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
정호준은 박제균의 시선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지워지는 것을 보며 박제균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박제균에게 착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진 않았다.
자신을 어렵게 대하게 만드는 착각이라면 착각해서 나쁠 게 없다.
얕보거나 무시하는 것보단 어려워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추가 투자 모집할 때 투자했다고 처음부터 투자한 사람들이랑 수익금 배분이 다르지만 않다면, 저는 감독님 영화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정호준은 '추가 투자를 받을 때 투자한 이가 처음 투자한 이보다 불이익을 받는지' 아니면 '똑같이 대우를 받는지'와 같은 업계의 관행을 몰랐다. 물어볼 수 있는 대상이 가까이에 있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호준이 '태극기 흩날리며'에 합의금으로 받은 돈을 투자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게 박남정인데, 정호준이 아무것도 모르는 티를 내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물어보는 즉시 박제균과 연결해주며 정호준을 도와주려던 마음이 반대로 돌아설 것이다.
그래서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정호준이 할 수 있는 건 그렇듯 아니든 간에 이렇게 만나서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다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어느 정도나 투자하실 예정이십니까?"
일단 액수나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박제균은 정호준에게 투자금의 규모를 물었다.
"저 조건만 받아주시면 맥시멈으로 20억까지 투자 가능합니다."
"호.. 호준아!!"
정호준이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합의금 전부를 쏟아 넣겠다 말하자 옆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박남정은 황급히 정호준의 이름을 부르며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박남정의 만류보다 박제균의 질문이 빨랐다.
"방금 20억이라 들었는데, 제가 들은 게 맞습니까?"
20억이면 박제균이 홍보비로 계산했던 돈보다 조금 많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돈이 필요해질 수도 있는 게 이쪽 업계임을 잘 알고 있기에 20억을 전부 받고자 했다.
'조금 넉넉하게 받아둔다고 나쁠 건 없잖아?'
복잡하게 여기저기 찌르고 다닐 필요도 없고 괜히 추가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자존심을 상할 필요도 없다.
영화감독으로써 성공한 인생이라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녀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게 박제균의 현재 위상이다. 성공한 이에겐 돈 만큼 중요한 게 명예고 자존심이다.
대한민국 영화업계에서 최초란 타이틀을 가진 감독, 대한민국 영화계의 판도를 바꿔 놓은 감독이라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는 게 바로 박제균이란 남자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애정과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다.
"예, 정확히 들으신 거 맞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세금은 어디에나 있다.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는데도 세금을 내야하고. 그렇게 세금을 내고 등록한 자동차를 사용하는 데도 분기별로 또 세금을 걷어간다. 일상적으로 사 먹는 과자나 음료수와 같은 군것질거리에도 부가가치세란 명목의 세금이 포함되어 있고, 음식점에서 사 먹을 때조차 메뉴판에 적혀 있는 가격은 세금이 포함되어 있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세금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유착된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이지만 유일하게 세금이 면제되는 경우가 있다.
'형사합의금.' 더 정확히는 폭력 피해 등으로 다쳐 가해자로부터 받는 형사합의금은 세금 신고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 이유로 형사합의금으로 받은 20억은 20억에서 한 푼도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 이쪽 업계에선 100억이 넘는 영화를 꺼립니다. 알고 투자하시는 겁니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박남정의 모습 때문에 박제균은 꿀꺽 투자금을 삼키는 대신 현재 업계가 돌아가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박제균은 투자자를 소개해주며 고민거리를 한 번에 날려준 박남정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박남정이 끼어들기 전에 정호준이 더 빨리 대답했다.
"예, 알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건 감독님께서 '기생피리'를 찍으실 때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감독님은 우려와 염려로 가득했던 시선을 경외와 감탄으로 바꾸셨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감독님께서 다시 한번 보여주시죠. 100억을 넘게 들인 한국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든 영화에 한 발 걸치고 싶었던 정호준은 일종의 립서비스를 뱉으며 박제균의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정호준의 립서비스는 퍽 효과를 거뒀다. 박제균이 정호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말릴 수 없는 문제구나.'
