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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주와 한국의 시차는 약 17시간. 한국의 시계가 워싱턴주의 시계보다 약 17시간 빠르게 흘러간다.
정호준이 변호사와 회계사를 동반해 복권국을 방문한 건 약 오후 3시경으로 아직 주 5일 근무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지 않은 한국의 직장인들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 저마다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무리엔 당연히 언론사에 출근한 기자들도 포함돼 있었고 말이다.
변호사와 회계사를 동반해 복권국으로 찾아간 정호준의 소식이 미국 언론에 의해 알려지자마자 기자들은 미국인에 맞춰 적힌 기사의 단위만 조금씩 수정해 기사를 올렸다.
[1억 1950만달러. 한화로 1374억 2500만원에 달하는 당첨금의 주인공 정씨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이었다?]
[1374억 잭팟의 당첨자 서울대 신입생?]
정호준의 신원 정보는 어떻게 파악했는지, 나이와 이름만 밝혀졌던 호준의 다른 정보들도 하나하나 언론에 의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 부럽다. 얘는 인생 완전히 폈네.
⌎ 그 돈에서 2%만 줘도 주인님으로 평생 모실 생각이 있는데. 연락주세요!
⌎ re: 돈에 자존심을 파냐? ㅋㅋ. 저는 1%만 주셔도 개처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뭐냐, 부럽게. 얜 다 가졌네. 다 가졌어. 생긴 것도 취향을 떠나 괜찮게 생긴 것 같은데, 학력도 좋고, 이젠 돈까지 생겼네. 진짜 인생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 로또 당첨금의 몇 배를 수령하는 거냐? 로또에 10번 당첨된 것보다 많을 것 같은데?
⌎ re: 아냐. 저걸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안 돼. 일시수령을 선택하면 저 돈 다 못 받음. 세금 떼면 저거 반도 못 가져갈걸? 기껏해야 45% 아닐까?
⌎ re: 윗분 헛소리하시네. 45%를 건져도 400억은 넘을 텐데. 400억이 작냐? 400억은커녕 4억만 줘도 감지덕지 아냐?
⌎ re: ㅋㅋㅋ 놔둬요. 배 아파 죽을 만큼 부러운데 티 안 내려고 애써 부정하는 거잖음.
부러워 하는 반응, 대리만족하는 반응, 배 아파 하는 반응 등 반응은 다양했다.
8시나 9시 뉴스. 가장 많은 시청률이 집중되는 시간대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 외 시간대의 공중파 뉴스와 케이블 채널의 경제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정호준의 당첨 사실을 알렸다.
강현태 변호사와 조규석 부장검사가 장희팔을 검거해 다단계 사기에 대해 알렸을 때만큼 시끄럽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못 미치는 건 아닐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세금을 떼더라도 수백억은 수령할 게 분명했기에 정호준에 대한 정보는 갱신에 갱신을 거듭 이어갔다. 인터넷 뉴스, 신문, 뉴스 방송 등에 언론사 타이틀에 힘겹게 포함될 3류 찌라시 회사마저도 정모씨란 가칭으로 정호준의 당첨 사실을 다뤘다.
*****
사진을 찍고 동반했던 변호사와 회계사를 통해 법적절차를 마친 정호준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당첨금 수령까지 오래 걸리면 1달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단다.
'액수가 액수여서일까? 당첨금 수령에도 시간이 걸리는구나.'
세금 제할 것을 모두 제하면 돈이 얼마나 남을지 알려주기 위해 회계사와 변호사는 정호준의 호텔방까지 따라왔다.
"좀 늦었네? 우리 아빠한테 연락 왔었어.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는대서."
당장 신경을 곤두세우며 처리할 게 많아 무음모드로 바꿔놔서 전화가 왔다는 인식을 못했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해보니 어마어마한 수의 부재중 통화기록이 떠 있었다.
- 부재중 전화 62건.
지인인 박기태나 박남정이 남긴 통화기록을 시작으로 강현태 변호사, 그리고 학생회 임원 전원, 교수에게까지 연락이 와 있었다. 29건 정도가 핸드폰에 등록되어 있는 번호로 온 부재중 통화였다.
나머지 33건은 정호준의 핸드폰에 번호가 저장되지 않은 모르는 연락처에서 온 전화였다.
"아빠 말로는 호준이 너 지금 한국에서 유명인 다 됐다던데? 네 당첨 소식을 안 다룬 채널이 없데."
"하아~, 그런 것 같네,"
박기태의 말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곤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헐, 이게 뭔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지? 전화 또 오는데?"
"받지 마."
'돈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야지.'라 생각하면서도 신원 정보가 모두 탄로 난 지금 상황이 달갑진 않았다. 그렇기에 박기태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다시피 건네받아 아예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허락도 없이 정보를 캐냈는데, 뺑이 좀 쳐야지.'
종료를 누르지 않고 배터리를 빼면 핸드폰 통화 연결은 계속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엿을 먹인 정호준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보며 물었다.
- 변호사님, 회계사님. 제할 거 다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나요?
- 51,863,000달러(5,186만 3천 달러) 정도 남을 겁니다.
자넷 변호사보다 해리슨 회계사가 먼저 대답해주었다. 변호사보단 회계사의 계산 속도가 더 빠른가 보다.
- 제가 받은 당첨금은 1억 1,950만 달러인데, 그렇게나 줄어드나요?
- 아까 함께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국적을 떠나 당첨금 일시수령을 선택하면, 전체 상금의 62%밖에 수령하질 못합니다."
