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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30화 (3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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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란 건 언제나 어떤 분야에서나 큰 의미를 갖는다. 개인에게도 단체에게도 다 마찬가지다. 커피집이나 요식업계에서 또한 최초를 상징하는 1호점의 의미는 특별했다.

프렌차이즈가 성공해 규모를 키우면 키울수록 1호점의 의미는 부각되었다.

특별할 게 없는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이 시애틀에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가야 할 필수 관광 코스 중 하나로 자리 잡는 게 최초의 의미를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랄까?

'뉴욕에 분명 1호점이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미국에 온 김에 본토의 쉐이크쉑 버거를 먹어보고 싶어 1호점이 위치했다 알려진 매디슨스퀘어가든으로 이동했는데 공원을 한 바퀴 쭉 돌았음에도 쉐이크쉑 버거집은 보이지 않았다. 공사 중인 건물만 보일 뿐.

'2004년에 정식으로 창업했단 들었는데 아직 창업 전인가 보네. 하아, 뉴욕은 나랑 안 맞는 동네인가?'

계획이 어그러지고 바보 같은 실수나 해대고 여러모로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뉴욕행에 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복귀해 헬스장 등의 시설을 이용하며 시간을 보낸 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쳤을 때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 뭐야! 호준이 너 외국 나갔어?

시험도 끝났겠다 약속도 없고 수업도 없는 주말이겠다 같이 밥 먹으려고 연락했더니 로밍서비스 중이란 안내가 이어진다. 정호준으로부터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한 박기태는 정호준이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 놀러 온 거 아냐. 놀러 오는 거면 너한테도 이야기했겠지. 볼 일이 있어서 왔어.

- 네가 미국까지 가서 처리할 일이 뭐가 있는데?

- 한국 들어가서 말해줄게.

뒤로 빼는 정호준의 변명에 박기태는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나중에를 외치는 호준의 철벽을 뚫지는 못했다.

- 나중에 이야기해준다니까. 끊는다.

박기태의 전화를 끊은 정호준은 시차를 계산해 한국시간을 예측하곤 핸드폰에 등록된 다른 번호로 연락을 넣었다.

- 여보세요?

이제 막 일어난 것 같은 잠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정호준이 연락한 이는 바로 '내 신부는 여고생'의 제작사 컬쳐캠미디어 대표 박순식이었다.

'태극기 흩날리며'처럼 신기록을 갈아 치우는 수준의 흥행은 아니라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흥행 중이라 박순식은 회식, 접대 자리 등을 오가며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영화 잘 봤습니다.

- 투자자님께서 충고해주시고 투자해주신 덕분입니다.

말과 달리 말하는 뉘앙스에는 진심이 일절 담기지 않았다. 얼마를 투자할지 전해 들었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는 이였다. 그리고 영화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반열에 오르기 시작해서인지 그런 성향이 유독 강해졌다.

- 좀 더 대중의 관심에 불을 붙이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하는 충고도 충고를 받는 대상이 삐뚤어진 이라면 조언과 충고가 진실되게 받아들여지지 않곤 한다.

정호준은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꼬아서 말하지도 않았지만 호준의 발언 자체를 꼬아 들은 박순식에겐 홍보할 거리가 남았고 네가 홍보를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들렸다.

- 홍보하면 좋죠. 좋은데 말이 쉽지 이 이상 어떻게 더 홍보를 하겠습니까?

박순식은 비아냥대듯 말했다.

영화를 띄우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노력을 깎아내렸다고 받아들인 박순식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 '태극기 흩날리며'가 극장 스크린에서 내려왔지만 아직 그 열기는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 '실미도부대'의 기록을 모두 넘기고 최다 관객 기록을 가졌으니... 아직도 한 번씩 기사로 나오고는 있죠.

- 그 인기를 우리가 이용하죠.

당사자가 잘나고 해당 작품이 잘나서 좋은 성과를 내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세상엔 정공법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남의 유명세에 달라붙으면서 그 휘광을 이용하는 꼼수도 할 수만 있다면 사용하는 게 맞았다.

'태극기 흩날리며'야 정호준이 딱히 무엇을 보탤 처지가 못 됐지만 '내 신부는 여고생'은 기름 한 통을 부어 줄 소재와 능력을 갖고 있었다.

정호준의 깊은 뜻도 모르고 박순식은 다시 그 입을 놀렸다.

- 우리 영화랑 '태극기 흩날리며'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대체 그 인기에 어떻게 편승하겠다는 겁니까? 이용하려면 최소한 접점은 있어야 합니다.

박순식의 말투엔 한심하단 뉘앙스까지 섞여 있어 다시 한번 그냥 때려치우고 싶다는 충동이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참자, 참아. 이번 영화만 끝나면 안 볼 사람이다.'

- 지금 인터넷 확인 가능합니까?

- 가능합니다만.

- 인터넷에서 성진우 기자와 강진옥 기자가 작성한 기사 중 '태극기 흩날리며'에 투자한 투자자들을 다룬 기사를 찾아보시죠.

정적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켜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타자 치는 소리와 마우스 스크롤휠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 네 몇 개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영화 홍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찾아보라는 겁니까?

- 거기 적힌 20억 투자한 사람이 접니다.

- 예?

처음으로 멍청하게 되묻는 박순식의 물음에 정호준은 쐐기를 박았다.

- '태극기 흩날리며'에 20억을 투자한 투자자가 바로 저라고요.

