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합의를 마친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겨울방학이 찾아왔고 해가 바뀌어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1월 3일 토요일.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걸려있던 모든 법적 제약과 보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생일 축하한다."
"고맙다."
남자들은 여자친구와 단둘이 생일을 축하하거나 함께 어울리는 무리에 여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상 케이크를 주고받으며 생일을 축하하지 않는다.
남자끼리 케이크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 해 봐라. 닭살 돋지 않나?
정호준이 모든 걸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이전 세대와 정호준의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인 90년생들까지는 남자끼리 케이크를 주고받는 걸 본 적이 없다.
그저 평소보다 좀 더 좋은 음식점에 가서 함께 식사하는 것. 이에 좀 더 덧붙이자면 20대 때까지는 선물을 주고받는 정도가 정호준이 직접 겪거나 주변을 통해 봐왔던 남자들의 생일 축하 방법이었다.
"밥 다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정호준의 생일을 맞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던 박기태가 고기를 썰며 물었다.
부친이 영화감독이어서인지 박기태는 영화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회귀 전의 정호준은 20대가 지나가는 동안 박기태의 손에 끌려 나와 영화를 관람하곤 했었다.
"다음에 보자. 오늘은 좀 피곤하네."
지금 개봉 중인 영화 반지 시리즈의 최종편과 올드보이는 영화관에 직접 가서 보진 않았지만 추석, 설 특집 등으로 방영되어 적어도 한 번, 많게는 두세 번씩 본 것들이다.
굳이 돈 내고 또 보고 싶진 않았다.
"그보다 혹시 아버님을 좀 뵐 수 있을까?"
"아빠를? 왜?"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전화로 말씀드리긴 좀 그런 내용이라서."
"그래?"
정호준의 대답에 반문하며 잠깐 생각에 잠긴 박기태가 이내 입을 열었다.
"으음, 근데 아직 촬영이 끝난 게 아니라서 시간 내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는데…. 혹시 중요한 일이야?"
"응. 중요한 일이야. 아버님께서 집으로 오실 시간이 없다면 촬영 중인 곳으로 내려가도 괜찮아."
직접 찾아가서 만나도 괜찮다는 정호준의 말에 무슨 내용인지 이야기하진 않지만 중요한 내용 같다고 판단한 박기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급한 일인가 보네. 일단 알았어. 집에 들어가서 바로 연락해 볼게."
"고맙다."
박기태가 바란 대로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PC방에 들려 시간을 보냈다. 200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게임 스타크레프트를 즐겼다.
둘이 붙어봐야 감정만 상하기에 한 편 먹고 2:2 팀플을 돌렸다. 선진화된 빌드를 사용하는 정호준과 10판을 돌리면 그래도 6판 이상은 이길 준수한 실력을 지닌 박기태가 팀플로 게임을 돌리니 말 그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옆자리에서 함께 돌리니 중간중간 의사소통도 원활해 역할 분담이나 반응도 확실했다.
"게임이 너무 쉽잖아?!"
잡힌 게임 모두를 압살하다시피 찍어누르며 승리하자 박기태는 이기기만 해서 기분이 좋았으면서 시시하다는 투로 말했다.
게임이 길게 이어지지도 않아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만에 무려 5판이나 되는 게임을 돌리게 되었다. 당연히 5판 모두 그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고.
"피곤하다, 이제 그만 나가자."
오랜만에 게임을 하니 즐겁긴 하지만 오래 게임 할 생각은 없던 정호준은 5번째 게임을 이기자마자 그만 나가자 제안했다. 박기태는 말은 안 했지만 정호준에게 아쉽다고 좀 만 더 하자는 눈치를 줬다.
박기태가 원하는 바를 눈치챘지만 정호준은 박기태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다.
1시 30쯤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PC방에 들려 1시간 30분쯤 게임을 돌리고 밖으로 나오니 겨울 하늘 특유의 흐릿 푸른 빛이 지고 어둠에 잠식된 상태였다.
"저녁도 같이 먹을까?"
"좋지."
