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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진호는 가족이 아닌 타인이 이렇게 찾아온 것 자체가 쉽든 어렵든 부탁을 하기 위해서란 걸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은행에서 일한다고 금융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자주 있었고, 별로 안 친했던 동창이나 8촌뻘 되는 살면서 한 번도 일면식 없는 친척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 밥도 먹었겠다 내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한 이유를 들어볼까?"
부탁을 들어줄지 거절할지는 아직 내용을 듣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어쨌건 정호준은 절친인 정철우의 자식이다. 부모와 사별하고 세상에 홀로 남은 절친의 자식이 자신을 찾아왔는데 그래도 밥은 먹여 보내는 게 도리라 생각한 기진호는 그런 이유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주택담보대출 제도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주택담보대출? 담보대출만 받을 거였으면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었겠지. 정확히 뭘 부탁하고 싶은 거야?"
평범하게 제 1금융권에서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거였다면 굳이 기진호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정부로부터 공인 받아 제 1금융권에 속해 있는 은행의 직원이 정호준을 상대로 대출 가지고 뒤통수를 칠 리도 없고. 자신을 통해 대출을 받으면 일 처리가 조금 빨라지거나 절차가 조금 간소화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면 이미 대출이 승인되고도 남았을 거다.
"주택을 담보로 잡고 대출 받을 수 있는 돈이 매매가의 70%까지 된다고 알아보고 갔는데, 막상 은행을 가니 70%는커녕 60%도 안 해주더라고요. 아저씨 저 돈이 필요합니다."
만약 정호준이 30이 넘은 직장인이었다면 주택담보대출로 빌리는 돈으로 모자라면 추가로 신용대출까지 받을 수 있지만 정호준은 이제 막 스물인 청년에 불과했다. 은행이 이제 갓 스물 된 정호준의 뭘 보고 돈을 빌려주겠는가.
'설마 가해자 측이랑 합의가 잘 안 됐나? 그래서 소송 때문에 돈이 필요한 건가?'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으나 대놓고 물어보기 껄끄러운 내용이었기에 꾹 삼키며 다른 사안을 물었다.
"담보로 잡을 아파트는 상속 문제를 해결한 상태냐?"
"예, 보험 회사에서 지급한 사망보험금으로 상속 문제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담보로 잡을 목동 7단지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정철우와 강혜순의 이름으로 지급된 사망보험금을 사용했다는 정호준의 대답에 기진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합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구나.'
만약 가해자로부터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았다면 정호준이 부모의 목숨 값이나 다름없는 사망보험금을 상속세를 내는 데 사용할 리 없다. 기진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큰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3심까지 갈 것을 염두하고 말한 거겠지. 학비랑 생활비도 필요할 거고.'
정호준이 양친의 장례식을 치른 게 겨우 3개월 전이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가 낫기엔 아직 많이 일렀다. 기진호는 정호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배려했고, 그 바람에 혼자 북 치고 장구까지 치며 큰 착각에 빠졌다.
정호준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버린 기진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최대한 많이 대출 받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도와주마.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친우는 이미 죽고 없지만 정호준을 도와주는 게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 정철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 생각한 기진호는 도와주겠다고 말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란 걸 고지시키며 무한정 퍼주는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정호준이 기진호를 만나러 간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월 16일 금요일. 정호준은 다시 한번 은행을 방문했다.
'정말 힘 좀 써주셨나 보네.'
통장으로 4억이란 돈이 입금됐음을 확인했다.
기진호가 한 지점을 좌지우지하는 지점장은 아니었지만 기진호의 경력과 직급이면 일개 주택담보대출을 신경 쓸 레벨은 아니었던 터라 그런 기진호가 힘을 써준 결과는 놀라웠다.
정호준은 아파트 매매가의 70%가 아닌 80%, 4억을 대출받았다. 그것도 '3년 만기, 고정금리 2%, 만기일시상환.'이란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없는 조건으로.
'너무 힘 써주신 거 아닌가? 괜히 문제 될까 겁나네.'
그렇게 정호준은 탈이 나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로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렸다.
*****
돈이 입금된 통장을 갖고 집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핸드폰을 쥔 채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는 아저씨께 부탁하면 안 되겠지?'
정호준이 '태극기 흩날리며'에 합의금 20억을 꼬라박은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게 바로 박남정이다. 그런데 정호준이 집까지 담보로 잡고 돈을 마련해 다른 영화에 또 투자를 감행하려는 정호준을 보고 뭐라고 말하겠는가?
'미친놈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지.'
점잖게 이야기해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며 몇 시간을 부여잡고 만류를 이어갈 거고,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의 앞에서 욕을 하는 걸 들어본 적 없는 박남정이 욕설을 뱉을 수도 있다.
'모르면 좋고, 알게 되시더라도 최대한 늦게 아시는 게 좋겠다.'
박남정에게 연락하는 건 사서 태클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후보군에서 제외하자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연락할까? 하지 말까?'
정호준은 20분을 넘게 마루를 왔다 갔다 하며 갈등을 이어갔다.