- 거기에 고객님께서 미국의 국적을 지닌 시민권자나 영주권을 받지 않은 외국인이시다 보니 25%만 지급하면 됐을 연방세를 30%나 지급하게 됐습니다.
복권국 지급 규정에 따라 일괄 지급받은 까닭에 상금의 62% 74,090,000달러를 받게 됐는데, 7,409만 달러에서 다시 30%의 세금을 가져간 거다.
- 만약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복권에 대한 주세가 있는 지역이었다면 주세까지 내셔야 했을 겁니다.
- 그렇습니까?
- 예, 받으실 몫이 수십억은 더 줄으셨을 겁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불로소득 수백억을 벌어 놓고도 정호준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배어있었다. 1,374억이 600억 못 되는 돈 5,186만 달러로 줄어든 까닭에서였다.
이래서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거라고 하나 보다.
- 한 가지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미국의 시민권이나 영주권 취득을 원하면 언제까지 얻을 수 있을까요?
"뭐? 미국 국적을 갖겠다고? 호준이 너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호준처럼 듣고 말하는 게 수월하지는 못해도 대충 알아들을 정도의 능력은 있던 터라 박기태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호준은 박기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자넷 변호사를 바라봤다.
- LLC(유한책임회사) 설립해 미국 스타트업에 200만 달러 정도 투자 중이기도 합니다.
- 이미 LLC를 설립해서 투자 중이시라니, 좋네요. 정확하게 딱 얼마가 걸린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의뢰인님께서 생각하신 것보다는 더 이른 시일 내에 나올 겁니다. 투자이민의 최저 커트라인이 90만 달러 정도인데... 의뢰인님은 200만 달러를 투자하신 상태잖아요?
- 잭팟의 주인이시기도 하고요. 5,186만 달러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5,186만 달러는 한화로 570억 4930만원에 달하는 돈이다. 국방비에만 천조를 쏟아붓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예산 규모를 생각하면 0.001%에도 못 미치는 적은 규모의 액수지만 그 어떤 나라도 자국민의 돈 수백억이 타국으로 빠져나가는 걸 달가워할 리 없다.
- 영주권을 얻고 싶다고 하셨죠? 원하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 글쎄요?
- 워싱턴주가 부자에겐 주세가 높게 부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중산층에게는 세금 비중이 꽤 높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라고 추천하긴 좀 그렇습니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적게 내고 싶으시면 텍사스주나 네바다주를 추천합니다.
-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했으면 합니다.
- 예, 그렇게 하시죠. 그럼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밝히고 싶지 않았던 정체가 언론을 통해 모두 알려진 상황이다. 이대로 한국에 귀국하면 최소 1년 이상은 시달리리라.
'어쩌면 더 오래 갈 수도 있고.'
돈은 그저 돈일 뿐 선도 악도 아니고 국적도 없다는 말이 있다. 정호준은 전자에는 동의했지만 후자는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돈에는 국적이 존재해.'
같은 액수의 자산을 굴려도 국적에 따라 무게감이 달라진다. 한국법인이 굴리는 1조와 미국법인이 굴리는 1조는 똑같은 액수여도 투자를 받는 입장에서 갖게 될 압박감이 달랐다.
대한민국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지 않은가.
정호준이 가진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미국 국적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줄 거다.
'좋은 핑곗거리가 여럿 생겼네.'
자신의 동의도 없이 개인정보를 다 드러내 사생활을 침해했다. 게다가 태어난 나라는 한국이지만 그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준 것은 미국이다. 미국에서 준 돈인데 미국에서 사용하는 게 올바른 것 아니겠는가?
'한국 네티즌들이 한 번씩 국뽕이 심하다 심하다 비난 받곤 했지만, 미국인들이 미국에 갖는 마음 만큼은 아니다.'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면 한국 반응은 몰라도 미국인들의 마음은 사로잡기 충분할 것이다. 한국 여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긴 한다.
잘 풀리면 욕 좀 먹다 말 수도 있지만 악화되면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으며 평생 욕을 먹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세계적인 사람이 된다면?'
배신자라고 끝까지 욕을 먹더라도 본인이 수조를 굴리는 투자자로 성장한다면 그땐 태도가 변할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했다.
정호준이 한국 경제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면 면죄부가 주어지리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특히나 더 큰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거고. 말이다
자넷 변호사와 해리슨 회계사는 이름 있는 경호회사에서 경호원 파견을 요청했다는 말을 끝으로 호텔방을 나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미국인으로 살려고?"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박기태는 복잡한 얼굴 표정을 한 채 정호준에게 물었다.
"일단은 그러려고. 한국 들어가면 불편하게 살 게 뻔하니까. 기부단체의 연락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나한테 접근하고 귀찮게 굴 거야. 기태 너도 알잖아.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받아주며 살만큼 내 성격이 좋지 않은 걸.."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넘겼다.
"기왕 큰 돈을 얻게 됐으니, 사업을 해보고 싶어."
그냥 적당히 돈 많은 졸부로 살 거면 대한민국 국적이 더 편했을 거다. 돈이 있다는 전제가 붙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없었으니까.
이런 큰 행운까지 알아서 굴러들어 온 이상 정호준은 적당적당하게 살 생각을 버렸다.
'기회가 왔는데 활용하지 않는 건 죄악이다.'
돈을 굴리고 사업을 키우는 데는 미국 국적이 더 유용하리라.
'차별이 걱정되긴 하지만.'
인종차별로 유명한 미국이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다. 정호준은 돈을 갖고 있었으니까.
돈이 있으면 정호준이 그들이 은연중에 무시하는 동양인이어도 사람답게, 아니 잘살 수 있게 해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