언제 끼어들어 말려야 할지 전전긍긍하던 박남정은 정호준의 결심이 확고하고, 처음부터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모르되 자신에겐 정호준의 결정을 바꿀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계약서를 가방에서 꺼내는 박제균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 와서 함께 봐주세요."
박남정을 끼고 소개 받아 투자하는 만큼 계약서가 문제 될 소지는 크지 않다. 하지만 돈이 오가는 계약은 뭐가 됐든 확실한 게 좋은 법. 박제균만 허락하면 당장이라도 돈을 넣을 생각이었던 정호준은 중견 크기의 로펌에 변호사 출장 상담을 요청했고,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리 옆에 앉혀두었었다.
"한빛로펌 변호사 이소영입니다. 정호준씨에게 계약서 확인을 의뢰 받았습니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깔끔한 검정 양복을 입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이소영은 박제균과 박남정에게 명함을 건네 자신을 소개한 뒤 계약서를 읽어 나갔다.
이소영은 계약서를 다 훑고는 세 번까지 처음으로 돌아가 계약서를 검토했다.
"법적으로 문제 될 소지는 없습니다. 의뢰인께서 원하셨던 내용은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네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받고 난 뒤에야 정호준은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과 투자 금액을 적고 사인했다. 제작사인 박제균필름의 도장은 이미 찍혀있었기에 정호준이 서명을 마치고 지장을 찍은 것으로 계약은 성사되었다.
"투자금은 내일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마지막 마무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빠르게 입금하겠다는 정호준의 말에 박제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하나 꺼내 건넸다.
"오늘 투자하신 거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직 명함이 없습니다. 주신 명함은 잘 보관하겠습니다."
명함을 건네받은 정호준은 명함을 주는 대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정호준의 손을 부여잡으며 악수를 마친 박제균은 박남정을 보며 말했다.
"아직 일이 끝나질 않아서요. 바쁜 일 다 마친 뒤에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좋은 투자자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계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마자 박제균은 그렇게 박남정에게 양해를 구하곤 떠났다. 그리고 할 일을 마친 이소영 또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4명으로 꽉 찼던 테이블이 정호준과 박남정 둘만 남게 되었다.
"정말 괜찮겠니? 후회하지 않겠어?"
"네, 이미 계약서에 서명까지 다 했잖아요. 이미 정류장을 떠난 버스입니다. 돌이킬 생각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박남정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정호준은 충정로에 갈 때처럼 박남정의 차를 얻어 타고 목동으로 돌아왔다.
"호준아, 기태 녀석 내려오라 할 테니까 밥 먹고 가라."
"네? 집에 가서 먹으면 되는데요."
"오늘 아저씨가 네가 정말 어른이란 걸 많이 느껴서. 술 한 잔 따라주고 싶다."
박남정에게 도움 받은 게 있었기에 거절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때문에 박기태, 박남정과 함께 고깃집으로 가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박남정은 박기태와는 달리 사회생활을 오래 한 어른이었다. 과음을 하거나 술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한두 잔 함께 곁들인 정도.
박기태가 있는 자리에서 따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하진 않았고 부모님과 함께했던 식사처럼 편한 식사 자리가 되었다.
*****
생일이 지나 법적으로 처리할 게 많아진 정호준은 바쁘게 움직였다.
부친이 본인과 어머님의 명의로 들어두었던 보험 회사에서 지급한 사망 보험금 4억과 정호준이 거주 중인 목동 7단지 5억 1800만 원. 주식자산 7600만 원, '태극기 흩날리며'에 투자한 합의금을 제외하고도 총 9억 9400만 원가량의 자산을 상속 받은 상태였지만.
이는 아직 완전히 정호준의 것이 아니었다.
'세금을 내야 내게 되지.'
생일이 지나 법적인 족쇄가 완전히 사라진, 정식으로 성인이 된 정호준은 세무사를 만나 곧장 상속 절차를 밟았다.