집에 들어가 봐야 둘 다 혼자 밥을 먹어야 할 처지였기에 정호준이 먼저 제안했고, 박기태는 흔쾌히 수락했다. 목동 로데오 먹자골목으로 돌아온 정호준과 박기태는 순댓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는 헤어졌다.
*****
박남정이 정호준을 많이 아낀 탓일까?
아니면 박기태가 중간에서 그만큼 힘을 써준 걸까?
"나한테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고?"
정호준이 박기태에 부탁한 바로 다음 날. 1월 4일 일요일 12시쯤 박남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 아버님. 바쁘신 거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요청을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오히려 난 네가 나를 의지해주는 것 같아 고맙기만 한데?"
"전화 통화로 하는 것보다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불편하시지 않게 제가 촬영장까지 찾아가겠습니다."
"아니 이미 서울에 올라왔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어제 자로 촬영은 다 끝냈거든. 이제 한동안 여유 좀 있을 거다."
"폐를 끼친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 찾아뵈면 될까요?"
박남정은 정호준의 물음에 한 5초 정도 침묵하다 대답했다.
"으음, 길게 끌 거 없이 오늘 만나자꾸나. 한 4시쯤 우리 집으로 오면 될 것 같은데? 그때 시간 괜찮니?"
"예, 맞춰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태 녀석은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마. 편히 오렴."
전화로 약속을 잡은 정호준은 간단히 점심을 차려 먹고 설거지와 집안일을 하나씩 해치웠다. 그렇게 밀렸던 집안일을 모두 끝낸 뒤 목욕했다. 어른을 만나는데, 아니 부탁하러 가는 입장에서 청결은 당연히 신경 써야 할 요소다.
비록 박남정과 친분이 있더라도 선은 지키는 게 맞았다.
3시 30분쯤 집에서 나와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2잔 구매한 장호준은 박기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슈퍼에 들려 음료 선물 세트까지 하나 구매했다.
띵동!~
양손에 하나씩 쥔 채로 딱 시간 맞춰 벨을 눌렀다.
철컥!
"아니 양손에 뭘 잔뜩 사서 왔어? 어서 들어오렴."
박남정의 환대에 정호준 또한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죠? 바쁘실 텐데 식장까지 찾아와주셨던 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과외 알아봐주신 것도 정말 감사드리고요."
"이미 한 번 했잖아. 뭘 감사 인사를 두 번씩이나 하고 그러냐, 부담스럽게."
회귀 전에는 완전히 넋을 놓아 식순을 끝내고 그냥 멍하니 지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멘탈을 부여잡은 이번 생에는 장례식과 삼우제를 마친 뒤, 찾아와 준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당연히 그 명단엔 박남정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기태 녀석으로부터 아메리카노 즐겨 드신다고 해서 그걸로 사 왔는데, 괜찮으시죠?"
"아, 그럼! 난 다 마시니까 괜찮다. ,그나저나 다음부터는 이런 거 사 오지 말아라. 우리가 남도 아니고, 거리감 느껴지잖냐?"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뵙는 건데요. 빈손으로 올 수 있나요."
정호준으로부터 음료 선물 세트를 건네받은 박남정은 부엌으로 들어가 대충 안 보이는 곳에 내려 놓고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기태 녀석한테 들었다. 서울대 붙었다며? 정말 축하한다. 네 부모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거야."
"아, 예.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태 녀석은 발표 났나요?"
"기태한테 못 들었니?"
"물어보려고만 하면 주제를 바꿔버려서요."
"정시 결과 발표는 이번 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이라 좀 더 지나서 나온단다. 근데 모의고사 때보다 확실히 잘 봤다더라. 과외가 돈값을 하긴 한 모양이다. 부모로서 아들내미 입시 준비하는 데 뭐라도 해준 것 같아 아저씨는 좀 기쁘다. 족집게 과외받을 생각은 어떻게 한 거니?"
"몇몇 녀석들이 족집게 과외를 받는 걸 봐서요. 저도 덕 많이 봤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한 차례 감사와 덕담, 입시에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이쯤 하면 운을 뗄 만큼 뗐는지 박남정이 먼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서, 상담하고 싶은 게 뭐니?"
