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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준은 Billing rate(시간당 상담 지불금액) 650달러(747,500원)를 지불하고 나서야 파트너 변호사와 상담할 수 있게 되었다.
- 단순 비자 상담이라면 굳이 저를 찾아오실 필요가 있을까요? 이민이나 법인 설립을 전문으로 삼는 작은 로펌에 가도 충분할 텐데요.
- 문제 없이 깔끔하게 처리되길 원하니까요.
정호준이 왁텔을 선택한 건 어디까지나 그가 아는 거대 로펌이 왁텔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다고 비싼 만큼 잡음 없이 일을 처리해주지 않겠는가?
사회가 정한 테두리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고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의 한 사람인 정호준이 살면서 로펌을 찾을 일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사업을 하거나 사고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로펌은 커녕 변호사를 만날 일은 전무한 게 준법의식이 투철한 한국인들의 인생이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도 1~2위를 다투는 이&박로펌과 화랑 말곤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남의 나라인 미국에 존재하는 로펌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정호준이 왁텔을 알게 된 것도 어디까지나 한국 국적을 가진 최초의 하버드 수석졸업생을 조명하는 기사에 그가 미국 거대 로펌인 왁텔에 근무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비자가 없어도 투자가 가능하다는 건 한국 로펌을 통해 미리 듣고 왔다. 그렇기에 LLC설립을 의뢰함과 동시에 정호준은 E-2비자를 신청했다.
'언제 어떻게 또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거니까.'
정호준은 12,000달러의 수임료를 지불하고 나왔다.
*****
작성해 달라는 것을 모두 작성해주고 마지막에 계약서 작성까지 마친 정호준은 구경하다 가도 좋다는 하워드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와 자유를 맛봤다.
하워드의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뉴욕의 경치는 멋졌지만 그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본인이 돈을 써가며 절차를 생략한 거지만 법과 절차에 벗어난, 무시하는 느낌이 달갑진 않았기 때문이다.
위선이라 손가락질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호준의 심정은 그랬다.
"일요일 오후 비행기니까, 지금부터는 자유시간이네."
정호준은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 센트럴 파크에 입장했다.
'일산 호수 공원이 더 깔끔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센트럴 파크 내부에 유원지 비슷한 게 존재하고 빌딩과 유럽 양식의 건물들 사이에 숲 같은 느낌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풍경이 조금 더 멋지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산에 있는 호수 공원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 정도면 큰 차이려나?'
여름의 뉴욕 날씨는 한국만큼 덥고 습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4월 날씨는 선선하고 산책하기 정말 좋은 날씨였다.
센트럴 파크를 크게 한 바퀴 돈 뒤 정호준은 플라자 호텔, 트럼프 타워 등의 로비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
"오랜만이지?"
정호준이 뉴욕에 건너가 있는 동안 강현태 변호사는 연수원 동기로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인 조규석과 자리를 가졌다.
"검사 박봉이다. 네가 사는 거지?"
"그래, 내가 산다. 내가 사."
승진을 일찍 하면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현실이다.
자리가 몇 없는 직급까지 올라가면 줄을 잘못 잡거나 몇 년 동안 자리가 나지 않으면 그대로 옷 벗고 나와야 했으니까. 강현태 변호사가 바로 일찍 승진해 자리가 안 나 은퇴한 경우의 인간이었다.
반대로 월급이 적다며 너스레를 떠는 조규석은 능력은 뛰어나나 정치를 멀리하고 줄타기를 안 해 승진이 늦어진 케이스였다. 처가라도 바쳐줬으면 승진 속도가 조금은 빨랐겠지만 소꿉친구를 배신하지 않고 결혼까지 골인해 비빌 처가도 없었다.
정직의 대명사 같은 인간이 바로 조규석이다.
"규석아. 넌 어디까지 가고 싶냐?"
강현태는 조규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어디까지 가긴. 정년 채우고 은퇴하는 게 꿈이다."
"승진 욕심 없냐?"
"솔직히 없다고 할 순 없겠지. 부장검사만 몇 년인데. 근데 어디 승진이 내 마음대로 되냐? 위에 자리가 나야 승진도 하는 거지."
신세를 한탄하는 친한 동기의 빈 잔에 술을 따라준 뒤 다시 물었다.
"내가 널 스타 검사로 띄워줄 거리를 주면 어떻겠냐?"
"내 성격 알잖아. 청탁 안 받는다."
"나도 알아 임마. 너랑 몇 년인데 네 성격을 모를까. 청탁 아니고 큰 사건을 물어주려는 거다. 대한민국을 흔들 큰 사건."
강현태의 말에 조규석이 호기심을 표했고, 강현태는 정호준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해본 살까지 덧붙이며 장희팔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단한 놈이라고 해야 하나, 미친x끼 죽일 놈들이라 불러야 하나?"
"뭐로 부르든 상관없고 경상도와 충청도에 믿을 만한 녀석들 있냐? 영장 나오는 건 내가 조금 힘을 보탤 수 있지만 검찰 쪽은 아니라서."
강현태의 물음에 조규석은 자신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믿을 만한 사람들을 추렸다.
*****
사실 겉으로만 보면 장희팔이 대여사업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인다.
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 것도 아니고 찜질방, 미용실 등에 실제로 기기를 가져다 놔 사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모습까지 연출하며 완벽하게 포장 중이었으니까.
잡음이 전무한데 들쑤시는 건 잘못했다간 검찰이 폭주한다고 대중에게 비춰질 수 있다. 특히 무리해서 들쑤셨는데 정상적인 사업체면 그땐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장희팔의 사업이 정말 문제가 없는 거였다면 조규석이나 그가 부탁해 함께 움직인 지방법원의 검사들은 목이 날아가리라.
