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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개막으로부터 4일 뒤인 6월 16일 오후 17시. 그리스의 2차전이 열렸다.
그리스의 상대는 유럽의 축구 강국 하면 떠오르는 나라 중 하나인 스페인이었다.
개최국인 포르투갈에 승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혹시 모른다.'란 생각을 품었던 자넷은 그 경기를 보며 '역시 어렵겠다.'란 생각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게 전반 28분, 라울 곤질레스의 힐패스를 받은 페르난도 모르테스가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경기력도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스페인이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만 안 나왔을 뿐 스페인이 압도한 게 맞았고 말이다.
1실점으로 전반전을 마친 게 기적이라 평가될 정도였다.
- 제발, 제발.
이제 계란 한판이 된, 한국 나이론 서른 하나나 먹은 여자가 소녀처럼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로 TV를 시청하는 자넷의 모습이 안 어울렸지만 은근 귀엽긴 했다.
고오올~!!
신이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후반 15(60)분. 그리스 스트라이커 앙겔로스 하리스테스에게 절묘한 롱패스가 당도했고 하리스테스는 놓치지 않고 골로 연결시켰다.
- 꺄아악!! 꺄아악!!
다시 한번 기뻐하는 자넷의 고성이 호텔방에 울려 퍼졌다.
동점골을 먹힌 뒤 스페인은 역전골을 넣기 위해 뛰어다니며 위협적인 장면을 자주 만들어냈지만 골결정력 부족으로 경기는 1 대 1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그리스는 줄곧 밀리는 모습을 보이며 경고까지 5장이나 받았지만 어쨌든 실점하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냈고 결국 스페인과 무승부을 쟁취해냈다.
[그리스 8강 진출 유력. 이제는 1위 진출을 노린다?]
[다크호스 그리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1위로 진출할 것인가?]
강호 스페인과의 경기를 무승부로 이끌어내며 또 한 번의 이변을 만들어낸 그리스는 2패로 최약체가 돼버린 러시아와의 경기만을 남겨두며 8강 진출이 유력하단 평가를 받았다.
같은 날 치러져도 시간 때가 조금은 달랐던 1차전, 2차전과 달리 3차전은 포르투갈의 시각으로 7시 45분 동시 시작했다.
고오올!!
그리스가 이길 거라 예상하고 기대하며 경기를 봤지만 세상에 쉽게 가는 일은 없다는 걸 알려주듯 3차전은 충격적이었다. 뚜껑을 열고 보니, 스페인에 1:0으로 포르투갈에게는 2:0으로 완패했던 러시아가 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2분 만에 선제골을 넣으며 리드를 잡았다.
추가골입니다!!
15분 뒤인 전반 17분에 추가골을 넣으며 2 대 0으로 리드폭을 늘렸다.
완전히 말린 그리스의 모습에 자넷이 고개를 돌려 정호준을 보며 물었다.
- 이대로 그리스가 러시아한테 지면 어떻게 되는 거죠?
- 포르투갈과 스페인 경기에 따라 달라지겠네요. 스페인이 이기거나 비기면 승점 차이나 승자승 원칙으로 포르투갈이 탈락할 겁니다.
승자승 원칙이란 두 팀의 승점이 같을 때 상대에게 승리를 따낸 팀이 올라가는 규칙이었다.
- 하지만 포르투갈이 승리하면 따져봐야 할 게 많아질 것 같네요.
정호준의 대답을 들은 자넷은 다시 한번 양손을 부여잡고 간절한 시선으로 TV를 쳐다봤다.
'냉철한 이성을 필요한 직종군에서 일했으면서 의외로 소녀 같네.'
그녀의 기도가 통한 걸까?
후반 3(48)분 그리스 대표팀 선수 지시스 브리스의 만회골이 터졌다.
하지만 지시스 브리스의 만회골이 터지기 무섭게 0:0으로 비기는 중이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경기에도 변동이 생겼다.
후반 12(57)분 누누 고매즈의 선제골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중계하는 앵커들은 실시간으로 그 사실을 알리며 좀 더 분발해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선수들에게 닿을 리가 없다.
선수들이 땀 흘려 뛰며 애썼지만 두 경기장에서 펼쳐진 A조 경기는 1:0, 2:1이란 결과로 막을 내렸다.
