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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사로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븐 잡스가 1986년 천만 달러를 들여 인수한 회사다.
픽사를 인수한 잡스는 정부와 의료기관에 고성능 그래픽 디자인용 컴퓨터인 픽사 이미지 컴퓨터를 판매하는 하드웨어 판매사로 사업을 시작했다.
애플에서 나왔다고 잡스의 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기에 기술력에 대한 찬사는 많이 받았지만, 이미지 컴퓨터는 잡스와 픽사의 경영진이 기대했던 것만큼 잘 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매출이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회사가 재정 위기를 겪게 되는 건 해가 동쪽으로 뜨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 이유로 픽사는 적자를 줄이고 자금 마련을 위해 타회사로부터 컴퓨터 애니메이션 광고 제작을 의뢰 받아 수행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디즈니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디즈니의 CAPS(컴퓨터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미래에 대한 투자를 진행했고.
시간이 지난 뒤 픽사는 개발된 CAPS 기술을 이용해 애니메이션 영화를 촬영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다 만들어진 영화 토이 스토리는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수익을 벌어 들이며 큰 성공을 거뒀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들도 실패 없이 순조롭게 수익을 냈다.
잡스가 인수한 뒤 제작된 영화(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는 모두 들인 제작비(홍보비 포함)보다 최소 3배는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스티븐 잡스는 쫓겨난 게 자신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픽사의 성공으로 증명해낸 셈이다. 몬스터 주식회사와 니모를 찾아서는 잡스가 다시 애플로 복귀한 뒤에 제작된 영화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또한 자신이 없어도 별 지장 없이 운영될 토대를 마련해 냈다는 게 대단한 거다.
자넷과 함께 픽사의 본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의 작은 도시 에머리빌로 이동한 정호준은 픽사 본사가 있는 건물에 발을 디뎠다.
- 2시에 미팅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정호준이 나서기 전에 자넷이 알아서 먼저 나서서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용건을 이야기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넷보다 조금 앳된 외모의 여성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마중을 나왔다. 그녀의 인도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내리며 픽사의 건물 내 회의실로 이동했다.
이제 막 40대가 된 듯 보이는 건강한 체구의 남성은 정호준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곤 보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웃으며 정호준과 자넷을 맞이했다.
-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크레더블의 제작을 맡게 된 감독, 브래드 버트입니다.
- SSL Capital 고문변호사, 릴리 자넷입니다.
- SSL Capital의 CEO. 호준 정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호준을 어린 나이에 운 좋게 큰 돈을 얻게 된 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건만 브래드 버트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호의적인 태도, 정확히는 호의를 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정호준은 브래드 버트의 심리를 읽었다.
'간절하구나.'
자넷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인크레더블의 작가(원안, 각본), 감독을 맡은 브래드 버트 감독은 상업화에 실패한 커리어를 가진 감독이었다.
전작이자 버트 감독이 감독을 맡은 첫 작품, 아이언 자이언트는 제작비로 무려 7,500만 달러를 사용했다. 개봉 당시 환율인 1,220원으로 계산하면 영화를 제작하는데 제작비로만 915억 이상을 쓴 거였다.
큰 돈을 제작비로 들였어도 성공했다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실패했지.'
915억이 넘는 돈을 들이고 벌어 들인 수익이 고작 382억에 불과했다는 게 문제였다. 본전은커녕 약 3분의 1만 겨우 건져냈으니 영화 투자자나 영화 제작사가 달갑게 여길 리 없다.
그럼에도 브래드 버트 감독이 픽사라는 제작사로 이직 할 수 있었던 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작품성 자체는 높게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작품성이 좋다고 밥을 먹여주고 돈을 벌어다 주는 건 아니었기에 투자자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돈도 못 벌어다 주는데 자기들 돈 갖다가 예술성만 높이는 걸 투자자 중 누가 좋아할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실패한 당사자인 브래드 버트 감독이 그렇게 말해 봐야.
그 말을 믿는 투자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실패를 경험했으면서 두 번을 약속 받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다.
픽사에서 대본을 만지고 수렴해서 찍으면 또 모르겠는데, 버트 감독은 이직하기 전에 엎어졌던 자신의 시나리오를 가져와서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우겼다.
'하나에 꽂히면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술가 특유의 예술기질이 발동한 거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했다. 회귀 전 박기태를 통해 몇몇 사례를 주워들었기에 정호준은 버트 감독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도 다 이해가 갔다.
픽사에서 검토하고 어느 정도 승산이 있겠다 싶어서 투자자를 모집했겠지만 제 돈을 투자하는 이들이 껄끄러운 것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피라미에 불과한 정호준의 SSL Capital이 픽사가 제작할 영화에 투자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된 배경이었다.
- 투자 설명은 따로 듣지 않겠습니다. 시놉시스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저는 이미 영화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호준은 악수를 마치고 투자 설명을 시작하려는 브래드 버트 감독을 보곤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투자 설명을 하는 시간도 아깝다.'
