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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큰 돈이 생기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돈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을 사는 사람.
그리고 갑자기 생긴 큰 돈 때문에 주체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사람.
김철수는 전자에 속한 현명한 이였으나...
나이가 어려서일까? 아들인 김창호는 부친과 달리 후자에 속했다.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계획을 세울 정도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알고, 미래를 예측하는 판단력 또한 나쁘지 않았던 김창호였으나 돈에 붙어 있는 무형의 요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꽃에 벌과 나비가 꼬이듯 김창호에게 붙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어 보려는 이들이 달콤한 말을 뱉으며 주변에서 맴돌았다.
옛 왕들이 괜히 간신을 가까이 뒀겠는가?
치켜세워주고 띄워주는 감언이설이 그만큼 달콤했으니까 나쁜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둔 거다.
김철수는 그런 감언이설에 휘둘리지 않았지만 그의 자식인 김창호는 환심을 사기 위해 하는 소리를 알면서도 그에 익숙해지며 조금씩 조금씩 나쁜 쪽으로 변해갔다.
부친인 김철수가 또 한 번 대박을 낸 게 결정타로 작용했다.
김창호가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철수는 전라도에 자리를 잡으려 했었다. 하지만 김창호는 서울에서 생활하길 원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승낙한 뒤 사정이 변했다.
서울에서 전라도까지는 오고 가기 너무 먼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충청도. 더 정확히는 충청남도 연기군에 자리를 잡았다.
2020년도에는 세종특별자치시로 유명한 바로 그곳이었다.
서민 대통령, 참여정부를 표명한 노민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그가 내걸었던 공약 중 하나인 행정 수도 이전 때문에 충남 연기군의 땅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농지 주변에 거주할 건물을 올리는 것까지 약 35억을 투자했던 김철수는 2003년 말에 이르러선 당장 땅을 판다 가정해도 강남에 사 놓은 건물과 재건축 이야기가 들어간 아파트까지 합치면 1천억이 넘는 재산을 가진 부호가 되었다.
김철수의 또 한 번의 부동산 투자(?) 성공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던 김창호의 절제가 풀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검소하게 생활하던 김창호의 생활패턴에 사치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산다!!!!"
평생을 바르게 산 김철수를 보고 배운 게 있어 한국에서 불법으로 취급하는 마약에는 손대지 않았지만, 그 외의 것. 술, 담배, 여자까지. 법이 허용하는 모든 향락을 즐겼다. 자연스레 졸부란 단어에 딱 들어맞는 이로 변모했다.
자신에게 관대해짐과 동시에 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점점 허들이 내려갔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다 못해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정호준의 부모님이 운 나쁘게 사고의 피해자가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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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자산을 보유한 이와 1000억 이상의 자산을 지닌 이는 0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돈이란 것을 두고 느끼는 감정이 크게 달라진다.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고 숫자로 보이기 시작하는 레벨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랬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사회의 시선은 당사자들이 느끼는 괴리감 이상으로 큰 차이가 존재했다.
"이번 재판은 저희가 담당하겠습니다."
김철수 쪽에서 먼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김창호가 사고 친 소식을 주워들은 '이&박'로펌이 먼저 변호사를 붙여주며 관리해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무리 '이&박'로펌이 법조계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고 로펌에 적을 둔 이들이 뛰어나도 전관예우 변호사를 붙이지 않는 이상 있는 죄를 없는 죄로 만들 수는 없었다. 때문에 첫 번째 재판에서 김창호는 유죄 판결을 받아 교도소 수감됐다.
윤창호법이 제정되고 음주운전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살인죄에 준하게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형량이 강해진 2010년대 후반과 달리 2000년대는 음주운전이 범죄라는 인식이 크지 않았다.
'남자(사람이)가 술 먹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이 정도에서 조금 보태거나 이것 만도 못한 인식이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 운전자들의 사회적 통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더라도 사람이 죽은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냥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어도 무게가 달라지는 판국에 속도 위반, 신호 위반으로 비롯된 100% 본인 과실에 면허가 취소될 수준의 음주운전, 사망자도 한 명도 아니고 동승자까지 2명이나 발생했다. 그리고, 술 기운에 취한 상태라 겁에 질려 충동에 휩쓸려 사건 현장을 두고 도망치는 뺑소니까지 저질렀다.
김창호는 교통사고와 관련된 수많은 범죄 중에서 3대장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을 모두 범했다. 그러니 김창호가 감당해야 할 죄의 무게가 가벼울 리 있겠는가?
"제..제가 사람을 차로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음날 정신을 차린 김창호가 겁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경찰이 잡으러 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경찰서에 출두해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 정상참작이 될 여지를 조금이나마 갖게 됐지만.