-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 앵커들이 설명해주겠죠. 저쪽 경기도 끝났잖아요?
포르투갈 2승 0무 1패. 승점 6점. 득점 4점, 실점 2점. 득실차 +2.
포르투갈은 A조 1등으로 8강에 진출했다. 관심이 쏠린 건 패배하는 바람에 승점이 같아진 그리스와 스페인이었다.
그리스 1승 1무 1패. 승점 4점. 득점 4점, 실점 4점. 득실차 0
스페인 1승 1무 1패. 승점 4점. 득점 2점, 실점 2점. 득실차 0
승점은 물론이고 득실차까지 똑같은 그리스와 스페인이었지만 8강에는 그리스가 올라가게 되었다. 승점, 득실 차가 모두 같고 서로 간의 경기가 1 대 1 무승부로 끝나 승자승 원칙으로도 진출팀을 가리기 힘든 상황임에도 그리스가 8강에 진출했다.
이유는 바로 다득점에 있었다.
실점을 많이 해서 득실 차가 없더라도 득점을 많이 했다는 것을 플러스요인으로 쳐줬다.
'정말 그리스가 우승하는 거 아닐까?'
결승전 포함 앞으로 세 번만 더 이기면 된다는 사실에 자넷의 마음속에선 다시 한번 기대감이 싹텄다.
*****
그리스가 기적적으로 8강 진출에 성공한 다음 날인 6월 21일. 정호준은 자넷과 경호원 둘, 그리고 회계사를 대동해 워싱턴주 복권국에 들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행정상의 절차가 드디어 모두 끝난 것.
회계사가 정호준에게 계산해주었던 수령액. 51,863,000달러가 딱 맞게 입금되었다.
- 백만장자가 된 걸 축하해요. Mr. Jung.
- 축하드립니다.
자넷의 축하 인사를 시작으로 회계사와 경호원들까지 정호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 고맙습니다.
정호준도 웃으면서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굴러들어 온 행운에 기뻐하면서도 경각심을 갖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국과 한국에 당첨 사실이 알려진 정호준은 삐죽 튀어나온 모난돌이나 다름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도 튀어나온 모난돌은 언제나 정을 맞기 마련이다.
*****
정호준은 워싱턴주 복권국에서 입금한 당첨금에서 생활비로 사용할 자투리 863,000달러를 제외한 11,000,000달러(천백만 달러)를 JHJ LLC에 입금했다.
그리고 남은 4천만 달러로 새로운 투자 법인, 정확히는 또 하나의 유한책임회사를 세웠다.
- 근데 SSL은 무슨 의미로 붙인 거죠? JHJ는 Mr. Jung의 풀네임의 앞 글자를 딴 거라 이해했는데 SSL은 잘 모르겠네요.
본디 이름이란 건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전속 변호사로서 까라면 까는 게 맞았기에 정호준이 부탁한 대로 일 처리를 마쳤지만 속으로 의미를 궁금해했던 자넷은 정호준을 보며 물었다.
- Succesful Second Life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겁니다. 미국인들은 메가밀리언이나 파워볼의 당첨을 두 번째 인생(기회)의 시작이라 여긴다고 주워 들었거든요. 메가밀리언이 만들어준 두 번째 인생, 미국인으로서의 내 두 번째 인생이 성공적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담은 세 글자에요.
정호준의 그럴듯한 설명에 자넷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정호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회귀로 얻은 두 번째 삶이 성공적이길 바라는 의미도 담겼지만요.'
결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한 마디를 속으로 삼키며 자넷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동했다.
*****
주식, 사업 등 돈을 불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개중에 주식과 관련해서 정호준이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았다.
2004년 정호준은 한참 군대에서 구르며 삽질을 이어간 불행한 사고를 겪은 한 명의 시민에 불과했다. 전역한 후에도 정호준은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빴고.
'언제 주식이 올랐고 언제 내려간다.'와 같은 이런 전문성 있는 지식은 그쪽 업계에서 일하거나 주식 투자를 부업 삼아 했어도 심도 있게 파고든 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정호준은 심도 있게 파고든 이가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건 손대지 않는다.'