브래드 버트 감독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거물 투자자가 투자하겠다고 연락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세상일에 100%는 없는 거다.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피라미에 불과한 정호준은 곧바로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예의 없고, 무례하다고 따져 봐야 뭐하겠는가?
정호준의 비난은 운 좋은 동양인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확률이 다분했다.
- 투자 방식은 어떤 것을 고려 중이십니까?
- 리스크 부담하고 이익도 나눠 갖겠습니다.
- 투자금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정호준의 되물음에 버트 감독은 혼자 끙끙 앓았다.
'얼마쯤 부르면 될까?'와 같은 소심한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버트 감독보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담당자의 대답이 더 빨랐다.
- 'Incredible.'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제작비는 8,600만 달러로, 5,500만 달러를 투자받았습니다.
담당자의 제작비 언급을 확실하게 들은 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정호준은 곧장 말을 받았다.
- 그런가요? 그럼 남은 3,100만 달러 내가 모두 투자하겠습니다.
SSL Capital 자본금의 75% 이상을 단숨에 쏟아붓는 자넷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런데 정호준의 결정에 눈동자가 커진 건 자넷만이 아니었다. 버튼 감독과 그 옆에 앉은 담당자의 눈동자까지 잠깐이지만 커졌다 작아졌다.
- 3,100만 달러 모두 말입니까?
- 예!
브래드 버트 감독의 되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하는 정호준을 보며 자넷은 생각했다.
'정말 이 사람은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돈이 돈으로 안 느껴지나? 자기가 말한 금액이 얼마나 큰 돈인지 모르는 건가?'
설마 했다.
네바주에서 말로는 그렇게 말했어도 정말 다 투자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투자를 감행하는 정호준의 행보에 경악했지만 출발하기 전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따지지는 않았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여 오너인 정호준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 아이언 자이언트 팬입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작품성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실패는 성공에 어머니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번에는 흥행성도 잡으면서 완벽하게 성공해주십시오. 감독님의 역량을 믿습니다.
- 감사합니다. 반드시, 반드시 좋은 영화로 보답하겠습니다.
정호준이 뱉은 말은 입에 발린 찬사에 불과했지만 심적으로 고생한 브래드 퍼트는 정호준의 격려에 눈을 글썽였다.
'어, 아저씨가 우는 건 질색이라고.'
*****
그냥 그대로 두면 아저씨가 우는 걸 보게 될 것만 같아서 정호준은 계약서 작성을 마치고 자넷과 함께 빨리 빠져나왔다.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자넷은 정호준을 보며 물었다.
- Mr. Jung은 이 영화가 성공할 거라고 믿나요?
- 물론이죠. 실패할 거라 생각하면 그 돈을 왜 투자하겠어요.
당연하다는 듯 확신에 찬 대답을 뱉으며 앞서 걸어가는 정호준을 천천히 따라가며 자넷은 정호준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대체 무엇을 보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큰돈을 투자하는데 망설이지 않는, 결단력 있는 모습이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 준결승에 진출했지.'
6월 25일에 펼쳐진 유로 8강전 경기에서 그리스는 프랑스를 상대로 후반전 20(65)분 앞서가는 선제골을 넣었다. 그리고 리드를 잘 지켜 1:0으로 프랑스에게도 승리를 거두었다.
[또 한번의 기적을 일으킨 그리스. 유로 2004 폭풍의 핵이 되다.]
준결승전 상대는 덴마크를 3:0으로 꺾은 체코였지만 덴마크가 프랑스보다 강한 팀은 아니란 분석을 찾아봤기에 자넷은 4강전도 할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베팅에 성공하는 거 아냐?'
그리스가 앞으로 딱 두 번만 이기면 우승자를 맞추는 베팅도 성공한 게 된다. 수령 받은 메가밀리언 당첨금의 몇 배나 되는 돈이 계좌로 입금될 거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만약 그리스가 우승해 베팅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까?'
정말 정호준이 장담한 대로 이 영화가 성공할지도 궁금해졌다.
*****
항공기를 타고 네바다주로 복귀한 정호준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넷에게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 남은 900만 달러는 전부 애플에 투자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매입해주십시오. 증권사와 협력해서 기술적으로 매입해주세요.
구글에도 투자하고 싶었지만 정호준이 회귀를 했어도 없는 것에 투자하는 건 불가능했다.
2004년 6월은 아직 구글이 상장되기 전이었다.
'구글이 상장한다는 날이 8월이었지?'
유로파 결승전이 치러지는 날은 7월 4일 일요일이다. 한 달 내로 베당금이 입금될 테니 투자할 자본은 충분했다. 상장일까지 얼추 맞출 수 있으리라.
- 이른 시일 내로 대만으로 갈 겁니다. 자넷씨 것까지 비자 발급해주세요. 그리고 큰일 마쳤으니 이틀 쉬세요.
정호준은 자넷이 자신을 보며 주먹을 꽉 쥐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그러려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