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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결과에 투자한 거지만 배당률만 무려 70배에 달하는 도박에 성공한 날이다. 맨정신에 잠이 올 리 없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멍청하게 서 있다 정신을 차린 자넷과 술을 마시며 맨정신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과하게 마시진 못했다.
'와인은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70배 배당이 걸린 도박에서 돈을 딴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하주로 샤토 르 팽 82년산을 2병 구매해 자넷과 나눠 마셨다.
본래 가격에 호텔의 바가지 요금까지 겹쳐 한 병에 800만원 좀 더 주고 구매했다. 한 병에 근 천만 원 가까이 하는 와인을 마셨지만 입맛이 저렴해서 그런지 회귀 전 어쩌다 한 번 먹게 된 와인과 뭐가 다른지를 느끼지 못했다.
이 비싼 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굴 가득 드러나는 정호준의 표정에 치즈 안주를 집어 먹으며 와인을 맛보는 자넷이 말했다.
- 와인은 원래 먹어 버릇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거에요.
또 하나 쟤 나이처럼 보이는 모습을 발견한 자넷이 입가에 예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와인은 주로 자넷이 마시고 정호준은 위스키를 따로 시켜 적당히 취했다는, 알딸딸함이 느껴질 정도로 알콜을 들이부었지만.
그런 상태임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벌써 해가 떴네.'
두근거리는 심장은 알콜로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뛰는 것을 진정시키지 못해 결국 정호준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누군가 물어볼 수도 있다. '메가밀리언도 당첨돼 봤으면서 뭘 그러냐?'라고.
그렇게 물어보는 이에게 정호준은 실감의 정도가 다르다고 답하리라.
받게 될 돈의 크기가 메가밀리언 당첨금 쪽이 적어서가 아니다. 물론 돈의 규모가 작은 게(?) 아주 고려 대상에 없다고는 딱 잘라 말할 수 없겠지만.
이건 액수의 규모 이전의 문제였다.
'정말? 내가?'
메가밀리언 당첨은 생각지도 않게 날아든 행운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냥 꿈을 꾸는 것 같은,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 것 같은 착각에 불과하단 느낌만 가득했었다.
반면 유로의 우승자를 맞추는 도박에 베팅한 건 미래의 결과를 토대로 본인이 맨정신에 자신의 생각을 가득 담아 베팅한 거다. 그리고 나서도 혹시나 나비효과가 발생해 그리스가 우승하는 역사가 사라지는 건 아닐지, 한 경기 한 경기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모두 챙겨봤다.
가슴을 졸일 만큼 졸였기에 와닿는 정도가 컸다.
정호준은 비행기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샤워를 마치고 체크 아웃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로비로 나와서 자넷을 기다렸다.
- 잠이 안 왔나 봐요?
시간 맞춰 나온 자넷이 정호준의 얼굴을 보곤 웃으면서 물었다.
- 네. 자려고 별 노력 다 봤는데, 어떤 노력도 헛수고더라고요. 한숨도 못 잤습니다.
잠이 안 올 때 시도하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인 양 세기도 시도해 봤다. 3백 마리 넘게 세다가 숫자가 꼬여 중간에 그만뒀지만 말이다.
자넷은 정호준이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별말 없이 웃었다.
- 잘은 모르겠지만 이해해요. 잠은 못 자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밥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죠?
자넷의 제안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점, 브런치를 먹기 위해 뷔페가 있는 층으로 이동한 자넷과 정호준은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온 자넷은 무더기로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뭘 처리하냐고?'
배당금 때문에 생겨난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300만 달러를 8등분으로 나눠 375,000달러씩 베팅회사에 베팅했다. 평균 배당률이 70배였으니까 조금 더 받거나 덜 받는 건 있어도 결국 한 회사당 정호준에게 26,250,000달러를 지급해야 한다는 거다.
현재 환율 1,135원으로 계산하면 한화로 29,793,750,000원. 천만원 단위에서 반올림하면 대략 한 회사당 300억씩을 정호준에게 지급해야 한다.