세상에는 돈이 된다고 말해도 자신이 모르는 것, 확신이 없는 일엔 절대 손대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 있었고 정호준 또한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회귀 전의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란 오성전자에 더 많은 돈을 넣어둔 거다.
그런 이유로 정호준이 알고 있는 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테마주들과 주가조작, 그리고 LS화학, 코코아, 한국약품 같은 오른 폭이 큰 급등주, 그리고 시간을 두고 꾸준히 오르긴 했지만 쭉 성장을 이어갔던 본인이 돈을 투자했던 LS생활건강에 대한 정보가 전부였다.
한국 주식도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판국에 본인의 나라도 아닌 미국 주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굳이 본인의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정호준이 선택할 수 있는 투자처는 몇 개 되지 않았다.
- 자넷씨. 할리우드에 좀 다녀와 주세요. 쭉 돌면서 투자를 원하는 시나리오 좀 모아주세요.
-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요? 숨 돌릴 시간은 좀 줘야죠!
업무는 업무대로 보고 공부는 공부대로 가르쳐야 하는 일정을 매일 이어가고 있는 자신에게 이제는 다시 출장 가라는 지시를 내리는 정호준의 말에 자넷이 폭발했다. 계약기간을 정해두었고 로펌처럼 반드시 해내야 하는 할당량이 없어 해고당할 일이 없어 심적 부담은 줄었지만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워라벨 좀 챙기며 일하려고 4년 정도 더 경력을 쌓으면 노려볼 수 있는 '파트너 변호사' 자리를 포기하고 나왔는데 몸은 로펌에서 일할 때보다 더 고단한 거 같다.
- 미안합니다. 하지만 자넷씨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저 혼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요. 업무량이 많아 힘드시면 이번 일 마치고 사람을 데려오셔도 됩니다.
분노를 폭발시켜 하고 싶은 말은 다 내뱉은 자넷은 정호준이 사과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자 화내서 미안하다 사과했고, 사과를 마친 뒤 정호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돈을 벌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거다. 성공할 기업을 찾는 게 사막에서 다이아몬드나 바늘을 찾는 행위만큼 어렵긴 했지만, 제대로 된 원석만 찾아낸다면 그 어떤 주식에 투자한 것보다도 큰 수익률이 보장되었다.
회귀 덕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있어 원석을 발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래에 높은 명성을 구가하던 기업들은 눈과 귀에 익었다.
"곤란하네."
문제는 2020년대 유명한 기업들은 아직 창업조차 안 했거나 끼어들기엔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대다수라는데 있었다.
아직 창업조차 안 한 트위터 창업자들에게 접근해서 투자할 테니 제품을 만들라 할 수도 없었고.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와 같은 기업들은 정호준이 끼어들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다.
만약 호준이 가진 자금의 크기가 컸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까.
결국 만만한 게 영화 투자였다.
하지만 영화투자조차도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 슈렉이나, 스파이더맨, 해리포터 같은 영화는 목록에 없네요.
- 성공이 보장된 시리즈물에 명성이 없는 피라미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끼어들겠어요? 이게 최선이에요.
- 네, 고생했어요.
정호준이 세운 투자회사는 소설이나 만화가 거대한 성공을 거둬 영화화된 작품이나 전작이 성공을 거둔 시리즈물에 투자할 깜냥이 되지 않았다.
정호준은 자넷이 챙겨온 시놉시스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리고 그중 눈에 익숙한 제목을 몇 개 발견했다.
눈에 익은 것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시놉시스를 꺼내며 물었다.
'Incredible!'
- '픽사'가 제작하는 건데, 우리가 투자를 할 수 있나요?
- 이전에 한 번 제작이 엎어졌던 시나리오라서 투자자를 구하는 게 어렵다네요.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인가 보다. 미국 투자자들도 한 번 엎어진 대본을 껄끄럽게 여기는 걸 보면 정호준에겐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짓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 여기에 투자하죠.
- 얼마나 투자하실 생각이신데요?
- 가능하다면 전부!
- Mr. Jung!
전부 쏟아붓겠다는 정호준의 발언에 자넷이 인상을 찡그리며 정호준을 만류했지만.
그녀의 만류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