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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2화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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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물론이고 동물, 곤충에 이르기까지. 몇몇 특이한 예외를 제외한 살아 숨 쉬는 생물은 수면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 동물 구별할 것 없이 잠을 자는 생물들은 모두 낮은 확률로 꿈을 꾼다.

의사들은 꿈을 꾸는 현상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한 수면이라 말하며 꿈이 가장 생생한 순간을 Rem(Rapid Eye Movement)수면 상태라고 정의했다. 재밌는 점은 꿈을 꿨음에도 막상 일어나서 기억을 복기하면 자신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거다. 정말 인상 깊은 경우가 아니면 대략적으로 기억하거나 아예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게다가 꿈은 스스로 의도해서 꾸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꿈을 꾸는 경우 꿈 속에서 정말 자기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순백의 공간, 상하좌우 위아래 구분 없이 새하얀 기형적인 공간에서 정호준은 자의식을 회복했다.

단번에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인식할 정도로 기형적인 공간,

의식을 회복한 정호준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잘 움직여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영정사진으로 봤던 부모님의 얼굴이 보인다.

부모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띄며 웃고 계셨다.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목청을 높여 외쳤다.

하고 싶었던 말을.

"죄송해요,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의도한 것도 아니고 왜 이런 기현상이 자신에게 찾아왔는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회귀할 거였다면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일찍 왔으면 부모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후회와 죄책감이 생겨났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다고 회귀는 정호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선사했지만, 또 한 번 후회와 자책이란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정신력으로 겨우 겨우 버텨냈을 뿐 신체는 피로에 잔뜩 찌든 상태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회귀했던 것처럼 이것도 뭔가 알 수 없는 법칙의 작용이 일어난 걸까? 꿈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잠에서 깬 정호준의 시선에 보이는 벽걸이 시계의 작은 바늘은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16시간이나 잔 건가? 어차피 개근상은 이미 글렀는데, 좀 더 자자 그냥."

학교에 나가봐야 이 시기엔 수업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자습으로만 소모했다. 게다가 생생한 부모님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다. 똑같은 꿈을 또 꾸는 게 불가능하리란 걸 잘 알면서도 현실을 외면하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했다.

다시 부모님을 뵈기를 희망하면서.

물론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다. 16시간이나 푹 잔 탓에 정호준은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꿈을 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냥 의식이 흐릿해진 정도의 수면을 취하는 게 고작이었다.

얕은 수면, 꿈을 꾸는 것은 고사하고 그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뒹굴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침대 위에 뒹굴며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던 정호준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띵동! 띵동!

몇 번이고 초인종을 눌러 댔고, 그래도 나오지 않자 아예 시끄럽게 문까지 두들긴다.

쾅! 쾅! 쾅!

잠에서 깨어있을 때라 초인종 소리는 호준도 분명 들었다. 하지만 잠깐이라지만 밖에 나가거나 누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일절 없었기에 무시로 일관했다.

쾅!! 쾅!! 쾅!!

집주인이 나올 때까지 두드리겠다는 기세로 두드리는 통에 결국 옷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

현관 밖을 확인할 여유도 정신도 없었던 정호준은 문을 활짝 열며 톡 쏘아붙였다. 하지만 톡 쏘아붙이던 정호준은 반가운 얼굴이 보인 까닭에 끝까지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왜 왔어?"

물론 추궁은 이어졌지만..

"뭘, 왜 와? 당연히 와야지."

"장례식장에 얼굴 비춰줬으면 충분하니까 하는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연예인 지망생이라 말해도 믿을 정도로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 영혼의 단짝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아깝지 않은 그의 친구. 박기태가 양손에 짐을 가득 쥔 채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자빠져 만 있을 것 같아서 왔어. 네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네. 더 자더라도 밥은 먹고 자. 아무것도 안 먹고 자기만 하는 건 몸에 안 좋아. 더군다나 너 장례식 동안 제대로 식사 챙겨 먹지 않았잖아."

"하아~, 시끄럽고 일단 들어와 그럼."

엄마라도 된 양 챙기는 절친 놈의 말에 정호준은 박기태의 말을 끊으며 집으로 들였다. 정호준이 문을 열어주자 박기태는 양손 가득 쥔 것들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큰 냄비 있지?"

박기태는 바리바리 싸온 짐들을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주방을 뒤지며 부산을 떨었다.

따르륵!

마치 제 집처럼 아무렇지 않게 서랍을 열어 냄비를 꺼낸 박기태는 들고 온 커다란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시간을 들여 곤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곰탕을 냄비에 쏟아부었다.

탁!

"이건 주꾸미하고 낚지, 삼겹살을 같이 볶은 거야. 아버지가 너 먹이라고 사다 줬어. 여기 음식 정말 맛있어. 그리고 되게 비싼 데야. 나도 몇 번 얻어먹어 본 적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꼭 챙겨 먹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투명한 그릇 안쪽으로 보이는 붉은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음식 또한 그대로 냉장고를 열어 집어넣는다. 원기 회복에 도움을 주는 식재료들이 들어간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녀석을 보며 새삼 느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나 죽기 직전까지 24년 넘게 이어진 질긴 인연을 이번 생에도 계속 이어가게 될 것 같다는 걸.

"기껏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뭘 또 찾아오고 그러냐. 이럴 시간에 오답 노트라도 한 권 더 봐라."

박기태의 친절에 머쓱해진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가 한 말은 100% 진심이었다. 자신의 챙겨주는 건 정말 고마웠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다.