속으로 끙끙 앓으며 고민을 이어가던 정호준은 기어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의 명함을 꺼내 적힌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 박제균 감독님, 1월 5일에 투자 만남을 가졌었던 정호준입니다. 혹시 연락 가능하십니까?
하아~
용기를 내 문자를 보내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미팅을 잡혀서 당장 연락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용건을 여쭤봐도 될까요?
- 바쁘신데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 신부는 여고생'란 작품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나 제작사와 다리를 놔주실 수 있나 해서요. 그리고 이 건은 박남정 감독에게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내 신부는 여고생'이란 작품은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업적을 세우고, 첫 천만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 부대'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스크린에서 내려온 '태극기 흩날리며'만큼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2004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중에선 두 번째로 좋은 성과를 내며 무려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을 생기게 만드는 영화였다.
'내 영화에 20억이나 투자해 놓고 또 투자를 감행한다고? 정말 재벌 3세인가?'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핸드폰 자판을 눌러 문자를 보냈다.
- 어려운 거 아니니까 연락처 알아보고 문자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대로 박남정 선배에게 이 건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정호준에겐 다행스럽게도 박제균은 박남정에게 정호준의 정체에 대해 일절 언질을 듣지 못했다. 그 바람에 박제균의 착각은 아직 진행형으로 유지 중이었다.
박제균이 정호준에게 순순히 협조해주는 이유였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기대하겠습니다.
*****
대한민국은 좁고 업계는 더 좁아 건너 건너 아는 사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부탁한 지 하루 만에 박제균은 '내 신부는 여고생' 감독인 강호준 감독과 제작사인 컬쳐캠미디어의 연락처를 문자로 넣어주었다.
"네, 컬쳐캠미디어입니다."
박제균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자마자 정호준은 컬쳐캠미디어로 전화를 걸었다.
"'내 신부는 여고생'에 투자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사장님께 연결해드리겠습니다."
21세기 들어서며 인터넷이 비약적으로 발전 중이라지만 얼굴 한 번 안 보고 전화상으로 처리하기엔 돈의 단위가 너무 컸다.
"저는 오늘도 괜찮습니다."
"아, 저도 오늘 시간 괜찮습니다. 혹시 오늘 미팅 잡아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시죠."
"장소는 어디가 편하십니까? 편하신 대로 맞추겠습니다."
서로가 간절해서일까? 미팅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처럼 빠르게 잡혔다. 좋은 일이 있었던 곳엔 좋은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믿는 정호준은 약속 장소를 박제균과 계약을 성사시켰던 카페로 잡았다.
박순식과 약속을 잡고 연락을 끊은 정호준은 또 한 번 번호를 눌러 통화를 걸었다.
몇 차례 통화연결음이 들린다.
"여보세요."
핸드폰 수화기를 통해 여성 특유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이소영 변호사님 핸드폰 맞죠? 오늘 출장 상담 가능하십니까?"
"예 가능합니다만, 의뢰인님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2004년 1월은 아직은 주 5일 근무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기에 토요일도 당연히 근무 일수에 포함되었다.
"정호준입니다. 열흘 전쯤 충정로에 있는 카페 풍금으로 출장 상담을 요청했었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아 기억납니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그때처럼 충정로 풍금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기왕 사람을 쓰는 거면 일면식 있고 같이 일해본 적 있는 사람을 쓰는 게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일하는 것보다 낫다. 함께 일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박제균과 계약할 때 별다른 잡음 없이 마무리됐지 않던가.
*****
전처럼 박남정의 차를 타고 가는 게 아닌 만큼 정호준은 여유 있게 집에서 출발했다. 시간적 여유를 많이 둔 만큼 카페 '풍금'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이소영 변호사가 두 번째로 도착했다.
"또 뵙습니다. 이번엔 혼자 오셨네요?"
"예, 저번처럼 다리를 놓아주실 분이 필요 없어서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 차례를 마친 이소영은 정호준의 옆에 앉은 뒤 가방에서 A4 무더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딱 봐도 사건 파일이었다.
'어쩐지 일찍 왔더라니. 출장을 핑계로 사무실에서 일찍 나온 건가?'
변호사가 됐든 의사가 됐든, 사회적으로 좋은 취급을 받는 직종도 상사란 존재가 있는 한 부담스러운 법이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마실 거라도 시키고 기다리죠. 제가 사겠습니다. 뭐로 주문해드릴까요?"
조금 있다 컬쳐캠미디어측 관계자가 오면 음료를 주문할 거여도 아무것도 안 시킨 상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기다릴 만큼 정호준의 낯짝은 두껍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것만 달랑 구매하기도 뭐 했다.
"안 마셔도 되는데... 그럼 카페라떼 따듯한 거로 마시겠습니다."
이소영은 예의상 거절 멘트 한번 날린 뒤 원하는 음료를 이야기했다.
-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준은 커피를 가져와 이소영에게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정호준의 얼굴을 보며 감사 인사를 건넨 이소영은 다시 자기 할 일을 했고, 정호준은 이소영이 신경 쓰지 않도록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띠링!!
약속 시간까지 5분을 남겨 놓고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