김창호가 사고 낸 지역은 CCTV등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었고 목격자도 이미 존재했다. '이&박'로펌에서 자백보강법칙을 활용하기엔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다는 뜻이다. 김창호의 자수는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다는 것의 근거로 삼아 참작해주길 요청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말은 즉 죄를 경감시키기 위해선 합의는 저들에게 필수적으로 챙겨가야 할 사안이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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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정호준은 끝까지 가지 않고 합의에 응할 생각이다.
"조건을 이야기해주시죠."
사고를 친 본인이 후회와 자책을 하며 이후 반성하는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김창호의 부모인 김철수와 나혜숙이 속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한 까닭이다.
코로나가 사회 전반에 퍼져 모임과 이동의 제약이 심해지기 직전까지도 김철수와 나혜숙은 매년 설과 추석에 부모님의 납골당에 들러 부모님의 명복을 빌었다. 몇 번은 전해 듣고 몇 번은 아예 마주치기까지 한 터라 잘 알고 있었다.
'본심이 어떻든 간에 그런 정성이면,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자식인 정호준조차도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힘들고 바빠 그를 핑계로 년에 한번 가거나 아예 한 번도 안 들르는 해도 있었는데, 김철수와 나혜숙은 무려 1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에 2번씩 묘를 방문했다.
그 정도로 정성을 들인 걸 뻔히 아는데, 정호준이 어떻게 더 그들을 추궁할 수 있겠는가? 진심 없이 보여주기식 요식행위로 했다 해도 그것마저도 대단한 거다.
게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눈치챈 사실이지만 그들의 배려는 이런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김창호 측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정호준에게 좀 더 일찍 찾아와 합의를 요청할 수 있었다. 불구속 집행유예를 받아내거나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 해도 형량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선 말했다시피 합의는 필수였으니까. 하지만 김창호의 변호인은 정호준이 수능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3심, 정확한 용어로는 대법원이라 불리는 곳까지 재판을 끌고 간다 가정해도 1심에서 나온 형량이 낮아야 2심, 3심에서 형량을 낮추기 수월하다는 건 법조계에서 종사하지 않은 정호준조차 사회생활을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 사실을 법조계에서 밥 벌어 먹고사는 그들이 모를 리 있겠는가?
이 또한 김철수가 미리 변호사에게 언급해서 배려했음이 분명했다.
'덕분에 수능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
회귀 전에야 부모님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멘탈이 무너진 상태였기에 이러한 배려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는 덕분에 다른 곳에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회귀 전처럼 합의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을 다 해 놓은 상태여도 막상 바로 찾아왔으면 전생과 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으리라.
"형사합의금으로 20억을 지급하겠습니다. 의뢰인께 10억만 줘도 충분할 거라고 조언했지만, 굳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형사 합의는 중간중간 피해자나 피해자 집안과 가해자 측이 접점을 찾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란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창호가 보험에 가입한 상태가 아니고 음주운전, 뺑소니 등 사망사고에 이어 무거운 죄질이 추가된 상태라지만 그럼에도 강현태 변호사가 처음 언급한 10억은 통념적으로 봤을 때 넉넉한 금액이 맞았다.
'의뢰인이 돈이 없는 것도, 돈을 아끼는 성향도 아니니 10억쯤이야.'
강현태가 10억이란 넉넉한 금액을 합의금으로 베팅하려 한 건 법정에서 판사에게 가해자 측이 피해자의 유가족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렀음을 어필하기 위함이지, 결코 정호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김철수는 한 술 더 떠 강현태가 넉넉하다고 생각한 액수의 배나 되는 돈을 합의금으로 지급하려 했다.
지금 정호준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김철수에게도 똑같이 말해봤지만 김철수의 의지가 완강했다. 이 또한 김철수의 배려이자 미안함의 표시였을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자기 마음 편해지겠다고 돈을 더 지급하겠다는데 강현태가 거기다 대놓고 무슨 말을 더 첨언할까?
"합의하러 지금 오신 것도 마찬가지인 맥락이겠죠?"
회귀 전 결론지었던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던진 정호준의 질문에 강현태의 눈빛이 달라졌다. 달래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듯 공감한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이 '이것 봐라?'와 같은 시선으로 변했다.
'내 예상이 맞았네.'
강현태 변호사가 아직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강현태 변호사의 표정 변화 만으로도 정호준은 자신이 여태껏 해 왔던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합의하겠습니다. 대신 가해자의 아버님을 3월쯤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때 부탁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요."
