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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 나라 국민의 삶의 질은 올라간다. 그리고 삶의 질과 노동 환경이 개선되면 개선될수록 사람들은 일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풀만 한 것을 찾는다.
스포츠, 컴퓨터 게임, 비디오 게임, 연극, 음악, 드라마, 개그 프로, 영화, 유흥, 성관계에 이르기까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개인마다 가지각색으로 다양했다.
다만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기는 것들은 민간 차원에서 끝나진 않았다. 돈이 되는 건 모조리 상업화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게 위의 엔터테인먼트라는 분야로 묶여 상업화가 되었고 몸집을 빠르게 부풀렸다.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묶인 산업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성장세를 보이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잘 만든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 편이 중저가 자동차 2만 대를 판매한 것과 같은 매출을 기록해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매출액만 동일한 선상에 있을 뿐 깊게 파고들어 순수익을 따지면 잘 만든 영화 한 편은 비슷한 매출을 일군 제조업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돈 나갈 때가 왜 이렇게 많나."
인건비, 원자재 값을 시작으로 공장을 돌리는 데 필요한 비용, 부품 값, 중간재, 유통에 필요한 물류비 등 차감해야 할 것이 셀 수없이 많은 제조업과 다르게 영화는 영화감독과 촬영팀, 배우들에게 지급할 인건비와 영화를 찍는데 사용했던 CG기술, 음향, OST, 장소 섭외에 필요했던 비용 등을 제하면 달리 빠져나갈 것이 없는 구조였다.
런닝게런티를 지급하기로 계약한 게 아니라면 영화가 얼마나 흥행했던 영화를 찍느라 소모한 위의 비용을 차감한 남은 과실은 영화감독이 소속된 제작사, 배급사, 상영관, 그리고 투자자들이 나눠 가졌다.
물론 그런 장점이 있는 만큼 성공할 옥석을 가리는 게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90년대 막바지의 한국은 한창 영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며 수요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생피리'란 차기작을 대중에게 선보여 600만 관객을 동원한 감독이 있다.
감독의 이름은 박제균,
한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찬사를 받는 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기생피리'를 통해 돈과 명예를 모두 얻게 된 박제균은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사 박제균필름을 창업했다.
'기생피리'에 투자했다 돈맛을 본 투자자나 '기생피리'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재미 보는 것을 손 빨며 지켜만 봐야 했던 다른 투자자들, 그리고 돈을 벌고 싶은 다수의 크고 작은 기업들은 박제균에게 찾아와 투자를 약속하며 다음 작품을 찍자고 재촉했으나 박제균은 양해를 구하며 차기작을 찍을 계획이 당장에는 없음을 알렸다.
그저 그가 설립한 박제균필름을 운영하며 시나리오 작가를 모으고 감독을 모집해 키우는 이른바 정비하며 후학들을 기르는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일종의 휴식기인 셈.
거의 5년에 가까운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박제균이 쉬는 동안에도 영화는 계속 만들어졌다.
30억에 달하는 돈을 사용한 영화 '기생피리'의 대성공은 영화계와 투자자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제작비로만 28억, 홍보비로 8억. 이만한 돈을 영화에 쏟아부은 건 한국 영화계에선 유례가 없다 봐도 될 정도였으나 언제나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다.
'기생피리'의 대성공은 투자자나 제작사 등이 영화를 제작 비용 증가를 예전만큼 신경 쓰지 않게 만들었다.
"기생피리'처럼 영화를 잘 빠지게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면 되잖아?"
조심스럽긴 했지만 영화에 투자한 이들은 그런 기대감을 품으며 투자했고 실제로 '절친', '엽기적 그녀', '우리 가문의 영광'과 같은 작품들은 작품은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제작비를 소모해 '기생피리'와 조금 못하거나 '기생피리'를 뛰어넘는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후발주자들의 실패와 성공을 지켜보던 박제균은 2002년 12월 말. '태극기 흩날리며.'란 제목의 전쟁 영화 시놉시스를 갖고 복귀해 투자자를 모았다.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던 때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투자금을 모을 거라 생각한 박제균의 계획과 다르게 투자자를 모으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박감독님. 이거 꼭 하셔야겠어요? 지금 이 바닥에서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성공하는 게 있으면 실패하는 건 더 많은 게 바로 영화 업계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패를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참사가 그가 복귀를 결정하기 3개월 전에 발생했다.
2002년 9월에 개봉했던 영화. 제작비로만 110억이 넘게 소모된 '성냥팔이의 재림'이 10만 관객도 넘기지 못하는 대실패를 이룩해냈다.
심영래의 '용질라', 조선우의 '성냥팔이의 재림'. 100억을 넘게 투자한 영화들이 하나같이 바닥을 기니 적게 잡아도 100억은 웃돌 제작비가 필요한 박제균의 시놉시스를 투자자들이 반길 리 없었다.
"오래 준비한 거네."
"하~, 그럼 일단 투자자들한테 시놉 돌리겠습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제균은 강행했다. '기생피리'의 박제균의 명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그 덕에 꾸역꾸역 130억이란 투자금을 모았다.
'그래도 박제균인데 괜찮겠지?'란 생각을 지닌 이들이 그의 영화에 투자한 것.