"상담이라기보단 정확하게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정호준은 자신의 계획과 그에 대한 설명을 하나둘 풀어놓았다. 돈 이야기가 정호준의 입에서 나오자 표정은 한층 더 심각해졌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굳어진 박남정의 얼굴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명이 모두 끝낸 정호준은 조용히 박남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갈구했다. 그러한 정호준의 시선에 박남정이 침음성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위험하지 않겠니? 영화 산업이 보기엔 화려해 보이고 멋져 보이지만, 실제로 투자에 성공해 이익을 들고 가는 투자자는 드물거든. 그리고 네가 이야기한 감독님은 뛰어나신 분이 맞는데, 투자자 모집은 이미 작년에 끝이 난 상태다. 개봉예정일도 얼마 안 남았고. 영화도 이미 다 찍고 편집도 거의 마무리 지은 상태일걸?"
"네 그건 저도 다 압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잡음이 자꾸 생겼고, 감독님 본인께서 세우신 계획과는 많이 어그러진 상태예요. 자금 상황이 굉장히 빠듯할 겁니다. 제 투자 제안이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는 거라 생각 될 정도로요."
"그렇게 거액을 투자받았는데?"
박남정의 되물음에 정호준을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주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에 자신이 있으셔서 쌈지돈으로 꿍쳐둔 돈을 사용하시거나 아예 빚을 내실 수도 있고요. 그도 아니면 추가 투자를 받으시겠죠. 셋 중 하나를 선택하시기 전에 빨리 선수를 치고 싶습니다. 저는 인맥이 없어서 직접 이야기 못 하지만. 아버님께는 친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또래답지 않은 냉정한 분석력을 보여주었고 정호준의 이야기 또한 박남정이 그럴듯하다고 느낄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박남정은 껄끄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 돈이 의미 없는 돈도 아니고, 부모님의 목숨값이잖니. 그냥 네가 번 돈이었어도 투자를 만류하고 싶은데, 하물며 목숨값을 투자하겠다니…. 아저씨는 그냥 네가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그냥 들고 있어도 이 돈의 가치는 점점 줄어들 거에요. 저는 그게 싫습니다."
박남정은 투자에 실패해 똘똘하고 가능성이 창창한 아이가 망가질 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식인 박기태가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될 게 겁났다.
"대체 왜 그 영화에 투자하고 싶은 거니? 왜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성공할지 알 수도 없는 영화산업에 투자하려 해! 차라리 그 돈으로 오성 그룹 주식이나 강남에 건물을 사는 게 어떻겠니?"
재계 순위 2등만 하던 오성은 2001년도부터 미래 그룹을 제치고 재계 순위 1위가 되었다. 2001년에 죽은 미래 그룹의 회장과 달리 오성 그룹의 회장은 아직 건강했고 미래처럼 찢어지기엔 자식도 몇 안 되었다. 남자는 하나뿐이라 후계자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강남 부동산도 그랬다. 강남 땅값이 폭락하면 대한민국이 망하는 거란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돌 정도로 불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안전하게 돈을 불릴 투자처가 존재하는데도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디려는 정호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 투자라는 게 영화 찍는 시간과 극장에 걸렸다 내려와 결산하기까지. 근 1년은 묶여 있어야 하는 투자잖아요? 근데 지금 투자하면 3~4개월 만에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리고 성공할 거라 믿으니까 투자하는 거고요. 아저씨, 제가 보기보다 욕심이 좀 많습니다. 십 년 기다려서 2배 3배 먹는 정도는 제 성에 차질 않아요."
실제로 전생에 그랬다. 군 복무 끝나고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을 들으면서 이대로 그냥 돈을 놔두는 건 멍청한 일이란 걸 깨달았고, 장기투자로 오성 전자와 미래 자동차에 반씩 나눠서 투자했었다. 꽤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이 1회차였다면 박남정의 조언을 따랐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알고 있는데 그 돈을 묵혀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쪽박 차면 반타작도 못 건질 수도 있어. 그건 제대로 알고 이야기하는 거니?"
"실패할 리 없지만 실패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하아~ 일단 연락은 해보겠다. 너무 기대하진 말고."
정호준의 간곡한 부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간절한 시선에 박남정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