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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어온 중년 남성 중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이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우우웅!
약속 시간을 5분 정도 남겨 놓고 카페에 도착하는 걸 보고 혹시 했는데, 역시 설마는 사람을 잡았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스포츠 업계나 연예계처럼 1살이라도 어린 게 신체 능력이나 대중을 향한 어필 면에서 단점보단 장점으로 작용 될 때도 있지만 이런 예외의 업계 몇몇과 구직을 할 당시를 제외하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어린 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없다.
오랜 전통인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사고관과 일제강점기, 군사정권을 거치며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해온 사회에서 비롯된 선후배 간의 관계, 나이 대우는 어리다는 것을 단점이 되게 만들었다.
지금 정호준이 겪게 된 상황도 그랬다.
전화를 걸자마자 정호준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확인한 두 중년의 표정은 누가 봐도 그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굳었다.
저렇게 대놓고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상대에 대한 결례였지만 정호준의 나이가 어린 탓인지 표정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린 게 자기들에게 장난을 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새인데?'
굳어진 표정을 풀지 않는 모습만 봐도 대충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참자.'
어리다고 기본적인 예의도 안 지키는 무례함에 화가 치밀어 오르려 했지만 꾹 참았다. 이전에 미팅을 가졌던 박제균 감독도 정호준이 어리다고 잠깐이지만 표정이 굳지 않았던가. 물론 박제균은 정호준과 함께 나온 박남정을 봐서 곧바로 표정 관리하는 노력을 보였지만 말이다.
'감정 잠깐 상하는 걸 참는 거로 수 억을 버는 거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저번처럼 중재자를 데려온 것도 아니니 아예 이해 못 할 반응도 아니고.'
이성으로 분노를 누르며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십시오, 전화로 투자 문의를 드렸던 정호준입니다. 아직 약속 시간이 안 됐는데, 일찍 오셨네요."
중간에 한 번 꼽을 주긴 했지만 말이다.
"'내 신부는 여고생'의 감독을 맡은 강호준입니다."
"컬쳐캠미디어 대표 박순식입니다."
하지만 비꼼을 알아들은 것은 정호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소영 변호사 뿐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게 아니었기에 꼬아 듣지 않는 이상 그냥 '일찍 오셨다'로 들렸다. 더군다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자신들이 감정조절을 안 하는 결례를 범했음에도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정호준의 모습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쪽은 제 법 자문을 맡아주실 이소영 변호사님입니다."
"한빛로펌에서 나왔습니다. 이소영입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소개를 나눴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시 침묵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려 했고, 비협조적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보시는 것처럼 제 나이가 어린 건 맞지만, 그래도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나이를 보지 마시고 제가 가진 돈을 봐주시죠."
"얼마나 투자하실 생각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단 마실 것부터 주문하시죠. 저희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요. 그냥 앉아만 있기 그래서 먼저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뭐로 드시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자 그나마 이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는지 박순식 대표가 반응했다. 다짜고짜 액수를 묻자 정호준은 템포를 조절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정호준이 커피를 사겠다고 말했지만 박순식과 강호준은 정호준의 호의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돈으로 커피를 주문해 받아왔다.
'정말 제법이네.'
능숙하게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정호준의 행보를 지켜본 이소영은 정호준이 대단하단 생각을 가졌다.
커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기는 것을 확인한 정호준은 다시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까 액수를 물으셨죠. '내 신부는 여고생'에 8억 투자하고 싶습니다. 제 투자 받으시겠습니까?"
푸훗! 콜록! 콜록!
박순식 대표와 정호준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강호준은 사레가 들렸는지 커피를 내뿜고 기침을 해댔다.
정호준이 외견으로 파악되는 연령대의 청년들보다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박힌 첫인상과 아직 설익은 핏덩이 같은 외견에 박순식과 강호준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이 미팅이 중요하다는 긴장 또한 없었다.
그런데 정호준의 입에서 덜컥 억대, 그것도 1~2억이 아니라 10억에 가까운 돈이 튀어나왔으니 두 사람이 놀라는 것도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죄송합니다."
박순식과 함께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던 이가 자신이 보인 추태를 사과한다.
"강감독, 조심 좀 하지. 투자자님 앞에서 그게 뭔가?."
박순식은 강호준을 질책함과 동시에 표정을 관리하며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띠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아닌 돈이 보여준 마법이었다.
'낯짝이 두껍네.'
눈앞에서 사람이 변하는 걸 목격한 정호준은 안면에는 미소를 띠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욕했다.
주식 투자할 때 유망한 기업이나 대기업에 돈을 투자하듯 영화 업계도 마찬가지다. 시놉시스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찍는 감독이 흥행에 성공한 적 있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영화가 괜히 감독의 예술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투자자들의 그런 심리를 고려하면 컬처캠미디어와 강호준 감독이 힘을 합쳐 만드는 영화 '내 신부는 여고생'은 투자 받기 썩 좋은 형편이 못 됐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내보일 만큼 큰 성공을 거둬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돈을 쥔 투자자들에게 그 무엇보다 크게 느껴지리라.
'잡아야 된다. 저 돈만 유치하면 앞으로가 수월해진다.'
정호준이 투자하겠다고 말한 8억은 그들에게 정말 큰 의미의 돈이다.
