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
기자로 일하는 이 중 상당수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란 핑계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한다. 개인의 사생활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사생활 침해를 아주 밥 먹듯이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직업을 한 줄로 나열시키면 선두에는 기자들이 있지 않을까?'
맞으면 맞는 대로 아니어도 그런 것처럼 기사를 쓸 뿐이다.
조회수를 끌 수 있게 최대한 자극적으로 말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져만 갔다. 사실보단 관심이 더 중요했고 애초에 기사를 작성할 때도 가정, 의문 제기와 같이 애매한 표현을 인용해 책임질 소지를 없게 만들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기사를 쓰다 사실이 아님이 확인돼도 보상은커녕 그저 정정보도를 내며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게 전부였다. 아니 그 이전에 공개적으로 사과까지 가는 경우도 정말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중견기업 중에서도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은 그들이 관심을 위해 무심코 던진 돌에 이미 망했거나 망하기 일보직전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 언론이고 기자지만. 이쪽에서 먼저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면 조금은 호의적으로 나와주겠지?'
그것도 친분이 있는 이를 통해 접촉해 협조하며 기삿거리를 주는데 부정적으로 적으면 그건 정말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정호준은 박제균에게 부탁했다.
'기생피리로'만큼 큰 성공은 아니지만 첫 작품부터 성공을 거두며 꽃길만 걸어온 박제균 감독이다. 영화계에서 밥을 먹고 사는 만큼 감독으로 기자들과는 어느 정도 친분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정보 풀자는 정호준의 생각이 일리가 있다 생각한 박제균은 본인의 허락도 있겠다 곧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정호준과 전화 통화를 마치자마자 기자들에게 연락을 넣었고 다음 날인 27일 금요일에 약속을 잡았다.
박제균은 친분이 있는 기자들을 대접하는 자리를 가졌다.
"강기자, 성기자 오랜만이에요."
주차장에서 만났는지 함께 들어오는 기자들을 보며 박제균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한 쌍의 남녀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인사했다.
"또 한 번의 대박을 축하드립니다. 감독님께서 성공하실 거란 걸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저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랬나요? 그런 것치곤 여기저기서 염려의 기사가 넘쳤었는데요?"
사탕발림에 박제균이 잠깐 날을 세웠지만.
취재 활동을 이어가며 볼꼴 못 볼 꼴 다 봐 온 그들이 겨우 이 정도로 무안을 느낄 리 만무했다.
"호호호, 그거야 뭐 감독님의 능력을 모르는 이들 때문이죠."
"이 집, 맛집으로 유명하던데 오늘 포식하겠네요."
"그래요. 일단 우리 밥부터 먹고 이야기합시다. 내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요."
무를 깎아 만든 꽃장식과 그 옆으로 참치회가 부위별로 단란하게 놓인 접시가 개개인 앞으로 서빙되었고 곧이어 메로구이도 1인당 한 덩어리씩 먹을 수 있게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부드러운 일본식 계란찜과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만들어진 명란젓과 마요네즈 김가루를 이용해 맛을 낸 명란 마요 주먹밥도 줄줄이 상에 놓였다.
"금가루도 뿌려져 있네요. 이거 어디 아까워서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으려고 시킨 건데 먹어야지 어쩌겠나. 한잔 받지."
박제균은 한 병에 30만원을 호가하는 사케를 딴 뒤 먼저 자신과 같은 남자인 성진우에게 따라주었다.
"요즘 술 강요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다며요? 술 안 좋아하면 강기자는 안 받아도 됩니다. "
"서운하게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감독님. 저 술 좋아해요."
여자의 몸으로 남자 기자들과 살을 부대끼며 취재 현장에 다녔던 게 강진옥이다.
서른을 넘기고 몇 차례 승진을 통해 관리직으로 돌려지긴 했지만 악바리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다. 술은 특히 비싼 술은 없어서 못 마시는 거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이 한잔 두잔 오간다.
박제균의 대박을 축하하고 서로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며 사담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일 때문에 나온 거지 정말 접대 받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기에 술잔은 어디까지나 술에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오갔다.
"밥도 맛있게 먹었겠다 그만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감독님이 저희를 부르신 것도 기삿거리를 제공해주려 하신 거잖습니까?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6억 정도가 비는데,"
식사를 마치고 일종의 침묵의 시간이 도래하자 강진옥이 먼저 본론을 꺼내들었다.
"개인에게 투자받았네. 그것도 추가 투자가 필요할 시점에 먼저 찾아와서 투자하겠다고 하더군. 어떻게 사정을 정확히 꿰고 있는지 사실 나도 궁금해."
박제균은 투자를 받은 과정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20억이면 덩어리가 크네요. 혹시 20대로 보인다는 젊은 투자자가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거기까진 말해줄 수 없네. 지금 이야기해준 걸로도 충분히 기삿감은 나왔잖나?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을 첨부하면 자네들도 여기까지만 파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네."
"예?"
"내게 20억을 투자한 투자자는 내 영화 말고 다른 영화에도 투자했네.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만 30억이 넘는데."
잠깐 말을 끊고 얼굴표정을 굳히면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한 박제균이 이윽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본인의 과대망상을.
"현금으로 30억을 바로 쏴줄 수 있는 20대가 과연 한국에 흔할까?"
박제균은 약속했던 투자금이 잡음 없이 입금되자 박남정에게 연락해서 정호준이 누군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들의 친구고 그 투자금이 목숨값이라고 말하기가 꺼려졌던 박남정은 박제균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그런 박남정의 행동 때문에 박제균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냈다.