'깔끔하게 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쿨하게 주기엔 액수가 너무 크지.'
그리스의 우승에 돈을 건 게 정호준이 유일한 게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그리스 국민 중엔 분명 애국 베팅을 감행해 자국이 우승하는 것에 건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스의 우승은 분명 공이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고 약팀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해준 기적 같은 사건이지만 베팅회사에게 그리스의 우승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천재지변보다 더한 재앙이지.'
차라리 천재지변이었으면 할 말이라도 있으리라. 보험회사도 보면 전쟁이나 천재지변 때문에 발생한 피해와 관련해서는 보험금 지급이 어렵다고 구절을 적는 경우가 종종 있잖은가. 정말 천재지변이면 그를 핑계로 지급을 취소할 수라도 있지, 베팅회사들은 지급 불가를 선언할 수도 없었다.
'회사 문을 닫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면 그럴 수가 없다.'
돈도 돈이지만 신용이 더 문제였다. 지급해야 할 액수가 크다고 아예 배 째며 불이행을 선언하면 누가 베팅회사에 돈을 걸까?
정호준이 돈을 건 베팅회사들은 전 세계 베팅업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런 회사들이다. 그들이 지금껏 쌓아온 신용과 신뢰는 돈 만큼이나 무거운 것이었다.
*****
배당금 협상과 관련해서 정호준이 활약할 수 있는 요소는 전무했다.
돈을 건 게 본인의 의지임이 드러나면 잘 됐다고 물어 뜯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은 협상의 전권을 자넷에게 부여하고 따라가지도 않았다.
자넷이 잘 처리해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다행히 자넷이 일을 처리를 깔끔하게 마쳤다.
뱅크 아메리카 법인 통장에는 $210,000,000(2억 1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찍혀있었다. 한화로 무려 238,350,000,000(2,383억)원에 달하는 돈이었다.
- 말로만 수고했다고 치사하고 말면, 자넷이 많이 서운하겠죠?
위험을 무릅쓴 것도, 그리스에 돈을 베팅한 것도 모두 정호준이 홀로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지만 정호준은 자넷에게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 200만 달러를 성과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자넷이 크게 활약한 건 없더라도 최소한의 성과금을 챙겨줬다. 그도 그럴 게 자넷이 없었으면 베팅 자체가 불가능했었을 테니까.
- 정말요?
- 물론이죠. 수고해주셨잖아요.
자넷도 2억 1천만 달러가 월가 사람들 말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모험해서 번 돈이 아니란 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200만 달러를 성과금으로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정호준은 기뻐하는 자넷을 바라보며 별일 없이 지나간 것에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도 자넷이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돈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
정호준과 자넷은 자넷을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정호준이 조종하는 대가로 연봉 100만 달러를 보장하는 계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계약서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자넷이 없었으면 정호준이 스포츠 도박에 돈을 걸 수 없었을 거란 사실 또한 펙트였다.
'성과금으로 최소 몇 프로는 약속해주시죠.'
세상에 돈 욕심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자넷이 정말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사실을 근거 삼아 더 많은 돈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일정 지분을 넘겨주지 않으면 정호준이 돈을 못 타게 판 자체를 엎어버리겠다고 협박해가면서 말이다.
자넷은 정호준이 자넷이라는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 나는 이 돈을 스티븐 잡스가 경영하는 애플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자넷도 여유 되면 주식을 좀 사둬요. 팔기 전에 이야기해줄 테니까. 내가 정리할 때 같이 정리하면 못해도 150%는 벌 수 있을 겁니다.
정호준이 앞으로 본인이 진행할 투자 계획을 이야기하는 건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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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에게 200만 달러의 성과금을 지급하고 남은 JHJ Captital 자금은 208,000,000(2억 800만)달러를 자넷에게 말했던 대로 애플에 투자했다.
최대한 많은 주식을 구매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주식을 사드렸음에도 평균 매수 단가는 가파르게 올라갔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다.