박순식과 강호준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투자자를 모집했지만 투자 받은 돈은 16억이 전부였고 이는 그들이 사전에 제작비로 계산한 35억 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들에게 8억은 투자 받은 돈이 25억에 달한다고 반올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액수였고, 투자자들을 만나 설명할 때 제작비의 반절이 넘었다.
"입금은 언제쯤 가능하십니까?"
"계약서를 작성한 뒤 나흘 내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정호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순식은 가방 안에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정호준의 투자금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달까?
"오래 기다리셨네요. 계약서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나' 조항의…."
보통 표준화 된 계약서를 사용할 법도 한데 박제균과 만났을 때는 별말 없이 OK를 했던 이소영 변호사가 몇 가지 조항에 태클을 걸었고, 몇 차례 이야기가 오고 간 뒤에 계약서가 수정되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박순식 대표가 정호준과 이소영에게 양해를 구하곤 볼펜으로 여기저기 고쳐진 계약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미리 사람을 대기시켜놨는지 나간 지 13분쯤 지났을 때 수정된 계약서를 들고 카페로 다시 돌아왔다.
"계약도 잘 마쳤는데 식사 한 끼 같이 하셔야죠?"
초면에 무슨 무례를 저질렀는지 기억도 안 나는지 투자금을 유치했다고 희희낙락하며 식사 자리를 갖자는 박순식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정호준은 처음으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울 뻔했다.
'참자, 참아.'
정신이 나갈 것 같음에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냈다.
"자리는 영화의 성공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했으면 좋겠네요. 저녁에 또 한 군데 들려야 할 곳이 있어서요."
"아, 투자하실 곳이 또 있나 보군요."
"예, 뭐 그렇죠. 그나저나 조언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짧은 소견이지만 영화는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찍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섹스도, 폭력도 없는 그런 영화요."
감독의 재량을 침범하는 정호준의 발언에 강호준 감독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극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150억을 들여 제작한 전쟁 영화 '태극기 흩날리며'가 곧 개봉을 하니까요. 그리고 '태극기 흩날리며'는 '내 신부는 여고생'이 개봉할 때쯤에 맞춰 극장에서 내려오겠죠. 짧은 텀을 두고 나온 자극적인 영화에 관객들이 흥미를 가질까요? 아니면 식상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돌릴까요? 저는 전자보단 후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연출 면에서 당신이 박제균 감독보다 더 잘 해낼 수 있겠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괜히 자존심을 자극해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건 다름 아닌 본인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충고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개입 때문에 투자금을 쉽게 모아 영화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 눈 딱 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실패하면 날아가는 건 집을 담보로 빌린 피만큼 아니 피보다 소중한 그의 돈이었으니까.
*****
"다음 미팅은 몇 시입니까?"
박순식 대표와 강호준 감독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저들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이소영은 정호준을 보며 물었다.
"미팅요?"
"컬쳐캠미디어쪽 사람들한테 미팅이 남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대놓고 싫다고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라 의례상 한 말입니다. 저도 기분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서요. 저렇게 무례한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고 싶진 않네요."
"풉! 그런가요?"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인내심 넘치던 모습만 보이던 정호준이 처음으로 자기 나이에 맞는 치기를 보이자 이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낫다.
큼! 큼!
이소영의 웃는 걸 처음 본 정호준이 왜 웃냐는 듯 이소영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다시 로펌으로 들어가시나요? 아니면 저번처럼 곧바로 퇴근하시나요?"
"여기서 사건 파일 좀 더 보다가 집에 들어가야죠."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호준은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갔다.
*****
변호사 출장비, 수험비, 원서접수비, 10월. 11월, 12월, 1월. 약 4개월에 걸친 생활비를 상을 치르고 남은 조의금 978만 원에서 빼다 사용해서인지 현금은 5,663,400원이 남았고, 생명 보험금이 들어왔던 통장에 남은 돈 400만원을 합쳐 966만원이 정호준의 수중에 남은 전 재산이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집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소파에 앉은 채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심호흡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싶은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심장 박동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안함이 가시질 않는다. 실패하는 순간 집에서까지 쫓겨 난다.
정호준이 일부러 지우지 않은 부모님의 마지막 흔적이 누군가에 의해 지워질 위기란 거였다.
'왜 자꾸 떠는 거야.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성공한다는 미래를 보고 한 투자지만 전 재산을 투자한 만큼 불안함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호준은 철인과 같은 심장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는 그저 또래보다 경험이 많은 그냥 평범한 한 명이었다.
그의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물으리라. 이렇게 떨면서 후회할 거면 그냥 천천히 코인을 기다리지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쏟아붓냐고.
'그치만 마냥 코인만 보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어.'
막연하게 코인붐만 기다리기엔 정호준은 너무 젊었다.
'정말 큰돈을 벌고 싶고,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으면 스타트업에 투자해야지.'
특히 미국의 스타트업에 발을 걸치면 더 큰 성과를 거두리라. 하지만 여기서 하나 문제가 발생한다. 기껏해야 이십몇억 쥐고 있는 자신이 자국도 아니고 남의 나라 스타트업에 어떻게 발을 걸치냐는 것.
정호준이 살아가는 세상이 21세기가 아닌 20세기 막바지 90년대였다면 모든 것을 다 하지는 못해도 20억 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발휘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21세기였다.
게다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지만 아직도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백인도 아닌 동양인(황인)이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았다. 돈이 하나의 신분이 된 자본주의의 끝판왕 미국인 만큼 돈이라도 억소리 나게 많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부자가 되고 싶다면, 정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리스크는 짊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