"재벌가나 정치인의 자녀란 말인가요?"
"직계는 아니네. 나도 계약서 쓸 때 한 번 만나본 게 다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거든."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고 세 번 다 성공했다.
처녀작을 성공으로 이끈 뒤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모두 대성공으로 이끌었다.
어느 분야든 한 분야에서 정상을 찍으면 국가의 피라미드 정점이라 칭해지는 이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투자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불려 다녀보기도 한 박제균은 특히 그런 경향이 짙었다.
박제균의 직계는 아닐 거란 말을 들은 강진옥과 성진우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특종 냄새는 나는데... 이거 파면 안 될 것 같은데?'
풀풀 나는 특종 냄새에도 불구하고 직계가 아니란 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핏줄. 특히 사생아와 관련된 문제는 상류층들의 역린이다. 모르면 알려 하지 말고 알아도 모른 척 지나가야 할 만큼.
흔히 사람들이 기자들을 특종이 있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는다고 비유하지만
그 말이 정말 그들이 목숨은 건단 말은 아니었다.
이게 뭐 엄청난 비리여서 직업 정신과 정의감으로 보도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혹시 주변 기자들에게 소스를 공유해도 잘 일러주라고. 그래도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데 절벽으로 가는 걸 뻔히 지켜볼 순 없는 거잖나."
"역시 박감독님 밖에 없네요. 이렇게 걱정도 해주시고."
"도우면서 사는 거지. 어쨌건 우리 기자님들.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누가 영화감독 아니랄까 봐. 과대망상으로 출생의 비밀까지 뚝딱 만들어낸 박제균의 착각 덕분에 정호준의 개인정보가 밝혀지는 건 좀 더 나중 일이 되었다.
*****
좋은 추억을 만들고 재미있게 놀다 온 건 좋은데 다녀오니 귀국하고 나니 놀고 온 휴유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단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는 정호준과 박기태 둘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로 1학기 수강 신청 날짜가 지났다는 거다.
대학에 처음 입학하는 터라 혹시 문제 될까 발을 동동거리던 박기태는 정호준에게 연락했다.
"어쩌지? 우리 망한 거 아냐?"
똑같이 대학에 입학하는 처지인 정호준에게 전화해 무슨 조언을 얻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호준은 회귀 전 본인의 경험에서 입각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입학식 날 조교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수강 신청 정정 기간이란 것도 따로 있어서 그때 신청해도 늦지 않아."
TO가 적은 과목은 수강 신청이 불가능하겠지만 그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호준이 교수여서 TO를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를 놓친 것에 대한 불이익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다음 학기나, 내년에 신청해야지 뭐.'
정호준이 여기서 머리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다 한번 경험하고 나면 알아서 도사가 되리라.
*****
2004년 3월 2일 화요일.
입학식이 열리는 날이었지만 정호준은 집에 머물렀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최고의 대학이라 뽑을 대학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참석할 법도 했지만 정호준은 입학식에 가지 않았다.
'혼자 가서 뭐해.'
초중고의 입학식과 대학교의 입학식은 본인과 부모 모두에게 사뭇 의미가 다르다.
대학교 입학식은 지금까지 노력한 것을 확인하고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였다.
가봐야 혼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의식하고 외로움만 느끼게 될 자리다.
굳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가며 가고 싶지 않았다.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인터넷에 접속해 최대 학점에 맞춰 수강 신청을 진행했다.
*****
서울대 경영대학이 사용하는 경영관은 사회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함께 캠퍼스 정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교양 수업은 경우에 따라 조금 오래 걷기도 했지만 전공 수업을 듣는 데는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건 좀 불편했지만.
'모든 게 좋을 수는 없는 거니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바쁘게 지낸 덕분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첫 시험이 모두 끝났을 정도로.
"이거 어렵지 않았어?"
"망친 것 같은데."
잘 봤다고 하면 잘 봤다고 견제를 할 거고 못 봤다고 말하면 믿지도 않으면서 주변에서 시험 잘 봤냐 소리를 해댄다.
정호준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OT에 참석하지 않은 정호준이지만.
대면식에는 참석했고, 다행히 친구는 사귀게 되었다.
"시험 어떻게 봤냐? 잘 봤어?"
"시험도 끝났는데 술 한잔 어때? 너만 OK하면 내가 자리 만들게."
하나는 정호준과 마찬가지로 1학년 때부터 학점 관리하느라 바쁜 김관식이란 친구였고 술 마시자 이야기하는 녀석은 한량처럼 구는 녀석은 최준석이란 친구다.
'서울대라고 다를 게 없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아.'
회귀 전에는 와본 적 없는 대학인 만큼 환상을 품고 있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만 모아 놓은 학교여도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좀 웃겼다.
'이제 또 옥석이 가려지겠지.'
또래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만 모였다고 자부하지만 세상사도 성적도 언제나 상대적인 법. 이 중에서도 누가 더 공부를 잘하는지 다시 한번 옥석이 가려지리라.
"술은 다음에 하자. 나 오늘 바빠."
"바쁘다고? 무슨 일 있어?"
"볼 일이 좀 있어서."
'태극기 흩날리며'가 드디어 극장에서 스크린을 내렸다.
드디어 오늘 영화에 투자했던 투자금과 1차 정산금이 입금되는 날이었다.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기에 정호준은 부푼 마음으로 놀자고 권유하는 최준석의 제안을 뿌리쳤다.
"뭐 하는지는 가르쳐주고 가도 되잖아. 비싸게 굴기는."
철없는 최준석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정호준은 경영관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