신체는 어려도 육체 안에 들어찬 정신은 37년 먹은 구렁이인지라 어떻게든 슬픔을 억누르고 훌륭하게 상주역을 마무리했다. 그런 현재와 달리 회귀 전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에 절망하느라 넋이 나간 상태로 상을 치렀다.

그리고 그런 정호준의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며 장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바로 눈앞의 질긴 인연 박기태였다.

"지금 공부 좀 더 한다고 뭐가 바뀌나?"

박기태와 정호준이 속해 있는 학군은 강남 다음의 학군이라 평가하며 강남 못지않은 치맛바람을 가진 부모들이 존재하는 곳.

바로 목동이었다.

박기태는 고등학교 1년부터 3학년까지. 3년 내내 전교에서 10등 밑으로는 내려가 본 적 없는 정호준과 달리 공부를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꼴등을 해본 적은 없고, 아예 밑바닥을 깔아주지도 않았으니까.

'중상위권'. 이 단어가 그의 성적을 서술하기 가장 좋은 단어리라.

박기태는 적을 땐 42명 많을 때는 45명까지 모아 놓은 한 학급에서 13등을 넘겨본 적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반 등수 22등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얼마를 늘리든 상위권의 천장은 넘어서질 못했다. 상위권 학생들은 박기태가 노력하는 시간에 똑같이 아니 더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며칠 반짝 집중한다고 오를 성적이었으면 이미 옛날 옛적에 올랐겠지.'

박기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자신의 성적보단 갑작스럽게 불행이 찾아든 자신의 친구가 더 걱정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정호준은 잔소리를 이어간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해야지. 수능이잖아."

고 3. 그것도 수능을 한 달 앞둔 수험생에게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문제지나 모의고사와 완전히 같은 문제는 나오지 않더라도 풀이 방식이 비슷한 문제는 얼마든지 수능에 출제될 수 있다.

게다가 수능 시험에 맞춰 준비 중일 특유의 루틴마저 완전히 무너진다.

공부를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면 수능을 한 달 남긴 상황에서 D-30의 하루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시간이었다. 20년도 채 안 산 짧은 생애지만 개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런 중요한 시기에 전생의 박기태는 식장에 찾아와 사흘 내내 함께해 주었다.

박기태는 당연한 거라 생각하며 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는지 몰라도 정호준에겐 죽기 직전까지도 제대로 갚지 못한 그런 큰 빚이었다.  그리고 감성이 폭발할 정도로 젖은 어느 날 한 번씩 생각해보곤 했다.

'녀석이 장례식장에 와서 사흘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만약 박기태가 빌빌대며 살았으면 잠깐 떠올리는 것 정도가 아니라 죄책감이 심해졌을 거다.

정호준에겐 다행히도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 박기태는 명문대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남들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의 성공을 해냈다. 그리고 그 덕에 정호준은 박기태에게 부채 의식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어쨌건 그렇지 않아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마음의 빚인데 굳이 그 빚의 무게를 추가하고 싶진 않았기에 회귀한 직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남아서 함께 하겠다는 박기태를 마음만 받겠다 말하며 꾸역꾸역 돌려보냈다.

이번 생에는 회귀 전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내길 바래 그렇게 집에 보내놨는데...

박기태는 장례식을 마치기 무섭게 찾아왔다.

자신이 걱정돼 먹을 걸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는데...

그런 녀석에게 그가 대체 뭐라 추궁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 정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또다시 녀석의 중요한 시간을 뺏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고맙고 또 고마운 감정이 가슴 속에 남았다.

*****

냉장고에 넣을 거 넣고 따로 정리할 정호준은 가겠다고 난리 치는 녀석을 붙잡아 놓고 함께 밥을 먹었다.

"너 먹으라고 사 왔는데 뭘 나까지 먹으래? 나 집에 가고 나면 너 혼자 먹으라고."

"됐고 같이 먹고 가. 내가 제대로 먹는지 확인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냉장고에 박아두고 안 먹을지 어떻게 알겠냐?"

정신이 없긴 하나 자신이 걱정되어 음식까지 바리바리 챙겨온 박기태를 그냥 이대로 보낼 정도로 정호준이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박기태가 가져온 전복죽을 데우고 큰 냄비에 덜어두었던 곰탕을 한 번 끓여 나눠 먹었다.

"..."

아직 수능도 채 치르지 않아 성년이 되지 않은 박기태지만 그렇다고 생각마저 어린 건 아니다. 말도 많고 한 똘기하는 성격임에도 정호준의 마음이 심란한 것을 배려해 밥 먹는 내내 별다른 위로나 시답잖은 농담을 꺼내지 않았다.

팅! 팅! 짤그락!

덕분에 식사 자리는 혼자 먹는 게 나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고 쇠로 만들어진 수저가 밥그릇 유리와 부딪치는 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

'…'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무거운 침묵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슬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면서 동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뱉는 어설픈 위로보단 그냥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게 나을 때가 많았으니까.

무의식적인 본능에서 나온 건지 생각한 후에 나온 행동인지는 모르겠으나 박기태의 행동은 100%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정답의 근사치 정도는 되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박기태는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며 고무장갑을 꼈다.

"또 올게."

"뭘 또 와. 이제 진짜 오지 마. 수능에 집중하라고!"

설거지를 마친 박기태는 정호준의 집을 나섰고 문밖을 나서는 박기태를 배웅한 정호준은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분노, 슬픔, 안타까움, 막막함, 고마움 등 여러 감정이 차올랐고 곧이어 가볍고 하찮은 생각부터 무겁고 진지한 생각까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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