장례식을 무사히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김철수는 그의 배우자 나혜숙과 함께 정호준을 찾아온 적이 있다.
"김창호씨가 보험에 가입한 상태였다면 정호준군은 더 복잡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물론 제 의뢰인의 부친인 김철수씨께선 그조차도 당신에게 좋게 끝나도록 양보했을 것 같지만 말이죠."
날을 세웠던 첫 만남과 달리 질질 끄는 것 없이 시원하게 합의하겠다 밝히는 정호준의 태도에 강현태는 형사 합의서를 작성하는 정호준에게 김철수가 호의를 베푼 것임을 재차 강조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진 않고 돌려 말했지만 달리 말하면 '더 챙길 것이 남았냐?'는 소리로도 들렸다.
"그분께서 어떤 심정으로 제게 배려를 해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운이 좋았다는 식의 말은 듣기 좀 거북합니다. 김창호씨가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만날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들 외엔 카페에 손님이 없는 까닭에 정호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갑작스런 분노에 목소리를 높일 뻔한 걸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
카페의 온도가 내려간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정적만 가득했다.
정호준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창호씨가 보험에 가입한 상태였다면, 저는 '채권양도통지서'도 요구했을 겁니다."
기업은 이윤의 획득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돈 들어오는 건 극대화하고 돈 나가는 부분을 최소화하는 건 기업으로써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교통사고로 형사 합의를 하는 경우 보험 회사는 가해자 측으로부터 받은 합의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중 보상할 이유는 없다며 보상 지급을 미루며 잡아 떼는 경우가 많다.
소송까지 가는 건 기본이고 소송에서 패소해 정말 위자료를 못 받게 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회귀 전 코로나에 감염되어 중환자실로 끌려가기 전까지 정호준이 교통사고를 내거나 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그나마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의 사고인지라 주변으로 범위를 넓히면 사고를 당한 이는 존재했다.
그마저도 죽거나 불구가 될 정도로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차가 조금 망가지거나, 심한 경우는 전치 4개월 달하는 부상을 입은 게 전부였다.
친분이 깊지도 않고 따로 친척 관계도 아닌지라 오지랖 부리면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고 어쨌건 이 문제 때문에 보험사와 소송까지 갔었다.
그런 연유로 '교통사고 채권양도통지서'란 것이 존재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세상사인 것을 잘 알만한 나이였기에 머릿속 한구석에 기억해두었다.
그 기억 덕분에 이렇게 작게나마 아는 척하며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변호사님만큼 인맥이 넓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건을 언론에 조명할 정도의 인맥은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들과 제 친구의 부친 중엔 언론 쪽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사건이 세간에 노출돼 시끄러워지면 판사님들도 판결을 내리시는데 조금 부담되시지 않을까요?"
"미안합니다. 내가 실언을 했네요."
별다른 잡음 없이 수월하게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까지 도출해냈는데 괜히 사서 부스럼을 만든 꼴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강현태는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리고 정호준에게 사과를 건네면서도 어쨌건 김철수가 참 현명했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베풀면 다시 돌아오긴 하는 건가? 배려를 해주는 것을 눈치채고 호의적으로 받아줘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합의도 어려울 수 있었겠어.'
처음엔 정호준이 큰 액수를 보상한다 해서 넋이 나가 합의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돈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많이 알아봤는지 법과 관련된 지식도 꽤 해박했다.
정호준 같은 녀석이 복수심에 이를 갈며 폭주해 모든 걸 걸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으면 정말 피곤했으리라. 물론 정호준이 말한 대로 흘러가게 강현태가 그냥 놔두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강현태는 합의서의 공란을 자필로 한칸 한칸 채워 넣으며 지장을 찍고 있는 정호준에 대한 평가를 한층 더 높였다.
정말 중요한 사람들에게만 건네는 명함을 건넬 정도로 말이다.
"흔쾌히 합의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만남은 김철수씨께 말씀드린 뒤 시간 조정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주십시오. "
강현태가 점쟁이는 아니었지만 중견기업 회장, 정치인, 졸부, 대기업 이사, 한 끼 제대로 밥 벌어 먹을 능력이 없어 훔치다 법정에 서게 된 좀도둑까지. 30년 가까이 법조계에서 종사하며 여러 인간군상을 봐왔다.
'인연의 끈을 남겨두는 게 좋겠다.'
강현태는 눈앞에 보이는 청년 정호준을 보며 뭐가 돼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정호준이니 자신이 지금 선의를 내비쳤다는 것도 꿰뚫고 있을 거다.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 아직 정호준은 현금 20억을 갑자기 얻게 된 범상치 않은 꼬마일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