정호준은 물려받은 10억 중 일괄공제되는 5억을 뺀 남은 5억에 대한 세금을 냈다. 1억에서 5억까지 지불해야 할 상속세가 20%에 해당하는 구간이므로, '1천만원+ 8천만원'. 총 9천만원을 세금으로 지불했다.
*****
상속 절차를 모두 끝마치고 목동 7단지를 자신의 명의로 바꾼 정호준은 두 번째 스텝을 밟기 위해 움직였다.
1월 13일 화요일.
아버지의 친우인 기진호가 부부장으로 있는 중소기업은행 영등포점으로 향했다.
정호준이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부친 정철우는 간혹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술을 마시곤 했다. 기진호는 그럴 때마다 매번 참석했던 아버지의 절친 중 한 분이다. 어렴풋이나마 정호준의 기억 속에도 있던 이였다.
"호준아, 혹시 어려운 일 생기면 이리로 연락해라."
절친의 아들이 혼자 남겨진 게 눈에 밟혀서 의례상으로 했을 확률이 다분한 말이지만 어쨌건 기진호는 정호준이 연락할 명분을 주었고, 마침 다음 스텝을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방문하기 전에 미리 연락했기에 기진호는 시간을 빼서 나와주었다. 근무시간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에 기진호는 점심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5분 일찍 도착한 정호준은 은행 입구에서 기진호를 기다렸고 12시 32분쯤 기진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잘 지내셨죠?"
"그럼, 잘 지냈지. 추운데 국물류로 먹자. 국물류 괜찮지?"
"예"
"그래. 여기 감자탕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그리로 가자."
간략하게 인사를 나눈 뒤 기진호는 앞장서서 걸었다. 정호준은 기진호의 뒤로 따라붙었고, 영등포 먹자골목에 위치한 감자탕집으로 이동했다.
"사장님. 여기 감자탕 '중'자 하나요."
자리에 앉자마자 기진호가 메뉴를 주문했다.
"사실 고생했다고 술 한잔 따라주고 싶은데, 근무시간이라서. 술은 다음에 하자."
"아닙니다."
"그래, 철우 녀석이랑 제수씨를 보내느라 호준이 네가 애 많이 썼다. 사실 내가 먼저 연락해서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호준이 네 나이가 몇 살이었지? 올해 고3이었나 아니면 작년에 고3이었나? 철우 녀석이 너 공부 잘한다고 그렇게 자랑을 했었는데."
"올해 2월에 졸업합니다."
정호준이 수능을 얼마 안 남겨두고 상을 치른 거란 계산이 선 기진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눈치 없고 상식 없다면 수능은 잘 봤냐 물어볼 법도 했지만 기진호는 영등포지점 부부장의 자리까지 오른 나름 상식인이었다.
상식적으로 부모가 수능을 한 달 앞두고 죽었는데 어떻게 수능을 잘 보겠는가. 대화가 끊기는 바람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수시로 서울대 지원했고 합격 통지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보지 않으셔도 돼요."
"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말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진호는 감탄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철우 녀석도, 제수씨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다."
미리 어느 정도 세팅 해 놓은 상태여서인지 감자탕이 담긴 냄비가 빠르게 나왔다. 종업원이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렸다.
감자탕은 맛있는 소리를 내며 보글보글 끓었다.
"많이 먹어라."
국자를 잡은 기진호가 큼지막한 뼈와 버섯을 그릇에 퍼서 서준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기진호는 정호준 것을 떠준 뒤 정호준의 그릇을 받아 자신의 몫을 떴다. 기진호와 정호준이 고기를 발라 먹는 사이 감자가 익었고 기진호는 또 한 번 정호준의 그릇에 고기와 감자를 떠주었다.
볶음밥까지 볶아 먹으며 식사를 배부르게 마친 뒤 물로 입가심을 마친 기진호는 마찬가지로 식사를 끝낸 정호준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래, 내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한 이유가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