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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업계 종사자로 기술 및 노하우를 공유해주겠다는 조건이 달린 덕에 누리홈쇼핑은 10억으로 10%의 지분을 챙길 수 있었지만 JHJ Capital은 누리홈쇼핑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HJ Capital이 누리홈쇼핑처럼 노하우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JHJ에게 투자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대감이 모일 정도로 명성이 높지도 않았던 까닭에서였다.
그래서인지 첸이 제시한 조건은 매우 박했다.
- 15% 드리겠습니다.
500만 달러는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55억에 달하는 돈이다.
3.5배 이상의 덤탱이가 씌워진 것.
- 이제 막 시작하는 사업에 무려 5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겨우 15%라. 납득하기 힘드네요.
- 투자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막 시작하는 사업에 500만 달러는 분수에 맞지 않다 여겨질 정도로 큰 돈이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고가 없는 스타트업에게나 해당하는 겁니다. 푸본금융그룹에서 마음먹고 벌이는 사업인데 돈이 부족할까요?
첸은 나름의 근거를 대며 날카로운 반박으로 지분을 더 차지하려는 호준의 시도를 차단했다. 하지만 정호준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였다.
- 글쎄요? 2000년대 들어선 뒤로 대만의 경제 상황이 90년대 같지 않다는 걸 외국인인 저도 아는데, 경영진이 모를까요?
한국이 돈도, 기술도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에서 일어난 기적의 나라라면 대만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일본, 영국령 홍콩에 이어 동아시아에서 3번째로 1인당 GDP가 높았던 국가였다.
물론 이는 통계상의 수치일 뿐이고 자세히 살펴보면 국공내전에서 참패한 국민당 패잔병들과 그들을 따르는 중국 본토의 주민들이 대거 대만에 정착해 인구가 급증으로 인한 주택 부족에 시달리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산업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국공내전에서 패전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칠 때 중국 본토에서 긁어모은 금은보화들을 가져왔다. 게다가 부유층과 재산이 있는 지식인들도 재산을 챙겨 국민당과 함께 공산당을 피해 이주했기에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될 만한 자본금이나 물적 인프라, 인적 인프라까지 모두 존재했다.
오일쇼크 때문에 모두가 주춤할 때 대만도 주춤하긴 했지만 오일쇼크가 일어나기 전에도 그렇고 오일쇼크 이후 유가가 안정을 되찾은 뒤에도 그랬고 대만은 매년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나라다.
나라가 오죽 잘나갔으면 1990년대 초반에는 나라에 쌓인 외환보유고가 너무 많다고 국가가 주도해서 외화유출을 시도했을까?
쭉 황금기를 누렸으면 좋았겠지만 2000년대 들어서 대만 경제에 처음으로 큰 위기가 찾아왔다. IT버블 붕괴의 여파로 2001년 대만은 처음으로 역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만의 손해는 국내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정부의 주도하에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를 감행했으니까. 미친 IT광풍에 돈을 투자했던 대만 금융기업들은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거품이란 건 빠지기 전까지는 언제 터질지 예측이 불허한 거다. 당장 오늘 터질 수도 있고, 내년이 되도 안 터질 수도 있다. 모두가 거품이 언젠가는 터질 것을 알면서도 돈을 투자하는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워낙 기반이 튼튼한 터라 2002년부터 성장세는 다시 +로 복귀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화폐 가치 하락으로 2003년에는 한국에 1인당 GDP를 추월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로 다시 복귀한 경제성장률과는 달리 노동자들의 임금은 인상 없이 동결되었다.
- 반도체 기업들이 하나둘 도산하고 있고 지금도 어디선가 파산 위기를 겪고 있음을 푸본은 인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2003년을 기점으로 경쟁력이 부족한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이 하나둘 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도체 기업들의 도산은 2004년인 현재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 중인 상황이다. 2003년부터 근 몇 년은 대만 기업들이 바짝 얼어 있는 상황이란 거다.
- 푸본금융그룹의 도전이 성공하길 바라고 저도 홈쇼핑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판단해 투자를 감행하는 거지만 미래는 모르는 거죠. 오늘 첸씨가 이 투자 자리에 나오신 것 자체가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고 싶은 푸본금융그룹 경영진들의 생각 아닙니까?
정호준은 모모홈쇼핑의 성공을 회귀 전에 이미 확인했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푸본금융그룹의 경영진들은 모모홈쇼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아무것도 모른다.
'저 사람이 정말 19살이 맞을까?'
자넷은 사내 보유금은 있어도 경기가 나빠 얼어붙어 있는 심리를 이용해 지분협상에 나서는 정호준을 조용히 지켜봤다. 냉철한 미소를 작게 입가에 띠며 말하는 정호준의 얼굴은 냉정한 사업가의 그것이었다.
정호준과 첸은 밀고 당기며 협상을 이어갔다. 정호준은 500만 달러 투자에 대가로 20%의 지분을 주는 것으로 첸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첸이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났다 생각할 때쯤 정호준은 지금까지의 협상을 뒤엎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 만약 제가 1천만 달러를 모모홈쇼핑에 투자하면 지분은 얼마나 나눠 받을 수 있겠습니까?
1시간 가까이 이어졌던 협상의 전제 자체를 엎어버리는 정호준의 질문에 첸은 정호준의 시선에도 확인될 정도로 얼빠진 표정을 보였다.
2000년대 초중반에 천만 달러는 아무렇지 않게 써버리거나 포기할 정도로 적은 돈이 아니다. 대기업이라 불리는 기업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허락이 필요하다는 첸의 발언에 정호준은 고개를 덧붙였다.
- 제가 지분을 매도하기 전까지 제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제 지분에 대한 경영권은 상시 위임할 의사가 있다고도 전해주시죠.
