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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34화 (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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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고 양지고 구별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군대와 정‧재계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은 금융사기로 혐의로 구속되어 입증되면 100년 이상의 형량을 두들겨 맞는다.

금융사기와 관련해서 그 어떤 국가보다도 단호한 미국의 법을 듣거나 배워 알고 있는 이들은 재판부가 너무 약하게 처벌한 게 아니냐고, 좀 더 가혹할 필요가 있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대중은 대체로 재판부의 판결에 만족했다.

- 무기징역을 받지 않은 게 조금 아쉽긴 한데, 뭐 이 정도면 괜찮네.

- 25년이면 무기징역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재판을 받을 당시 장희팔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마흔여덟,

생일이 지나 만으로는 마흔일곱이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지만 적은 나이가 아닌 만큼 형을 마치기도 전에 죽을 가능성도 높다.

돈이 해외로 빼돌려지기 전에 잡혀 물질적인 피해가 전무한 터라 가족도 없는 곳에 갇혀 자유를 잃은 채 25년 동안 쓸쓸하게 늙어가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는 의견이 꽤 많았다.

인권단체에서 맨날 이야기하곤 하는 범죄자의 인권과 측은지심도 발동했으리라.

'절대 승복하지 않고 재심을 청구하겠지.'

돈이 있던 없던 장희팔 같은 인간이 1심에 승복할 리 없으니 분명 재심을 청구할 거다.

25년 형량이 확정적인 건 아니란 것.

'재심이 항상 형량을 줄여주는 건 아니지.'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형량이 늘어나기도 한다. 정호준이 판단하기에 장희팔이 재심을 신청한다고 형량이 줄어들 것 같진 않았다.

'늘어나면 늘어났지.'

그도 그럴게.

'돈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결과가 나오겠어.'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말하지만 법은 약자의 편일 때보다 가진 게 많은 강자의 편일 때가 더 많다.

'괘씸죄가 추가되지 않을까?'

가뜩이나 국민들의 시선이 재판부가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에 집중되어 있어 부담스러웠던 상황에 국민들이 간신히 판결을 납득해주었는데, 인맥도 돈도 아무것도 없는 장희팔이 재심을 청구해 또다시 국민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재판부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이보다 고역스러운 상황은 몇 되지 않았다. 재심으로 다시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압박 받는 걸 재판부에 소속된 이중 누가 달가워하겠는가?

공명정대하다고 소문난 판사도 사람이었고 재판부 또한 그런 사람이 모인 집단이었다. 판결에 감정이 실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래저래 재심은 자기의 무덤을 더 깊숙이 파는 꼴이 될 확률이 다분하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금융사기를 막아낸 정호준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 하니.

"호준아 파전 하나 추가."

"예."

경영학과에서 운영하는 주점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

MT, 중간고사와 같은 행사가 끝난 5월. 한국에서 가장 놀기 좋은 날씨가 한창일 이 시기 대학가는 축제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아무리 한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서울대라도 대학교란 이름을 붙이고 있는 이상 이런 당연한 흐름으로부터 비켜나갈 수 없었다.

정호준이 소속된 경영학과도 경영학과 학생회의 주관하에 축제 준비가 시작되었다.

전공 수업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조교나 학생회 임원이 들러 1학년들에게 소집을 알렸다. 어느 대학이건 써먹기 좋은 건 언제나 1학년이었으니까. 서울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단 바쁜데도 학생회의 요청에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다."

서울대 경영학과 학생회 회장 정일승은 앉아 있는 1학년들에게 인사치레를 건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째 주에 축제 시작하는 거 알고 있지? 우리 학과에선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점을 낼 생각이다."

"혹시, 자기가 요리 좀 한다 싶은 사람. 거수."

"교수님들께서도 지켜보고 계시니까 빼지 말고 참여하자."

정일승 학생회장의 말에 임원들이 지원사격을 덧붙였다.

"이름이?"

"04학번, 정호준입니다."

