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6화 (6/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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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음식은 어디서 시킬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는 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볍게 뱉었지만 그 이면엔 이런저런 실망이 섞여 있음을 인지한 정호준은 화제를 바꿨다.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알아? 보쌈은 당연히 황할머니 보쌈이고, 치킨은 BBC 황금올리브지. 아! 그리고 치킨 시킬 때 후라이드만 시키지 말고 반반으로 시켜"

"뭘 반반이야. 소스 딸려 오는 거 찍어 먹어. 소스에 손 안 대고 너 다 줄 테니까."

"소스 찍어 먹는 거랑 양념치킨은 맛이 다르다고! 양념이 속살에 배고 안 배고는 큰 차이라니까!!!!"

"시끄러, 치킨 눅눅해지는 거 난 싫어. 너 후라이드 안 먹을 거 아니잖아."

정호준이 후라이드 치킨을 놔두고 양념이란 사도(邪道)를 걸으려는 박기태에게 일침을 날렸다. 하지만 박기태는 그런 정호준의 일침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정호준은 그런 박기태의 격렬한 저항(발언)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곤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들어선 정호준은 암암리에 전단지나 쿠폰을 모아 놓는 곳으로 정해진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전자레인지 위 한구석엔 BBC치킨 쿠폰이 있었다.

"와~."

치킨을 주문하기 위해 쿠폰을 한 장 뽑아 든 정호준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치킨 가격이 11,000원이라고?! 그리고 쿠폰을 10장 다 모으면 할인을 해주는 게 아니라 아예 한 마리를 공짜로 주네.'

후라이드 한 마리 가격이 18,000원 언저리고 배달비까지 따로 내 치킨을 한 번 시켜 먹는데 20,000을 넘게 지불해야했던 회귀 전 BBC를 떠오른 정호준은 감회가 새로웠다.

눈앞에 쓰여있는 착한가격이 믿기지 않았다.

"BBC가 11,000일 때도 있었구나."

파격적인 가격에 감탄하는 건 하는 거고 주문은 주문이다.

"후라이드 한 마리 갖다 주세요."

물론 박기태의 요구한 양념치킨이 섞인 반반치킨을 주문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BBC에서 후라이드치킨 한 마리를 주무하곤 황할머니 보쌈집에서 보쌈 '중'자 주문을 마친 정호준은 주방에서 나와 마루 소파에 앉아 있는 박기태를 보며 물었다.

"언어 비문이랑 지문도 그렇고, 수리랑 탐구 영역도 그렇고. 족집게에서 뽑아준 유형이랑 비슷한 게 몇 문제 나왔더라. 맞췄지?"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단 말마따나 박남정의 인맥을 빌려 고용한 고액 족집게 과외에서 집어준 지문 중 두 개가 수능에 나왔다. 미리 외우고 읽어둔 시와 소설이 지문으로 출제된 만큼 지문을 읽을 시간과 문제를 푸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수리 영역에서는 무려 고득점이 걸린 주관식 문제 유형이 숫자만 바꿔 나와서 큰 효과를 봤다.

"너랑 한잔하면서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즐기러 온 거지, 성적 압박 받으려고 온 게 아니거든?!"

"음식 오는 동안 할 일 없잖아. 답안지라도 맞춰 보자."

"할 일이 왜 없어? 컴퓨터 게임을 해도 되고, 플레이스테이션을 해도 되잖아. 나도 모의고사랑 비교하면 확실히 잘 본 것 같긴 한데, 난 내 성적을 최대한 늦게 알고 싶거든!"

그와 박기태가 다니는 학교가 목동 명문고인 강서고여서 박기태의 등수가 중상위권을 못 넘긴 거지 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2~3등급 선에서 놀던 놈이다. 게다가 박기태의 부친 박남정은 성적 갖고 압박을 주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성적표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부 못하는 이들이나 할 법한 말을 뱉는 박기태의 발언에 정호준은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정호준을 보며 박기태는 발끈하기보단 도전장을 던졌다.

"위닝이나 한 판 붙자."

"아 됐어. 무슨 게임이야?"

정호준의 겉모습은 학생티도 못 벗은 미성년자 그 자체였지만 그 알맹이는 37살 먹은 인간이 들어앉아 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정호준은 이어지는 박기태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쫄?! 쫄?!"

빠직!

목소리까지 꼬아서 비아냥대듯 묻는 박기태의 도발에 정호준은 인상을 쓰며 TV를 켜고 플레이스테이션을 켰다.

어린 신체로 회귀한 탓에 정신이 조금은 육체를 따라간 걸까?

아니면 남자는 나이가 들어서도 애란 말이 맞아서일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들어있는 알맹이에 맞지 않게 정호준은 박기태의 유치한 도발에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성에게 게임으로, 그것도 저런 식으로 얄밉게 도발하는데.

어느 누가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 남자의 자존심을 건 게임이 시작되었다.

TV에 비치는 화면엔 지네린 지단이란 캐릭터가 중앙에서 공을 잡고 올라간다.

개인기를 활용해 박기태 팀의 수비를 벗겨내고 달리다 또 한 명의 수비가 다가오자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베컴 캐릭터에게 긴 스루패스를 했다.

