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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46화 (46/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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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잡스는 불안 요소라고 판단한 것을 그냥 두고 만 볼 인간이 못되었다.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행동에 나섰다.

JHJ Capital의 CEO 자넷을 만나기 위해 스티븐 잡스는 직접 네바다주까지 이동했지만,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자넷은 정호준에게 지시 받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  미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잡스는 무례인 걸 알면서도 예고 없이 찾아 들었다.

당사자의 표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했는데.'

같은 용무로 또다시 네바다주를 방문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에 연락처를 받아 전화 통화를 나누었다.

- 애플에 투자한 건 제 판단이 아닙니다.

오리발을 내미는 듯한 태도에 잡스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 CEO의 판단이 아니라는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회사를 경영하는 건 CEO지만 회사의 주인은 주주죠. 대주주도 아니고 아예 지분 전체를 쥐고 있는 주주(Owner)의 지시를 고용인에 불과한 한낱 CEO가 어떻게 어길 수 있을까요?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2천억을 고스란히 애플에 투자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애플의 전망이 좋다고 평가해도 전 재산을 그것도 2천억이 넘는 돈을 한 종목에 전부 투자하는 걸 어떻게 그냥 두고 보며 반길까? 자넷은 전 재산을 한 종목에 모조리 투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정호준을 말렸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은 미국에도 유행하는 말이었다. 아니 정확한 사실을 말하자면 이 발언 자체가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한 말이다.

- 자넷 CEO에게 애플 투자를 지시했다는, JHJ Capital의 오너를 만나고 싶습니다.

- 글쎄요, 만남이 가능하다, 언제쯤 시간이 괜찮다, 이런 말은 지금 당장 확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오너가 거절하면 달리 방도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일단 잡스씨가 만남을 요청했다고 전달해두겠습니다. 지금 이 번호로 다시 연락드리면 될까요?

- 되도록 빨리 가부여부를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그럼 부탁합니다.

자신이 바쁜 사람임을 어필하는 잡스의 말을 끝으로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

전화 통화를 끊자마자 자넷은 휴대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 흥! 웃겨. 나는 뭐 안 바쁜가?

경영자들이나 옛 세대들에겐 2004년 당시에도 애플의 스티븐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윌리엄 게이츠와 함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폰을 출시하기 전이었기에 잡스와 다른 시디를 산 현 20~30대는 스티븐 잡스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았다.

자넷 또한 그에게 별다른 환상을 갖지 않은 30대 여성에 불과했다.

'한국은 PC Room이 많네.'

투덜거리면서도 자넷은 주변의 PC라고 쓰여 있는 곳에 잠깐 들러 정호준에게 스티븐 잡스가 만남을 요청했다는 메일을 보냈다.

- 자넷! 오래간만이야!!

정호준의 지시를 받아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정호준의 고국, 한국으로 출장 온 자넷은 지인과 만남을 가졌다.

- 릴리라 불러도 된다니까. 그나저나 오랜만이야 소영. 잘 지냈어?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믿을 만한 통역이 필요했던 릴리 자넷은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School of Law(UCLA 법학대학원)을 함께 다닌 친우, 이소영 변호사를 만났다.

- 나야 뭐, 잘 지냈지. 그나저나 한국에는 어쩐 일이야?

-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출장 나왔어.

- 처리해야 할 일?

- 응, 중요한 일이라, 통역 관련해서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

도와달라는 자넷의 부탁에 이소영은 잠깐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자넷이 만났던 이소영이란 이름의 변호사는 동명이인이 아닌 정호준에게 법리적 서비스를 제공해준 그 번호사가 맞았다.

자넷으로부터 일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이소영도 생각했다.

'와, 세상 참 좁네.'라고.

좁은 한국 땅을 떠나 미국 땅에서 맺은 인연에까지 닿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소영이 다니는 로펌 '한빛로펌'은 업계에서 중견 정도 위치에 해당했고 '한빛로펌'의 주인인 이진규 대표 변호사는 사실 이소영 변호사의 부친이었다. 이진규 대표 변호사는 아들 하나, 딸 둘. 총 세 명의 자식을 두었고 이소영은 그중 막내딸이었다.

법조계의 중진이나 다름없는 이진규 변호사는 자신의 자식이 그를 따라 법조계에서 일하길 원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자식 농사는 자기 맘대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소영의 오빠이자 이진규의 장남인 이한영은 공부를 못하진 않았지만 부친처럼 서울의 명성 높은 법대에 들어갈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다. 법대는 못 가도 네임벨류 있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성적은 됐기에 그 길을 선택했다.

그냥 거기서 깨끗하게 포기했으면 됐는데, 이진규 대표 변호사의 욕심은 이한영에게 사법고시를 보도록 강요했다.

'사법고시만 합격해라, 그럼 내 로펌은 네가 물려받게 될 거다.'