OT도 빠지고 MT도 빠지고 행사란 행사는 모두 빠져 아싸 지수를 높일 대로 높인 터라 조금은 만회해보고자 했던 정호준은 손을 들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제일 멍청한 짓이었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손을 들었던 자신의 손목을 분질러버렸을 거다.

"호준아 네가 고생이 많다. 작년이랑 달리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해. 교수님께서도 저녁에 잠깐 들리시겠다는데?"

학생회 하는 이들과 친분이 조금 생긴 건 사실이다. 주점 준비를 하며 오다가다 이야기를 나눴고 동고동락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진짜배기들, 축제를 즐기는 인싸 지수가 높은 이들은 학교에 없었다.

축제 중인 본인들의 학교, 서울대학교를 놔둔 채로 다른 대학교에 가서 놀았다.

'괜히 사서 고생하고 바보가 됐네.'

매년 재미 삼아 불리는 서울대학교 3대 바보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게 서울대 축제에 참가하는 학생이란 걸 정호준은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

사람들이 군대에 가는 지인에게 중간만 하라 말하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회사에선 일 잘하면 성과금이란 이름의 금일봉과 빠른 승진이란 대가라도 받지 군대는 그런 반대급부가 없기 떄문이다.

'잘하면 휴가를 더 받긴 하지만.'

귀순자나 땅굴 같은 공로를 세우지 않는 이상 아무리 잘해도 남들보다 10일. 정말 많아 봐야 15일 정도 더 많이 받는 게 전부였다.

물론 군대에서 남들보다 15일을 더 사바에 나와 있을 수 있는 게 결코 작은 혜택은 아니지만. 잘한다고 이것저것 다 짬 때리는 상황이 군 생활 내내 이어질 걸 생각하면 무엇이 낫다고 확신을 갖고 말하긴 힘들었다.

그저 하나 확실한 건.

'내가 미쳤지, 미쳤어.'

괜히 열심히 했다가, 아니 잘했다가 저번보다 음식 맛이 훨씬 좋다고 붙잡혀서 일만 하고 있다는 거다. 다른 동기나 선배라는 이들에겐 자유 시간을 부여하며 나갔다 올 시간도 주는데 그에겐 그런 시간조차 없었다.

2년 넘게 주점 하는 걸 봐 왔는데 이번처럼 사람이 많이 온 건 처음이라나?

"너무 부려 먹어서 미안하다. 맘 같아선 쉬는 시간을 주고 싶은데, 호준이 네가 주방의 핵심이라 네가 없으면 잘 안 돌아갈 것 같다."

눈치는 얼마나 귀신 같은지 휴식 시간을 달라고 하기도 전에 와서 이런 소리나 해댔다.

그렇게 바보같이 사서 고생하던 정호준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 당도했다.

"일하느라 힘들었다며. 구해주러 왔어. 고맙지?"

중앙대학교 축제는 다음주라 시간이 비었던 박기태가 찾아와 준 것이다.

아무리 정호준이 주방 업무에서 비중이 커도 친구가 놀러 왔는데 계속 붙잡아 둘 순 없었다.

지금껏 쉬는 시간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오늘은 우리가 마무리할게. 호준이 너는 친구분이랑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도 돼."

주점 운영 사흘째 되는 날 처음으로 휴식 시간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근데 여기 축제는 너무 재미없어 보이네."

동기들과 함께 연고대 축제에 다녀온 박기태가 봤을 때 서울대학교의 축제 모습은 너무 싱거웠다.

"연예인 누구 온 데? 서울대학교 클라스가 있는데 라인업 좀 괜찮을 거 아냐?"

"몰라. 일하느라 죽겠는데, 내가 그거 챙기게 생겼냐? 그리고 아버님 덕분에 연예인 자주 봤을 거면서. 뭔 연예인 타령이야."

"이렇게 밖에서 보는 건 또 다르니까."

축제에 섭외한 연예인 누가 왔냐도 축제의 급을 나누는 대학 나름의 자존심 싸움이다. 연예인이 누가 섭외됐냐에 따라 이번에는 급이 낮다 같은 말을 한 번씩 오가곤 한다.