긴 스루패스를 받은 다비드 베컴이 공을 받자마자 크로스를 올렸고, 크로스는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입한 호나우도의 머리에 정확히 맞는 헤딩 슛으로 이어졌다.

GOAL!!

호나우도 캐릭터의 헤딩 슛은 바로셀로나의 골대 안으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갔다.

와 소리가 나올 법한 연계였다.

레알마드리드 5 : 2 바르셀로나

스코어를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골을 넣는 과정이 리플레이 된다.

사실 0304시즌 레알마드리드는 우주방위군단이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화려한 네임드들이 모였던 클럽이다. 팬들은 일을 내도 낼 거라고 기대감을 품었지만 기대치와 달리 실속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팀이다.

빅네임들의 명성과 이름에 가려져 활약을 체감할 수 없었지만 수비형 미드필드로 활동하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주던 클로디 미켈렐레가 첼시FC로 이적한 탓에 속 빈 강정임이 여실히 드러난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런 처참한 현실과 다르게 게임은 그저 컨트롤이 좋고 능력치만 높으면 장땡이었다.

초반에 조작키가 기억이 나지 않아 헤매는 바람에 1패를 적립했지만 조작법이 익숙해진 뒤에는 연달아 4판을 내리 이겼다. 그것도 1점 차의 아슬아슬한 승리가 아닌 모든 판이 최소 2점 이상의 점수 차가 나는 완벽한 승리였다.

"아씨!!"

스포츠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개중에 승패가 확실하게 나눠진 것들은 본인이나 본인이 속한 팀이 이겨야 재미있는 법이다.

아무리 끈끈하고 친한 관계여도 승패가 걸리면 사람은 유치해진다.

계속되는 패배를 통해 실력 차를 체감한 박기태는 양손에 쥔 컨트롤러(게임패드, 듀얼쇼크)를 손에서 놓은 채 불평을 내뱉었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잘해졌어?! 밥 먹고 게임만 했냐?"

서른 넘어서는 축구를 보는 눈이 길러졌고 그 이전 이십 대 때는 틈날 때마다 즐기곤 했던 온라인 축구게임 덕분에 기본적인 클라스 자체가 박기태와는 다른 선상에 놓여 있었다.

'폼은 죽어도 클래스는 영원한 거지.'

회귀 전에야 그들 간의 상대 전적에서 박기태가 그보다 많이 앞서 있었지만 지금은 정호준에겐 있고 박기태에겐 없는 경험이란 게 존재했다.

"네가 못하는 거겠지."

실력 차를 확실히 보여준 정호준은 조금 전 받았던 도발을 그대로 갚아주었다.

진짜 신체를 따라가는지, X밥, 허접과 같은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비속어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참느라 힘들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꾹 참았다.

온라인도 아니고 얼굴을 맞댄 절친에게 오프라인상태에서 그런 비속어를 사용하는 건, 곧 마흔을 앞뒀던 이로써 넘지 못할 마지막 선과 같았다.

'육체는 보통 정신을 따라간다는 말이 많았는데, 왜 나는 완전 반대지?'

유치해지는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말이다.

물론 별다른 비속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정호준의 반격은 박기태에겐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도발하는 것과 결과가 나온 후에 펙트를 기반으로 도발하는 것은 똑같은 말이어도 포함하는 위력이 달랐으니까.

"뭐?! 내가 못한다고?"

"아니야?"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박기태는 발끈하려다 바로 조금 전에 연패한 것이 떠올랐는지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입을 닫았다.

실력 차가 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

"좀 더 연습해서 도전하도록!"

장난이 장난에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비꼬지 않는 장난기 가득한 뉘앙스로 기분을 풀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BBC치킨이 도착했다. 그리고 치킨이 도착한 지 10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보쌈도 도착했다.

"짠하자!"

짠!

술잔이 부딪쳤고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박기태도 그렇고 정호준도 그렇고 첫 잔을 깔끔하게 원샷으로 비웠다.

꿀꺽!

정호준은 목구멍을 통해 식도를 넘어가는 술이 무척 달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 좋은 사람과 술을 마셔서인지 술이 정말 달았다.

절대 복분자주가 달달해서 달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

정호준과 박기태는 치킨과 보쌈을 시켜 놓고 두 음식을 안주 삼아 천천히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날이 바뀌고 나서야 파하게 됐을 정도로 오랜 시간 이어졌다.

술자리가 길어지는 만큼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 덕에 이 시간대의 박기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박기태의 입을 통해 이 시기의 자신이 대략적으로나마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으으으윽!"

자신의 주량을 넘어설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날 발생하는 후유증인 술병이 심하게 났는지 박기태는 수면 중이면서도 신음성(?)을 내질렀다. 덕분에 정호준은 박기태의 신음성을 모닝콜 삼아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요령껏 먹지."

