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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실을 급습한 수사관들에 의해 마지막 증거까지 모두 수집 되었다. 수사관들이 압수한 컴퓨터 본체 안에는 입출금 내역과 입금되는 돈의 증가폭에 따른 발을 뺄 타이밍 D-day와 D-day가 수정된 지금까지의 기록이 존재했다.
이 기록들은 장희팔이 발뺌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 뚜.. 뚜.. 뚜..
'받아! 받으라고!'
사업(사기)이 궤도에 오른 뒤로 친분을 쌓아두었던 이름 있는 로펌의 변호사들에게 연락했지만 연락을 받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접대 받은 이들 모두가 장희팔의 연락을 무시했다.
'x새끼들!'
좋다고 접대를 받으며 떡고물을 받아먹을 때는 언제고 연락조차 받지 않는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사자성어와 똑 들어맞는 자신의 상황에 욕설을 뱉으면서도 무상함을 느꼈다.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어디서 연락을 해."
장희팔이 연락한 변호사 중 한 명인 김정팔 변호사는 아예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버리며 말했다. 거대 로펌 화랑의 파트너 변호사인 그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무한 재판에 나설 만큼 한가하고 자비심이 넘치지 않았다.
그것도 계좌가 막혀 수임료를 지불할 돈이 없는 이라면 더더욱.
다른 변호사들이 전화를 안 받는 것은 김정팔 파트너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장희팔이 고용할 수 있는 인권변호사나 국가에서 붙여주는 국선 변호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중 인권변호사들도 장희팔의 변호를 거부했다.
그도 그럴 게 인권변호사들은 약자에 편에 서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활동하는 돈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개중에는 능력이 없는 이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다수의 인권변호사가 로펌에 들어가지 않은 건 힘없는 이들을 돕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아니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잠깐 땅을 굳히는 중이거나.
인권 변호사로 일하는 목적이 전자든 후자든 거지 힘없는 사람들을 등처먹는 이를 돕는 건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그들의 신념이나 미래를 위한 인내를 스스로 망치는 것이었기에 인권 변호사 중 그 누구도 장희팔의 변호를 맡지 않았다.
결국 그의 옆에 붙게 된 건 국가가 붙여주는 변호인인 국선변호사가 전부였다.
국가가 왜 저런 못된 놈에게 변호사를 붙여주냐고. 따질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는 헌법 제12조 제4항에 의거해 국가가 국민에게 준 마지막 세이프가드였다.
*****
국민들의 시선이 장희팔 금융사기 사건에 집중된 만큼 조규석 부장검사와 검거에 참여한 지방검찰청의 검사들은 언론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총 책임자인 조규석에게 집중되는 관심은 실로 거대했고 말이다.
집중되는 관심이 얼마나 심한지 조규석이 팔자에도 없는 기자회견을 해야 할 정도였다.
1심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자들을 따로 불러 모은 조규석은 브리핑을 위한 중앙석에 섰다.
-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포장을 잘해서 올라가야지. 은퇴를 하더라도 이대로 중앙지검 부장검사로 은퇴하는 것보단 차장검사 직급을 달고 은퇴하는 게 너와 네 자식들에게 좋지 않겠냐? 지검장이면 더 바랄 것도 없을 거고.
본인의 성공을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자신의 자리까지 걱정하며 자리를 깔아준 지우(知遇) 강현태 변호사의 충고가 떠오른다.
"사건의 발단은 이&박로펌의 강현태 변호사가 제공해준 정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규석은 판을 깔아준 강현태를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의심부터 정보 제공까지. 문제제기를 강현태 변호사가 했음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공을 나눴다.
"4개월 만에 현금 1,200억이 모인 것도 두렵고, 다단계가 시작된 지 4개월이 흘렀음에도 연루된 피해자 중 의심을 품은 이가 없었다는 사실도 두렵습니다. 본 검사는 언론이 이들의 사기 수법을 널리 알려서 똑같은 수법에 피해를 보는 국민이 없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그를 구속하지 못했으면 얼마나 피해가 커졌을지 헤아릴 수도 없다는 말로 자신과 지방검찰청의 검사들의 공로를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량은 얼마나 구형하실 생각이십니까?"
"형량의 최종결정 권한은 판사와 재판부의 소관이지만, 검찰은, 본 검사는 법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형량 구형함으로 금융사기에 관한 일벌백계 사례로 자리 잡길 희망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일 놈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야 함을, 언론과 국민의 시선을 재판부로 향하게 했다. 재판부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고 존중하고 있다는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전하며 신사적으로 말이다.
조규석의 브리핑은 곧바로 기사화되었고 브리핑하는 조규석의 모습이 지상파 3사에 뉴스 속보로도 전해졌다.
[조규석 부장검사 최고 형량을 외치다.]
⌎ 검찰이 웬일이야? 이렇게 똑바로 일한 거 처음 아냐?
⌎ 처음은 아닌데 어쨌든 쟤들이 이렇게 똑바로 일하는 게 얼마 만이냐.
⌎ 조규석 검사를 응원합니다.
⌎ 잘한다. 금융사기가 살인보다 나쁘다. 콩밥 좀 오래 먹게 해주길.
⌎ 사형선고는 않나오겠지?
⌎ 않 x, 안 o
⌎ 판사들도 똑바로 판결해라. 지켜본다.