"구속영장 문제는 정말 해결 가능한 거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정말 사건을 맡아도 괜찮을지 확인하기 위해 강현태의 눈을 직시한 채 물었다.
강현태는 조규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확신을 주었다.
"그래, 대충 구색만 맞춰서 신청해."
"그래 그럼. 네가 알려준 첼린(대구‧경북), 씨엔씨(부율경권), 레브(서울‧충남), 엘린(충북‧전라). 4개 법인 28일 자로 동시 급습할게."
"구속에 성공하면 걔네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까지 다 긁어오는 거 알지?"
"누굴 아마추어로 아나?"
압수수색영장이 아닌 구속영장을 발급받아 피의자를 붙잡은 상황이어도 검사는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선제적으로 압수수색조치를 취할 수 있다. 물론 사후 보고는 확실히 해야 하지만 말이다.
"붙잡는데 성공한 뒤부터 상황 공유 좀 해줘. 적정한 시점에 내가 언론에 흘릴 테니까."
"언론에 흘리다니?"
"만약 폰지사기(금융사기)임이 밝혀지면, 피해가 커지기 전에 사건을 수습한 게 되잖아, 잘했으면 누가 알아주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했음을 홍보해야지."
아직 자기 PR이란 개념이 정형화되기 전임에도 강현태는 2010년대의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도 자기 PR계획이 확실하게 서 있었다.
"이번 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네 이름도 국민들에게 각인되면 적어도 이번엔 승진할 수 있지 않겠냐? 검찰입장에서도 생색내기 딱 좋은 소재잖아. 네가 조금만 욕심내면 검사장 자리까지는 안전하게 갈 수도 있지 않겠냐?"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만만찮은 강현태지만 그는 조규석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조규석은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인간이었다. '빠른'이 아닌 남들보다 1년 일찍 학창 생활을 시작했으면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떡하니 붙었다.
게다가 남들보다 1년 빨리 입학한 걸로도 모자라 재학 중에 사법고시 2차까지 떡하니 합격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짜 천재였다.
강현태는 조규석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을 욕망을 부채질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규석의 눈동자에 야망의 빛이 서렸다.
중립이란 말이 중립이지 어느 편도 아니란 이야기다.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분자는 견제를 받지 않는 게 아닌 양쪽으로부터 배척받는다.
회색분자 취급받고 배경도 없는 조규석이 남들보다 3~4년 늦게나마 부장검사. 그것도 서울중앙지검의 부장검사 직위를 달 수 있었던 건 뛰어난 능력과 성실함 그리고 사고 치지 않는 그의 성향이 한몫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정치질에 실패한 이들이 알아서 자빠져주었기 때문이다.
검사도 공무직인지라 정치질 없이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늦게나마 승진이 가능했지만 그것도 부장검사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부장검사보다 더 자리가 없는 게 바로 차장검사란 자리였다. 한쪽 파벌이 미끄러져도 차장검사 자리는 정치에서 승리한 파벌로 채우기도 모자랐다.
'여기까지구나.'
조규석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체념했다.
그냥 정년만 채우자는 생각으로.
그런데 조규석의 마음속에 이미 꺼지고 불씨만 남았던 '야망'이란 불씨에 강현태가 불을 질렀다.
"나는 이번 일을 잘 포장해서 정치권에 들어갈 거다. 너는 승진하고 나는 정치권에 입문하고 서로 윈윈하자."
이야기를 마친 강현태는 술이 가득 담긴 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했다.
짠!
"서로의 성공을 위하여!"
강현태가 들어 올린 잔에 잔을 부딪히며 조규석 또한 성공을 기원했다.
*****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도 들려서 구경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들러봤다.
'얘네는 정말 모든 게 돈이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의 경치가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었기에 타임스퀘워 광장을 방문한 뒤 곧장 들렀는데 전망대를 이용하는데도 돈이 들었다.
그것도 한국 돈으로 몇 만원이나.
'이런 나라에서 어리숙함을 보였던 내가 어리석었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천루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하는데도 돈을 매기는 나라에서 바보처럼 굴었으니 뒤통수를 맞는 건 어쩌면 필연이었으리라.
당장 의미 없이 큰 돈을 사용한 상태에서 쓸데없는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마천루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한 정호준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28번 Str에서 전철을 타곤 월스트리트 스테이션까지 이동했다.
- 혹시 월스트리트로 가려면 이걸 타면 되나요?
정호준도 물어물어 찾아온 건데 노후화된 지하철역에 이르자 몇몇 사람이 어설픈 영어로 호준에게 물었다.
- 글쎄요. 저도 뉴욕이 처음인 관광객이라서. 근데 아마 이걸 타는 게 맞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들었거든요.
그냥 확인만 하고 가는 게 뻘쭘했는지 종종 정호준의 국적을 묻는 질문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 혹시 일본인인가요? 아님 한국인?
- 어? 어떻게 한국을 아시네요?
적당히 대꾸해주며 응대했다.
똑같은 관광객이면서 관광객한테 몇 번이나 질문을 받는 생소한 경험을 하며 지하철을 타고 Wall Str 스테이션에서 내렸다.
거리로 나오자마자 청동으로 만들어진 월스트리트의 기념물.
돌진하는 황소를 구경하러 갔다.
그곳에는 이미 몇몇 무리가 사진을 찍거나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줄 서서 기다린 뒤 차례가 됐을 때 황소를 한 번 만져보곤 배터리 공원으로 이동해 배를 탔다.
배를 타고 15분 정도 이동한 정호준은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Statue of Liberty National Park'에 당도했다.
'저것도 돈 받나 보네.'
자유의 여신상은 벽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중간중간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이 나라가 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인지 여행을 하면 할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