아직 자신의 이름값이 먹히는 것을 확인한 박제균은 2003년 2월 5일. 기자회견을 열고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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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에 생긴 신조어인 '국뽕'을 불러일으키고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6.25 한국전쟁을 다루는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 투자자 외에도 거물 투자자가 붙는다.
매년 한국 정부로부터 거대한 예산을 타 가는 국방부라 불리는 단체가 바로 거물 투자자의 정체였다. 전쟁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국방부란 거물 투자자 덕분에 투자에 대한 염려를 덜곤 했지만 박제균은 그렇지 못했다.
"시나리오 수정 안 하면 우리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국방부에서 박제균 감독의 시나리오에 태클을 걸며 투자를 받고 싶으면 '강제 징집'을 '자원입대'로 바꾸고 '보도연맹사건'과 주인공의 월북을 삭제하라 요구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수정은 없습니다."
역사적 고증이 담긴 영화에서 진실을 덮고 날조를 연출하란 요구도, 자신의 시나리오에 태클을 거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박제균은 국방부에 투자 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이유로 박제균의 '태극기 흩날리며'라는 여타의 전쟁 영화와 다르게 국방부의 투자와 지원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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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박제균의 영화에 투자를 안 하는 것을 넘어 전쟁 용품조차 일절 지원하지 않았다. 영화를 찍으려면 군복, 방탄모, 총기, 군용차 등을 투자비로 사야 하는 지경에 놓였다.
"내가 이 영화 반드시 성공시킨다."
이 악물고 성공을 다짐하며 전쟁 용품을 투자비로 구매했다.
그 탓에 2004년 1월 박제균 감독은 한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돈이 더 필요하다.'
홍보비로 사용하려고 나눠 놓았던 돈까지 모두 사용해 버려 추가 투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은 도저히 추가 투자를 요청할 형편이 못 되었다.
2003년 7월에 개봉한, 제작비로만 약 126억이 소모된 애니메이션 극장판, '원더풀 데이'가 50만도 못 넘기고 극장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는 100억을 넘기면 안 되나?'란 생각이 영화에 투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투자자들의 머릿속에 자리했다.
21세기 과학 문명 사회에서 징크스를 믿는 것도 웃긴 일지만 하나같이 실패를 거듭하니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리는 게 마냥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촬영 중 국방부와 분쟁을 만들고 중간에 표절 문제까지 생겼던 박제균의 영화에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
자존심을 죽이고 투자사에 추가 투자를 부탁할지, 자신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끌어와야 할지.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지 머리가 깨질 듯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차에 박제균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우우우웅!
진동으로 해 놓았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 박남정.
평소에 먼저 연락 안 하는 걸로 유명한 이가 연락을 했기에 의아하단 생각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박감독, 잘 지내지?"
"아, 선배님 오래간만입니다. 어쩐 일로 연락주셨습니까?"
"영화 찍느라 한창 바쁜 거 아는데, 전화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지금 잠깐 쉬는 중이었습니다. 통화 가능합니다."
박제균의 응답에 박남정은 잠깐 머뭇거리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박감독. 혹시 추가 투자 받을 의향 있어? 박감독 영화에 투자하고 싶다고 다리를 놔 달라는 투자자가 있어서."
가뭄 중 단비와도 같은 말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자 박제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였다. 잠깐 멈칫하며 볼을 꼬집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던 박제균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그냥 전화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만나시죠.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투자자랑 같이 나갈 테니까 계약서도 들고 나와.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쓸 수도 있잖아."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박제균은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1월 5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까지 빠르게 선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 투자금이 필요한 게 맞았나 보네? 대체 호준이 놈은 뭐 하는 놈이야?"
속전속결로 약속까지 잡은 박제균의 행보에 정호준의 말처럼 정말 투자금이 필요했음을 확인한 박남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놈이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분에 넘치는 친구를 사귀어서 위험할 것 같아 걱정해야 하나?"
*****
1월 5일 월요일.
정호준은 박남정과 함께 충정로에 위치한 카페로 이동했다.
정호준과 박남정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박제균은 보이지 않았다.
"음료는 나중에 박감독 오면 같이 시키고 일단 자리 잡고 앉아 있자. 네가 자리 좀 맡아주겠니. 나는 밖에서 담배 한 대만 피고 오마."
"예, 자리 잡아 둘게요."
"그래 부탁한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정호준은 박남정과 웃으면서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호준입니다."
정호준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박제균은 눈을 깜빡이다가 '선배님이 말씀하신 투자자가 저 아이냐는' 이야기를 담아 박남정을 쳐다봤다.
최소 억 단위는 투자를 받아야 하고 박남정에게도 그 정도는 투자할 것 같다고 미리 전해 들었었다. 그런데, 수억 원을 투자할 투자자라 받아들이기에 정호준의 얼굴이 너무 앳됐다.
"자네가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내가 장난을 치겠어? 어리다고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앉아서 투자 설명해주게."
"추가 투자 모집할 때 투자했다고 처음부터 투자한 사람들이랑 수익금 배분이 다르지만 않다면, 저는 감독님 영화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정호준은 박제균이 머릿속으로 상황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먼저 용건을 꺼내 들었다.
'재벌 3세인가?'
당당하게 자기 할 말 다 하는 정호준의 모습에 박제균은 머릿속에서 당황과 의심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