정말 정신 나간 몇몇 댓글을 제외하면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은 모두 조규석을 응원하고 있었다.
조규석에 대한 칭찬일색이 강해질수록 검찰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개선되었다, 반대로 재판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담이 심해졌다.
*****
투자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정호준은 귀국하자마자 전에 만남을 가졌던 청담동의 한식집에 불려 나갔다.
강현태 변호사의 이름으로 방이 잡혀 있었고 안내를 받아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현태 변호사와 처음 보는 중년 남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먼저 와 계셨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좋은 인연에서 시작된 인맥이 아니고 피곤해 죽을 것 같지만 이후에도 주고받을 것이 많을 것 같았기에 정호준은 인맥 관리라 생각하고 나왔다.
"별로 안 기다렸으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어서 들어오시죠."
강현태가 손을 뻗어 빈자리를 향해 손짓했고 정호준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소개 먼저 해야겠죠. 이쪽은 내 연수원 동기, 조규석 부장검사예요. 호준군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제대로 요리를 했죠. 여기는 정호준군. 우리 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수재야."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정호준입니다."
"후배님이시라니 반갑네요. 조규석이에요."
"그런데 요리했다니요?"
정호준의 질문에 강현태가 곧장 대답했다.
"장희팔 검거했잖아요. 일당도 완전히 일망타진했고. 자료도 다 압수했고. 호준군도 기뻐할 줄 알았는데?"
정호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 몰랐다는 걸 표정 변화를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자 강현태의 시선에 작은 실망감이 서린다.
"호준군은 신문이나 뉴스에 관심이 없나 봅니다?"
본인이 해당 업계에서 일하는 게 아닌 이상 대충이나마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게 해주는 건 신문과 뉴스밖에 없다. 정보의 중요시하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놓고 관심사가 아니라고 전혀 모르는 상황이 기껍지 않았다.
'내가 정호준을 너무 높게 평가했나?'
특히 인터넷, TV할 것 없이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시끌시끌했잖은가. 이런 상황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외에 나갔다 와서요. 귀국한 게 바로 어제 오후라... 한국 사정에 밝지 않네요. 장희팔을 잡으셨다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현재는 2020년이 아닌 2004년이다. 스마트폰이 발명되기 전이라 따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호준이 어떻게 한국 뉴스를 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약속이 잡힌 건 귀국일로부터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차 적응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데 무엇을 확인할 수 있었겠나.
"외국에 다녀오셨다고요?"
"예, 볼일이 있어서 미국에 좀 다녀왔습니다."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소까지 이야기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정호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현태는 직접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두 알려주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다 전해 들은 정호준은 일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음에 감탄하며 조규석을 보며 다시 겉치레 인사를 했다.
정말 일이 잘 풀린 것을 기념해서 만든 자리였는지 조규석과 안면을 튼 것 외엔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중앙지검의 부장검사와 안면을 텄다는 것 만으로도 이 자리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
보통 형사재판은 용의자를 검거한 시점으로부터 1개월 이내에 열린다. 3주 정도 걸린다고 보면 딱 알맞을 거다.
그런데 장희팔과 관련된 재판은 그를 검거한 지 2주 만에 열렸다.
'재판부가 부담스러웠나?'
검찰이 정확히는 조규석 검사와 일련의 무리가 그들이 할 일을 완벽히 해낸 상태라 국민들의 시선은 오롯이 재판부에 향했고 그게 부담이 됐나 보다.
어쩄건 정호준은 장희팔 재판의 방청객으로 초대되었다.
'호준군 덕에 시작된 일이니, 매듭이 지어지는 것도 직접 확인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몇몇 예외의 경우를 제한 모든 재판은 민간에 공개되어 있다. 구경이나 견학을 원한다면 누구나 재판을 방청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국민들의 시선이 모이는 재판이 바로 그 예외에 속했다.
'꽉 찼네.'
1심에 불과한데도 재판장은 방청객으로 꽉 차 있었다.
사기꾼답게 선한 인상의 장희팔이 수의를 입은 채 변호사와 함께 앉아 있었고 검사 측엔 조규석 검사가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판사들이 입장했고 식순에 의거해 재판이 진행되었다.
'장희팔쪽 변호사는 국선이라 그랬지?'
검찰이 내미는 증거가 뚜렷한 탓인지 장희팔의 변호인인 고길혁 국선변호사는 조규석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아니면 변호할 마음이 없는 건가?'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청석에서 재판을 쭉 지켜본 결과 재판은 일방적이었다. 모두절차, 사실심리절차가 이어진 끝에 최종변론이 끝났다.
재판의 절차를 모두 끝나고 재판장이 판결을 선고했다.
"……하여, 피고 장희팔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한다."
헌법, 형법 어쩌구 하는 소리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호준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징역 25년을 선고한 마지막 구결 뿐이었다.
회귀 전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제대로 확인이 안 되었던 희대의 금융사기범 장희팔이 징역을 선고 받는 걸 지켜보며 바꾼 역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다시 한번 역사를 바꿨구나.'
5조란 금액은 부모님의 보험금, 자녀의 보상금, 대구지하철참사의 피해보상금 등 이런저런 안타까운 돈 또한 모두 들어간 돈이다. 부디 자신이 지킨 그 돈들이 이번에는 헛되이 없어지는 일이 없길 바라며 정호준은 폐회해 빈 법정을 조용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