대학교 주점에서 술을 먹다간 다시 붙잡힐 수도 있겠다 싶었던 정호준은 박기태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미국에 왜 다녀왔는지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너도 참 집요해.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

"궁금하잖아."

박기태도 집요한 면이 있어 한 번 호기심이 생기면 끝까지 걸고 넘어지곤 한다. 이럴 때마다 한 번씩 골치가 아팠다.

"나 돈 번 거 알고 있지?"

"어, 아버지가 얼마 전에 태극기에 네 돈도 들어갔다고 알려줬어. 아버지 말론 20억은 족히 벌었을 거라던데? 오늘 너한테 얻어먹으면 되는 건가?"

"그 돈 미국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왔어."

"스타트업? 네가 미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딴지가 계속 붙을 것 같아서 말을 안 한 건데 결국 정호준이 염려했던 대로 이야기가 길어진다.

"뭐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어차피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

정호준이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자 박기태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더 물어봐야 대답하지 않을 거란 것쯤 수년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역 근처까지 도보로 이동해 곱창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 방문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나오면 마시지 박기태는 곱창을 주문하자마자 술을 시켰다.

조리 환경이 열악한 터라 만들다가 조금 실수한 것이 종종 생겨났고 동기들과 함께 주워 먹은 덕에 빈속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크으.

정호준이 따라준 술을 한 번에 다 마시곤 박기태가 정호준을 보며 묻는다.

"야, 호준아. 너 그거 아냐?"

"뭘?"

"우리가 파워볼이랑 메가밀리언 복권 구매했던 그 회차에 당첨자가 나왔데. 그것도 하나는 워싱턴주에서 나왔다네? 운이 좋았으면 너나 내가 당첨됐을 수도 있는데, 좀 많이 아쉽더라."

"그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내 동기 중에 친척이 캘리포니아에서 유학 중인 녀석이 있는데, 걔한테 들었어. 워싱턴주 당첨자가 3개월째 수령을 안 해서 커뮤니티에서 종종 말이 나온대. 죽었거나 자기가 당첨된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던데?"

'진짜 죽었을 수도 있지.'

한국과 당첨금 액수가 천지 차이니 죽었다는 말이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

1등에 당첨될 거라고 믿고 복권을 구매하기보단 재미로 사거나 습관처럼 사는 이들이 많다.

삶이 팍팍하니까,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회귀 전의 정호준은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복권을 구매해본 적이 없다. 혼자 사는 탓에 더더욱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복권 당첨금을 기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냥 여기까지 왔으니까, 재미로 한 번 사보자.

재미로 한번 사보자는 박기태의 제안 때문에 타코마 공항에서 구매했던 메가밀리언 복권을 국제면허증 사이에 껴 놓은 뒤로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될 텐데.'

파워볼과 메가밀리언. 두 복권 모두 당첨 확률이 거의 3억 분의 1에 달했기에 처음부터 안 될 거라 생각했고 기대가 없기에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박기태의 말이 떠올랐다.

- 죽었거나 자기가 당첨된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자꾸만 박기태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방 안으로 들어가 종이로 된 국제면허증을 펼치고 그 안에 있는 메가밀리언 용지를 펼쳤고 컴퓨터를 틀어 복권 사이트에 들어가 스크롤을 내렸다.

A  40 65 23 18 1      mega 12

B   1 20 13 21 30     mega 24

C  31 33 41 8 7       mega 13

D  21 22 45 68 53    mega 4

E  17 23 44 54 30     mega 18

Friday

February 20th 2004       1 13 20 21 30  mega 24

B   1 20 13 21 30  mega 24

형광펜을 가져다가 몇 번이나 색칠하며 확인한 정호준은 자신이 당첨되었음을 인지했다.

"하아~ 하아~"

약 6천만분의 1이 확률로 당첨된 것을 기뻐하기보단 숨이 턱 막혀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포감이 고개를 들었다,

'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거지?'

생각해본 적도 없던 또 한 번의 기적이 기껍기보단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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