*****
주인에게 허락을 맡고 돌아온 첸과 다시 지분에 대한 가격협상을 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정호준은 1천만 달러를 투자해 36%에 달하는 지분을 얻게 되었다.
처음 벌였던 협상 때보다 훨씬 정호준에게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 회장님께서 허락하신 지분은 36%까지입니다. 36%가 마지노선입니다.
36% 이상은 절대 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는 첸 때문에 정호준이 양보했다.
'얼마를 드려 지분을 샀냐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분 1%당 평단가는 정호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은 지분은 확보할 수 있는가?'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누리 홈쇼핑이 가져간 지분도 가져왔으면 좋겠네.'
정호준과 첸의 줄다리기가 끝난 뒤로 자넷과 푸본금융그룹 고문 변호사들이 계약서를 확인했다.
영문으로 적힌 표준 계약서를 한부씩 나눠 받으며 양쪽이 만족(?)하는 협상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함께 하는 사이가 됐는데, 식사라도 한 끼 함께 하시지요?
계약서 작성을 마치자 첸은 정호준과 자넷을 보며 합작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를 갖자고 제안했다.
-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요.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하시죠.
정호준은 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이 악수하며 계약서를 나눠 가졌을 때는 이미 6시 넘긴 상태였다. 7시 45분에 반드시 두 눈으로 시청해야 할 축구 경기가 있었다.
- 음식을 사 가지고 올라가죠.
식사를 할 시간이 빠듯했기에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음식을 포장해서 가는 선택지를 골랐다.
중국의 5대 향신료인 오향분를 넣은 간장에 오랜 시간 끓인 돼지고기 뱃살을 밥에 올린 덮밥 루로우판과 햄버거빵 대신 깨를 뿌린 빵에 쇠고기 패티가 아니라 돼지고기, 배추절임, 땅콩 가루를 넣은 대만식 햄버거 꽈바오, 그리고 유명 체인점에서 판매하는 샤오롱바오(만두) 사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 피곤할 텐데 같이 안 봐도 됩니다.
정호준의 어설픈 배려에 자넷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원래 스포츠는 함께 보는 거예요. 게다가 큰 돈이 걸린 경기라서 떨려서 혼자는 못 봐요.
룸서비스도 추가로 시켜 나름 파티 분위기를 만들기 무섭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승전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포르투갈에서 개최국이란 어드벤테지가 있긴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그리스가 유리하지 않나 싶습니다.
- 어째서 그렇습니까?
- 세상일이란 게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거든요. 예선에서 포르투갈에게 승리한 경험이 있는 그리스에겐 조금은 부담이 덜한 경기일 겁니다. 반대로 예선에서 진 것을 갚아주겠다고, 두 번의 행운은 없다고 포르투갈이 떠들었지만 말대로 될지 모르는 거고요.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예선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부담이 분명 있을 거거든요. 가뜩이나 결승전이라 부담이 심할 텐데 말이죠,
캐스터의 대화를 배경음 삼아 경기가 시작되었다.
- 공격은 많이 하는데, 경기력으론 그리스를 압도하고 있는데, 골은 없어요. 사실 이게 제일 나쁜 거거든요.
골은커녕 슈팅 대비 유효슈팅의 수도 적었다. 전반전 내내 포르투갈이 그리스를 압도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유효슈팅 숫자가 적다는 건 보기와는 달리 상황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어쨌건 그리스의 골문은 포르투갈에게 골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안불안하지만 그리스는 끝끝내 무실점을 이어갔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 꺄아아아악!!!!
- 골! 골입니다!!!!
- 앙겔로 바시나스가 찬 코너킥이, 정확히!! 아주 정확하게 앙겔로스 하리스테스의 머리에 맞았어요!!
후반 12(57)분. 앙겔로 바시나스 코너킥 패스를 받은 앙겔로스 하리스테스가 헤딩으로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 하리스테스 중요할 때마다 한 골씩 넣어주네요. 스페인에게도, 프랑스에게도, 포르투갈에게도 앙겔로스 하리스테스가 비수를 꽂습니다!
- 누가 제게 유로 2004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가 누구였냐고 물으면 저는 하리스테스를 꼽을 겁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선제골 먹히자 예선전 패배의 기억이 오버렙되었다.
선수들이 예선전 때 패배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챈 포르투갈 대표팀 주장 피구가 선수들을 다독였고, 후반 74, 누누 고매즈 교체로 들어와 최선을 다했지만.
그리스는 끝끝내 그들의 리드를 지켜냈다.
삑!! 삑!! 삑!!!!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호준에게 있어 회귀 전의 인생을 포함 평생 들어왔던 호루라기 소리 중 가장 큰 천둥과 같은 소리였다.
-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가 유로에서 우승할 거라고 그 어느 누가 생각했을까요?!
- 공을 둥글다는 말이 왜 존재하는지! 이번 대회를 치르는 내내 그리스가 똑똑히 보여줬습니다!! 우승까지, 우승까지 이뤄내네요.
그리스 선수들은 방방 날뛰며 껴안고 기뻐했고, 반대로 개최국인 포르투갈의 선수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카메라는 선수들을 넘어 관객석에서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그리스, 포르투갈인들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보여주었다.
'악질이네.'
본래와 똑같이 그리스는 축구 대표팀이 시작된 이후로 첫 유로 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골을 넣을 때마다 괴성을 내지르고, 매 경기 심장을 조리면서 경기를 보던 자넷은 그리스가 정말로 우승하자, 그리스가 우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TV를 보며 넋을 놓았다.
자넷처럼 넋을 놓진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마조마했던 정호준 또한 애써 기쁨을 억눌렀다.
'다 알면서도 짜릿하네.'
7월 4일은 앞으로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투자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평균 배당률 70배의 도박에 성공한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