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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앉아 있던 정호준은 어떻게든 실패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성공했을 때의 달콤함, 거둬드릴 수 있는 수익을 상상했다.
'투자가 둘 다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래도 재산이 60억 정도까지는 불어나겠네.'
한국 영화 업계의 경우 투자 대박이 나도 투자금에서 5배 이상 불려 가져가는 이는 없었다. 나눠가는 구조가 워낙 특히 2000년대 초반의 경우는 더더욱.
정호준이 파악하고 있는 영화 티켓수입 분배 구조는 이렇다. 개봉일부터 영화를 내리는 날까지 벌어드린 입장 수익에서 부가세 10%, 영화 발전기금 3%를 정산한다. 나라와 협회에 내야 할 돈을 모두 내고 남은 돈에서 극장이 먼저 45%~50% 비율의 돈을 나눠간다.
극장이 떼가고 남은 50~55%의 수익에서 제작비를 정산하고 남은 금액에서 다시 배급사가 10%를 떼갔다. 그렇게 이쪽저쪽에서 나눠갈 거 다 나눠가고 남은 돈을 투자자와 제작사가 6:4, 혹은 7:3의 비율로 나눠 갖는다.
'태극기 흩날리며'의 경우 박제균 감독이 명성도 있고 제작사도 겸하고 있어서인지 6:4의 비율로 나눠 가졌다. 물론 여기서 6은 투자자의 몫이다.
'극장 매출은 대충 800억 정도지? 그럼 생각만큼 수익이 크진 않네.'
극장 매출이 800억이라고 가정했을 때 정호준이 얻어갈 수익은 제작비 제외하고 약 17억. 1100만을 넘긴 대박 영화의 전체 투자금 중 13.5% 정도의 지분이나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적다고 느껴질 수 있는 금액이다.
'3개월 만에 2배 번 거면 만족해야겠지?'
더 크게 벌었으면 좋았겠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거다.
2배도 작은 게 아니다. 그렇게 만족하기로 했다.
정호준은 모르지만 사실 호준에겐 추가수익이 남아 있었다.
국내 부가판권(DVD‧비디오‧케이블‧공중파), 부산 전시회 수입과 같이 1차 정산액에 포함되어 정산액을 올려줄 돈과 해외부가사업 매출 출판ㆍ음반ㆍ의류 수입, 캐릭터 사업 등 극장에서 영화가 내려간 후로 1년 지나 봐야 정산 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정호준은 군대에 있어서 잘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태극기 흩날리며'는 영화가 한창 극장에서 상영되는 와중에 맺은 해외 수출 계약이 사상 최초로 100억을 넘기는 기염을 토했었고, 8월 말. 일본에서 상영이 끝날 무렵 정산한 관람 수익이 10억옌(104억)에 달했었다.
일본에서의 관람수익만 5대5로 나눈다고 가장하면 '태극기 흩날리며'의 추가수익이 50억은 되는 셈이다.
국내 부가판권과 해외부가사업, 수출 등의 극장 매출을 제외한 부가적인 것들은 극장에게 나눠줄 필요가 없는 수익들이었다. 정확한 액수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추가로 들어올 돈도 쏠쏠하리라.
물론 정호준의 머릿속엔 극장 매출액만 계산된 상태지만 말이다.
'중국어는 잘못하는데, 통역은 또 어디서 구해야 하나?'
수익금을 받는 즉시 대만과 미국에 들를 계획을 짜두었던 정호준은 세워두었던 미래 계획의 세부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며 두려움을 떨쳐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달이 바뀌었을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하기엔 너무 때가 늦었던 터라 정호준은 부모님이 쓰시던 옷가지를 버리는 정도만 정리하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박기태 부자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2월 7일 토요일 오후 5시.
정호준은 박기태 집 초인종을 눌렀다.
"어서 오려무나. 잘 지냈지?"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인데 박기태의 집에선 이미 술판이 열린 상태였다.
"호준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다 이야기해라. 다 시켜줄 테니까. 오늘 아저씨가 제대로 쏘마."
"아뇨, 진짜 괜찮습니다. 이것도 충분히 과해요."
상 4개를 가로로 붙여 만든 긴 상 위에 치킨, 양장피, 탕수육, 보쌈, 오삼불고기, 갈비찜, 잡채, 회, 오뎅탕까지. 한 종류의 음식만으로도 한 끼를 해결하고 남을 음식들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정호준의 거절에도 박남정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꼭 말해라, 알았지?"
"예, 그럴게요."
정호준을 불러 그의 친구들에게 아들 친구라며 잠깐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다시 한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말하라 말한 박남정은 자신이 초대한 친구 셋과 함께 좌측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박남정을 뒤로(?) 한 채 정호준과 박기태도 우측 가장자리에 앉았다. 정호준은 술을 마시기에 앞서 음식을 주워 먹었다. 빈 속에 술을 먹는 건 다음 날 속이 쓰리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자리에 앉으며 탕수육을 손으로 집어 먹은 정호준은 박기태를 보며 말했다.
"대학 합격 축하해."
인서울에 실패하고 인천에 위치한 대학과 영상 관련 전문대에만 원서를 넣었던 회귀 전과 달리 박기태는 중대 신문방송학부에 최종 합격했다. 공부 쪽으로 큰 기대 안 했던 자식이 인서울. 그것도 중대에 합격했으니 박남정이 저리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기태의 중대 합격이 안전빵이 아닌 대기 2번이라는 유예가 붙은 조금 불안한 형태의 합격이었지만 앞서 합격했던 이 중 몇몇이 입학을 포기해준 덕분에 2월 6일에 박기태의 차례가 왔다.