아무리 간이 튼튼한 인간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으면 다음 날 술병이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박기태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사회생활을 겪으며 술자리와 관련해 나름의 노하후가 있던 정호준은 자기의 페이스를 지키는 건 물론이고 박기태도 페이스까지 조절시키며 천천히 마시도록 유도했다. 아직 필름이 끊기도록 마셔본 적이 없어서인지 박기태는 적정선에서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다.

필름이 끊겨 쓰러지기 전까지 '괜찮다 괜찮다.' '더 마실 수 있다.' '안 취했다,'와 같은 말로 정호준은 만류를 뿌리치며 뻗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덕분에 뒷정리는 물론이고 박기태를 챙기는 것까지 모두 정호준의 몫이 돼 버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부친인 박남정을 닮았는지 필름이 끊겼음에도 토는 하지 않았다는 거다.

"학교 가긴 글렀네."

공휴일이나 일요일이 아닌 이상 수능이 끝난 다음 날이라고 학교가 쉬지는 않는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를 해야 했으나 박기태의 꼴을 보니 학교에 가기는 이미 글렀다. 정호준도 박기태와 비교해서 상태가 낫다는 거지 조금 무리해서 달려 상태가 나쁘긴 매한가지였던 터라 더 그랬다.

'이미 개근상은 물 건너갔으니 오늘 하루 더 빠진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

부모님 상을 치르느라 빠지고, 족집게 과외를 받는 몇 날 며칠 동안 학교에 안 나갔다. 이제 와 결석한 날이 하루 더 늘어난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더군다나 시계의 작은 바늘은 이미 10을 넘어 10과 11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선생님들에게 '나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 마셨어요.'라고 광고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샤워도 해야 한다. 부랴부랴 씻고 학교에 가 봐야 과장 조금 보태면 점심시간이라. 게다가 수능이 끝난 후부터 교실의 분위기가 놀자판으로 변하는 걸 과거에 한 번 겪어보기도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학교에 안 가도 될 이유만 자꾸 떠올랐다.

"학교는 안 가더라도 일단 정신은 차려야 하니 씻자."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정호준은 불을 켜고 욕실로 들어갔다.

*****

따듯한 물로 머리와 몸을 지지며 멍한 정신을 깨운 정호준은 머리를 말렸다. 감기에 걸리지 않게 머리를 말린 정호준은 숙취 해소를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끓이고 따듯한 꿀물 한 잔을 타 마셨다.

'토마토가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꿀물, 초코우유, 토마토 주스 등 숙취 해소를 위해 마실 것들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밖에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정호준이 해 먹을 수 있는 건 꿀물 뿐이었다.

따듯하게 데운 꿀물이 그래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닌지 마신 덕에 부글거리는 속이 조금은 진정된 느낌을 받은 정호준은 어제 해야 했으나 박기태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중으로 미뤘던 일을 시작했다.

"역시 나왔네."

보통 수능 답안지는 수능을 치른 당일 저녁에 나온다. 그것도 그냥 답안지만 나오는 게 아니라 예상 등급 컷도 같이 나왔다.

정호준은 컴퓨터를 켜 인터넷에 접속해 2003년도 대학수학능력평가의 답안지를 찾았다.

가방을 뒤져 수험표를 꺼내든 정호준은 수험표 뒤에 적혀 있는 자신의 답안지를 노트에 옮겨 적었고 다 적은 뒤에 모니터 위에 비친 답안과 자신의 답을 대조했다.

붉은 펜을 꺼내든 정호준은 정답과 일치하는 것엔 동그라미를, 불일치 한 답엔 작대기를 그었다.

채점을 마친 정호준의 눈에 동그라미로 거의 가득 찬 답안지가 보였다.

"예상대로 점수가 잘 나오긴 했는데, 수리가 조금 아쉽네."

가채점 결과 언어영역에선 120점 만점에서 3점짜리 문제 하나를 틀려 117점을 획득했다. 외국어의 경우 아예 만점을 받기까지 했다. 탐구에선 필수과목인 윤리와 공통사회(한국지리)에서 1문제씩 틀렸다.

언어, 외국어, 탐구. 세 과목 모두 1등급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불안한 것은 회귀한 첫날부터 그랬듯 수리 영역이었다.

가채점 결과에 따르면 정호준은 3점짜리 문제를 3개나 틀렸다.

"얘는 맞출 수 있었던 건데 실수했네."

문제와 풀이를 검토한 결과 한 문제는 맞출 수도 있는 문제였다.

"뭐 이거 맞았어도 1등급이 됐을지는 불안 불안하지만."

5차 교육과정에서 워낙 수리 영역이 어렵게 출제된 보상일까?

6차 교육과정에서 수리 영역은 2002년을 제외하면 언제나 쉽게 나왔다.

2문제를 틀리면 경우에 따라 등급이 하나 내려갈 정도로 말이다.

이미 흐릿해질 때로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정호준의 기억 속에도 인문계 자연계를 떠나 수리 영역의 등급 컷은 높았던 것으로 남아 있다.

"일단 중간 고비를 넘었네."

회귀한 뒤 꿈에서 부모님의 얼굴을 본 뒤 세운 인생 계획 중 하나. '회귀 전의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자.'의 중간 과제나 다름없는 입시 성공까지는 이제 한 걸음만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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