계산을 마친 빈말이었다.
정말 운전하라고 내주면 운전이야 하면 되는 거였고 말이다.
- 됐거든요(No way)!
아니나 다를까, 자넷은 목소리에 힘까지 주면서 단호하게 정호준의 제안을 뿌리쳤다.
-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자넷이 운전대를 안 줄 걸 예상하고 한 말이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를 당하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 때문에 안 해도 될 말을 내뱉었다.
- 나 정말 운전 잘한다니까요!
- 대학원 다닐 때 한국 친구한테 들은 건데, 한국은 18살은 돼야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잖아요. 한국 나이(Korean Age)로 따지면 생일 지난 19살. 그런데 정이 운전을 하면 얼마나 했겠어요.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늦어도 한국 나이로 17세쯤에는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운전을 잘한다는 말을 신뢰하기엔 정호준의 나이와 한국의 법이 걸렸다.
비겁하게 법까지 근거로 삼는 자넷의 행태에 정호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어도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이 없었다.
'치사하게 말싸움에 법을 갖다 대네.'
*****
정호준이 포클랜드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 주식담보대출(stock-backed loan)을 신청하려고 왔습니다. 구글 주식 2,021,505주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이번에 매입한 구글주식을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길 원했다.
캘리포니아주가 아닌 오리건주의 포클랜드로 온 이유는 같은 도시에 골드만식스의 사무실이 없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빚내서 산 주식을 담보로 다시 빚을 내고, 그 돈으로 다시 주식을 산다.'
잠깐 조정기가 있을 수는 있어도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구글 주식의 고공행진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과감하게 승부수를 띄웠다.
잘만 하면 빚으로 빚이 정산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고교 때 학원 선생들이 한 번씩 말해줬던 카드깡 돌려 막기 같은 느낌이네.'
물론 카드깡 돌려막기와는 달랐다. 이자나 수수료 때문에 원금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지는 않는 돌려 막기와 구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 또다시 구글 주식을 사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빚내서 빌린 원금 자체가 점점 커질 테니까.
감당해야 할 이자보다 돈이 몸집을 부풀리는 속도가 더 빠를 거다.
골드만식스에 대출을 받을 때 했던 것처럼 구글 주식을 매입할 때 메릴리치에 새로운 계좌를 만들어 매입을 진행했다.
- 이자율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혹시 담보자산의 %를 조금만 늘려주실 수 있을까요?
- 어제 종가(106.76)가 아닌 오늘 종가(115.69)로 자산을 평가해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제 재량으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린 겁니다.
'조건이 조금 별로네.'
계좌를 사용한 기간의 문제인지, 아니면 자금 크기가 골드만식스를 이용할 때보다 작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주가 달라서인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메릴리치는 골드만식스보다 조건이 짰다.
자산가치의 70%만 인정해주었고 연이율도 5%로 골드만식스 때보다 1% 많았다. 1.5%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갚아야 할 돈의 단위가 달랐다.
백만원, 천만원의 1%가 아닌 1억 달러는 넘을 게 분명한 돈의 1%였으니까.
-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대출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 와서 조건이 짜다고 대출받지 않고 뺄 순 없다.
정호준이 담보로 잡은 주식의 가치는 오늘 종가를 대입하면 233,867,913달러에 달했고, 이의 70%인 163,707,540달러를 메릴리치로부터 대출 받을 수 있었다.
*****
정호준은 대출 받은 돈을 미리 만들어두었던 리만 브라더스 계좌로 입금했다.
생활비랑 자넷의 월급 줄 돈으로 넉넉히 빼놨던 50만 달러 중 38만 달러를 추가로 입금했다. 자넷에게 줄 월급과 트레이더들을 사흘 고용한 고용비, 그리고 이번 달 생활비를 제외하면 전호준의 수중에 남은 돈은 없었다.
'주식을 매입하는데 한 푼이라도 더 사용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자'
다음 달에 낼 이자조차도 주식을 팔아내야 할 정도로 영혼까지 끌어모은 베팅이었다.
-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8월 23일, 나스닥 장이 열렸고, 정호준이 고용했던 트레이더들은 일을 시작했다.
정호준은 트레이더들이 일하는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정호준은 평균 매수가 118.83불에 1,380,860주를 추가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매수를 끝냈을 때 정호준은 약속했던 사흘 치 일당을 지급했다.
- 조나단씨는 잠깐만 남아주시겠어요?
- 예? 아, 네.
정호준이 붙잡지 않은 베드로란 이름을 가진 트레이더는 미련 없이 떠났고, 자신을 왜 남겨뒀는지 궁금하다는 조나단을 보며 정호준을 말했다.
- 조나단 트레이더, 조금만 더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수요일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일당은 지금 드렸던 것을 똑같이 드리겠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구글 주식을 매입하는데 신속함이 크게 필요치 않았다.
전문 인력을 하나면 충분했다.
'왜 조나단이냐고?'
쓸데없는 참견이긴 했지만 어쨌건 시키는 일을 하기 전에 위협일 수도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 조나단 트레이더를 선택했다. 기왕이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을 뽑는 건 고용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정호준은 시애틀로 이동해 리만 브라더스에게서도 담보대출을 받았다.
리만 브라더스의 조건은 골드만식스와 메릴리치의 중간쯤 되었다.
월요일 종가(120.34)를 기준으로 72%의 가치만 인정해주었고 연이율도 5.0%에 달했다.
정호준은 리만 브라더스로부터 119,644,338달러를 대출받았고 네바다주로 돌아와 골드만식스 증권계좌에 입금했고, 수요일 조나단 트레이더를 불러 주식 매입을 진행했다.
- 평균 매입가 122.36에 977,806주 매입 마무리했습니다.
2004년 구글의 발행주식 수는 330,485,660주.
정호준은 4,380,171를 보유하며 전체 발행주식의 1.327%를 소유한 대주주가 되었다.
조나단의 보고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식사 함께하시겠습니까?
- 아뇨, 오늘은 괜찮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또 좋은 인연으로 만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호준은 악수를 청했고, 조나단은 정호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정호준은 계좌에 입금할 때, 그리고 주식을 매도할 때 소수점의 수수료를 증권사가 받아 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였다. 정호준이 골드만식스의 계좌로 돈을 입금한 건.
골드만식스의 계좌로 주식을 매입한 건 정호준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였다.
쪼잔함의 발로라고 말해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본인에게 좀 더 나은 조건을 준 쪽이 돈을 더 벌었으면 싶은 건 당연한 인간의 심리잖은가?
어쨌건 돈을 빌려줬는데 배은망덕한 거 아니냐고?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긴 했다.
'리만 계좌로는 왜 거래 안 했냐고?'
망할 회사에 굳이 힘 쓰며 친분을 쌓을 필요는 없었다.
그럴 여력이 있으면 골드만식스와 좀 더 깊게 연관되는 게 낫다.
냉정한 듯 들릴지 모르겠으나 정호준의 행동은 냉정한 현실을 100% 반영한 처사였다. 리만 브라더스에게 대출 받는 것을 끝으로 정호준은 대출받으러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대출 받으러 갔다가 거절 당할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