어쨌건 정호준은 9월에 이르러서야 주식 구매를 마쳤다.
38달러에서 40달러 오가던 주식이 지금은 60불에서 64불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평균 매수가가 53불이라.'
정호준은 53불에 애플 주식 3,924,528주를 구매했다. SSL Capital이 쥐고 있는 주식 246,575주까지 합치면 총 4,171,103주를 보유하게 되었다.
2004년 현재 애플이 발행한 주식 수는 291,418,590주. 정호준이 보유한 주식은 발행주식의 1.44%에 해당했다.
'나도 이제 애플의 대주주가 된 셈인가?'
애플은 약소국의 작은 기업이 아닌 세계 제일의 강대국인 미국의 대기업이다. 발행주식을 기준으로 현재 주가를 곱하면 15,445,185,270(154억 4,518만)달러, 한화로 무려 17조 5302억에 달하는 기업가치를 지닌 기업이다.
그런 기업의 주식 1.4%를 쥐고 있다는 건 본인에게도 그렇고 JHJ Capital을 지켜보는 다른 시선들에도 그렇고 의미가 있었다.
자금 사정이 허락하는 선에서 애플의 주식을 계속 구입하는 행보를 보이는 JHJ Capital의 행보는 IT업계의 선두주자이자 거장인 스티븐 잡스의 이목 또한 집중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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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잡스가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는 건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펙트다.
스티븐 잡스가 천재라는 것쯤은 잡스가 남긴 발자취가 증명한다. 잡스가 만들어낸 아이폰(스마트폰)은 출시 당시만 해도 오파츠라 불리며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꿨고, 스마트폰 발명하기 전에도 아이팟 등을 개발하며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잡스는 경영 능력도 뛰어나지.'
1997년 잡스가 복귀했을 당시 애플은 썩은 사과라 불렸다. 그 누가 봐도 망하기 일보직전인 회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과거의 영광마저 잊혀지기 시작한 망하기 일보직전의 회사를 단 1년 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이룩하게 체질을 개선시켰다.
'경영 개선이란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해고된 이들은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지출을 줄이기 위한 필요성을 느꼈을 때 기업들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인건비다. 이는 자본주의의 당연한 법칙이었기에 딱히 잡스를 욕할 게 못 된다.
여유도 없는데 쓸데없는 지출을 이어가 기업이 망하게 둘 수는 없는 거잖은가.
미래를 그리는 창의력, 브랜드를 선도하는 안목, 뛰어난 결단력과 경영 능력 등 잡스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단점 또한 명확하다.
뛰어난 천재들은 공감력이 부족하고 인간관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다는 말마따나 잡스의 성향은 식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쫓겨난 뒤로 조금 성숙해졌는지 안 좋은 성격이 좀 죽긴 했지만 편집적인 성향은 여전했다.
'숙청했잖아.'
잡스가 복귀하며 이사진에게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당시 애플의 CEO 길 아멜리오 잘라내는 거였다. 잡스의 칼날은 길 아멜리오를 자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잡스는 이사회의 대부분의 멤버들로부터 사직서를 받아냈다.
기밀 유출을 막고 본인 위주로 가기 위해 정비한 거였지만 자신을 쫓아낸 이들에게 부린 복수의 칼부림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어 원하는 주식을 구매하는 건 정호준과 JHJ Capital의 마음이다. 하지만 실적과 감정싸움 등을 이유로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는 스티븐 잡스에게 의도를 전혀 읽을 수 없는 새로운 대주주의 출현은 결코 달갑게 여길 수 없었다.
특별한 호재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런데도 애플의 주식 구매를 이어가는 JHJ Capital의 행보에 작은 의심이 생겼다.
'설마 프로젝트가 누설 된 건 아니겠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게 잡스는 직원들이 언론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프레스(no-press) 정책을 제정해 정보의 누출을 강력히 통제해 왔으니까.
'한 번 만나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애플의 주식을 구매했는지, 정말 정보가 누출된 건지 떠 보기 위해서라도 정호준과 만남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