동기까지 부여해주며 이한영에게 이런저런 푸쉬를 해줬지만 그런다고 합격할 사법고시였으면 신림동에 거주하면서 6수, 7수, 8수를 이어가다 결국엔 포기하고 마는 이들이 수두룩했겠는가?

학교에 휴학계를 내건 채 4년이란 시간을 사시에 쏟아부었음에도 이한영은 사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시간만 허비한 채 도망치듯 군대에 가게 되었다.

자식 하나의 인생을 꺾어버렸으면 그쯤 해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사람 욕심이란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차녀인 이주영은 공부를 못했고, 이진규의 기대는 그렇게 막내딸인 이소영에게 쏠리게 되었다.

"법대 안 간다고요!"

오빠인 이한영이 원치 않은 사법고시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똑똑히 지켜본 이소영은 법대에 가라는 부친의 말을 거역했다.

"그만 좀 포기하세요. 오빠 인생 망쳤으면 됐지, 왜 그렇게 집착하시는 거예요!!"

이진규의 면전에서 비수를 꽂은 뒤에야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웃긴 것이 하라고 강요할 때는 죽어도 하기 싫었는데, 부친이 포기하고 관심을 끄니 오히려 흥미가 생겨버렸다.

5학기 내내 과수석을 쟁취하며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면 먹을수록 사회 나갔을 때 받는 남녀 간의 차별, 법조계의 파워, 보이지 않았던 직업 간의 서열 등이 보였다.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땐 자기도 모르게 법전을 펴고 법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보내주세요."

검사, 판사와 달리 변호사가 되는 길은 사법고시 합격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 이한영 때문에 사법고시 자체에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던 이소영은 유학을 통해 국제 변호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도 한국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하려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연수원을 수료하지 않는 한 한국 법정에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이진규 변호사는 딸의 요청을 수락했다. 미국처럼 로스쿨 제도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음을 전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소영은 UCLA로 편입해 법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대학원에서 자넷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

자넷이 힘들게 입사했던 'Perkins Coie'에서 뛰쳐나왔다는 건 다른 동기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정호준의 밑에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 알았어. 어려울 것 없는 일이네. 그나저나 네가 정호준씨와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 소영이 정을 어떻게 알아?

자넷의 물음에 이소영은 자신이 그 계약서를 쓰는 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종국에는 복권 당첨된 사실도 한국 뉴스에 전부 뿌려졌음을 알렸다.

자넷은 이소영처럼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가 겪은 정호준에 대한 이야기를 다 내뱉은 뒤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등을 이야기하고 연애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를 나눴다.

*****

자넷에게 연락받은 정호준은 그 유명한 스티븐 잡스를 만날 기회란 생각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혹시 친분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기도 했다.

만나자마자 그러한 착각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말이다.

스티븐 잡스는 정호준이 어리다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진 않았다.

- 왜 애플에 투자한 겁니까?

정호준이 어리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다는 듯 만나자마자 자신의 용건을 곧장 꺼내 들었다.

'업계 사람들이 잡스가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 하더니 그게 맞았네.'

좋게 말하면 직설적이고 숨기는 게 없는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예의가 없는 거다.

적어도 인사나 자기소개 정도는 하며 예의를 갖춘 뒤에 본론을 꺼내는 게 맞지 않을까?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란 평가도 있을 만큼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게 정호준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돈 갖고 투자한 게 문제가 됩니까? 나는 지분을 매입한 것 외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정호준이 가시를 세우며 되묻자 잡스는 이글이글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시선으로 정호준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노려보는데 왜 그 시선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는 걸까?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정호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스티븐 잡스, 당신이란 사람을 보고 투자한 겁니다.

- 나를 보고 투자했다?

- 애플에서 쫓겨나 키운 픽사는 실패 한번 없이 승승장구 중이고, 썩은 사과라 불리는 애플을 기사회생시키고 지금 위치까지 다시금 끌어올렸죠. 그 정도 포트폴리오면 당신이란 인물을 신용해서 투자해도 납득하기 충분한 이유 아닌가요?

정호준은 잡스가 걸어온 발자취를 나열하며 그 속에 진실을 숨겼다. 그리고 혹시나 그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 잡스의 성질을 긁는 내용으로 이야기했고.

- 혹시 내가 지분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제 손으로 가를 만큼 멍청하진 않으니까요.

아이폰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한 투자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주식분할을 비밀리 추진 중이다. 갑작스럽게 애플에 거금을 투자한 게 그 사실을 어디서 들은 게 아닐까 싶어 마지막까지 의심을 놓지 않았다.

- 거짓을 말한 것 같진 않은데, 뭔가 내가 듣지 못한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착각입니까?

- 글쎄요, 그건 잡스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겠죠.

일단 정호준이 그가 쫓아낸 이사회 등과 붙어 먹은 건 아니란 걸 확인했기에 그냥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제대로 된 진실을 말해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으니까.

시대의 거인과의 만남은 별다른 소득 없이 그렇게 마무리됐고, 일 처리를 무사히 마쳤으며 며칠 한국에 머무르다 미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자넷의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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