순번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박기태나 박남정은 당연히 등록을 거부하지 않았고 말이다.
대기로 붙은 것도 붙은 거다. 대기로 붙었다고 따로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닌 만큼 합격은 축하 받아 마땅한 일이었고 그런 이유로 박기태의 집에서 술판이 벌어지게 된 거다.
"먹자, 오늘 배 터지게 먹고, 죽을 때까지 마시자."
오늘 정말 제대로 취할 요량인지 박남정은 물을 마시듯 들이켰다.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박남정의 걱정을 잠깐 했던 정호준은 이내 어른이니 알아서 할 거라 믿으며 소주병을 깠다.
"이제 와 열심히 하면 뭐하냐고? 거봐 충분히 할 수 있었잖아."
박기태는 정호준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감사를 전했다.
축하를 가장한 정호준의 핀잔에 박기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 모의고사 볼 때보다 점수가 잘 나와줘서 나도 놀랬어. 축하해줘서 고맙다. 너도 서울대 합격 다시 한번 축하해."
술을 다 받자 이번에는 박기태가 정호준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족집게 과외가 효과를 톡톡히 봤고, 대기였다 합격했다지만 중대에도 합격할 수 있는 놈이 나 때문에 경기권에 갔다니.'
박기태는 정호준이 회귀 전 항상 가슴 속 한구석에 품고 있던 의문의 답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경기권 대학교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인서울을 쳐주는 사회 풍토에서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못했다는 것에 정호준은 다시 한번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죄책감을 잊기 위해 음식에 집중했다.
'음식이 다 맛있네?'
호텔에 출장 뷔페를 시킨 건지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술을 받아먹고 안주로 음식을 주워 먹으면서 몇 차례 술잔이 오고 갔을 무렵 정호준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갖게 되었다.
'일단 나도 그렇고 기태 녀석도 그렇고 과거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됐는데, 이게 과연 기태 녀석에게 기뻐만 할 일인지 모르겠네.'
성공이란 것의 기준이 그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으로만 정해지는 건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불행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정호준이 지켜본 바로 박기태는 물질 면에서만이 아니라 직업에서 오는 만족도 또한 높았다.
즉 자신의 직업과도 꽤 잘 맞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박기태는 부모의 재산을 제외한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며 벌어 들인 수익만 놓고 보면 강서고 3학년 졸업생 중 가장 성공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을 벌었었다. 그것도 30대 초중반에.
'녀석이 회귀 전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정호준은 성공이란 결과물이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생애가 집약되고 그 상태에서 운도 조금 따라줘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공부 환경, 친구, 인맥 등이 달라지고 당연히 경험하는 것 또한 회귀 전과 크게 다를 텐데.
과연 박기태가 회귀 전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이란 게 꼭 학력이 좋아졌다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증명한 게 바로 박기태였고 정호준은 박기태의 옆에서 박기태가 성공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 왔다.
그래서 더 심히 걱정되었다.
이번에도 녀석이 큰돈을 만질 수 있을지가 말이다.
앞에 말했던 대로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많으면 사는 것이 평안해지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입시에 성공해도 문제네.'
실패한 건 실패한 대로 미안하고 입시에 성공하니 또 성공한 것 나름대로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함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계획대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을 넘어 박기태의 인생까지 바꿔버린 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정호준은 여러모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음식이 정말 맛있었음에도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
그쪽 업계 사람들이 원래 술을 잘 마시는 건지, 아니면 박남정이 잘 마시는 건지 술을 물 먹듯 먹는데도 먼저 취한 쪽은 박기태와 정호준이었다.
꾸벅! 꾸벅!
처음 겪어본 성공이라 할 수 있는 일에 성취감을 느끼고 행복해졌는지 그의 집에서 실수한 것에 대한 반성도 없이 박기태는 술에 떡이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옛날이야기부터 일 이야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술을 퍼붓던 박남정은 박기태가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꾸벅이며 졸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태야, 기태야? 안에 들어가서 자!"
"아냐, 나 안 자."
박기태가 방에 들어가 자라 말해도 손을 뿌리치며 술꼬장을 부리자 고개를 돌려 빈병을 찾았다. 박남정은 상 밑에 소주 7병, 맥주 2캔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호준아, 기태 녀석을 방에다 들여보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래?"
술에 취한 여자도 무겁다는데, 남자야 오죽하겠는가?
박남정의 도움 요청에 정호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아, 네! 물론이죠."
박남정이 서 있는 반대편인 박기태의 왼편으로 다가가 왼쪽 어깨를 잡았다. 정호준과 박남정은 박기태의 양어깨를 붙잡고 들어 올려 부축했다.
털썩!
술병 차지 않게 주의하며 박기태를 방의 침대에 눕혔다.
"어휴, 적당히 좀 마시지."
오늘 마시고 죽자며 술을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호준이 술 잘 마시는구나? 상대가 없어서 어떻게. 아저씨들이랑 같이 마실까?"
술에 떡이 되어 필름이 끊긴 아들과 달리 3병 반을 마시고도 정호준이 술 냄새만 풍길 뿐 이상이 없어 보이자 정호준의 주량을 칭찬했다.
"아뇨, 저도 더 못 마십니다. 지금 거의 한계에요. 실례하기 전에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죠."
"왜? 더 안 마시고?"
박남정도 아예 안 취한 건 아닌지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박남정까지는 이해해도 박남정 친우분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정호준이 왜 술을 먹겠는가.
"너도 취했는데, 오늘은 자고 가지 그러니?"
"집 바로 코앞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