-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아무 말도 없이 침묵하고 있는 박순식에게 정호준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 기사를 쓴 강진옥 기자나 성진우 기자 중 대표님이 편하신 분을 만나서 새로운 기사를 내세요. '내 신부는 여고생'은 '태극기 흩날리며'에 20억을 투자해 30억을 번 투자자가 투자한 영화라고. 포장만 잘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어올 수 있을 겁니다.

성공한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은 나도 사용하고 싶다. TV나 영화 시작 전에 보여주는 광고는 대중들의 이런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모양새는 조금 다르나 정호준이 의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큰 수익을 낸 건 아니지만 수익적인 면을 떠나 파급력으로 본다면 대한민국 국민 5분의 1이 본 영화다. 그런 영화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던 이가 또 다른 영화에 투자했다?

'그 영화도 재밌나?', '왜 투자한 거지?'란 의문을 품게 함으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심을 받게 하는 것. 그것이 정호준이 노리는 바였다.

만약 본인의 정보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냥 조용히 흑막 속에 있었겠지만 '태극기 흩날리며' 때문에 이미 신상 빼고 거의 모든 정보가 밝혀졌다. 그렇다면 숨기기보단 드러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끌어오는 게 옳았다.

- 제 개인 신상정보는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제가 투자한 액수만 밝히는 선에서 기사가 나갔으면 합니다. 깔끔하게 처리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 예, 예. 알겠습니다. 소스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순식의 태도가 급 공손해져 잠깐 속에서 의문이 생겼지만 용건도 다 끝났는데 예의 없는 작자와 더 오래 통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무시한 채 전화를 끊었다.

['태극기 흩날리며' 최대 투자자. '내 신부는 여고생'에 투자했다?]

[동시 투자를 감행한 '태극기 흩날리며'의 최대 투자자. 둘 다 성공할 수 있을까?]

예의가 없고 성격이 글러 먹었을 뿐 일은 잘하는지 정호준이랑 통화를 나눈 후로 3시간이 흐른 뒤 인터넷에 기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정호준은 꿈나라로 간 뒤라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

2004년 4월 25일 일요일.

브런치를 먹고 밖으로 나온 정호준은 뉴욕 양키스타디움을 들렀다.

스프링캠프조차 진행이 안 됐던 LA 여정 때와 달리 야구 경기를 직관이 가능했다. 경험 삼아 표를 끊어 양키 스타디움에 들어갔다.

'야구 수준은 얘네가 더 높을지 몰라도 야구 자체는 한국야구가 더 재밌네.'

거의 종일 시끌벅적한 한국야구 경기와 달리 메이저리그는 뭐랄까 조금 정적이었다. 수준은 높아도 야구란 경기 그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 정호준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가도 재밌고 따로 가도 분위기에 휩쓸려 놀 수 있는 한국야구가 문외한이 즐기기엔 더 재밌게 여겨졌다.

Boston Red Sox    2

New York Yankees 0

4회 초 점수를 낸 보스턴 레드삭스와 달리 양키스의 타선은 7회 말까지도 득점을 내지 못했다.

'야구는 9회 말부터다,'란 말은 야구를 즐기는 사람을 넘어 야구를 모르는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말이었지만 딱히 팬심도 없고 야구 자체를 즐기지도 않는 정호준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7회 말이 양키스의 무득점으로 끝나고 8회초 공수교대가 이뤄지는 타이밍에 정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로버트 F 케네디 브릿지를 통해 랜달스 아일랜드 공원이 구성된 제도로 이동한 정호준은 섬을 한 바퀴 크게 돌며 경관을 구경하곤 다시 케네디 브릿지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플라자 호텔 근처로 복귀했다.

저녁 먹을 때가 다 되어 본토의 햄버거 맛은 어떤지 궁금해 이스트 57번가를 따라 쭉 이동해 맥도날드를 방문했다.

'햄버거 맛은 한국이 훨씬 나은 것 같은데?'

햄버거 종류가 다양해 선호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는 한국과 달리 햄버거 종류가 몇 되지 않아 골라 먹는 재미도 없었고 햄버거 맛도 달랐다.

'케첩, 머스타드, 마요네즈만 가지고 맛을 냈네.'

머스타드도 달콤함이 덜한 머스타드다. 맥도날드의 본산지인 미국에서 먹는 빅맥세트는 패티 본연의 맛과 케첩, 머스타드의 맛이 진한 원초적인 맛이었다.

패티 맛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이쪽이 나을 수도 있지만 케첩과 머스타드 맛이 너무 진해 짠맛이 강했다.

'한국 맥도날드는 현지화가 많이 된 거구나.'

맥도날드 프렌차이즈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노력을 기했음을 미국에 와서 깨달았다.

*****

2004년 4월 26일 월요일.

사우나에 들렀다가 취침한 정호준은 7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친 뒤 40분쯤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섰다.

10시 34분에 보스턴 로건국제공항(Boston Logan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대 뉴욕의 러시아워는 굳이 미국에서 살고 있지 않아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정호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택시를 타는 대신 전철을 타고 JFK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1시간 6분 동안 전철을 타고 난 뒤에야 공항에 당도할 수 있었다. 공항 내부로 들어가 시계는 정확히 9시 0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내의 음식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호준은 비행기 게이트 앞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출발시간을 기다렸다. 1시간 정도를 기다린 뒤에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고 1시간 7분을 소요해 보스턴 로건국제공항에 탈 없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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