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투자생활백서-1화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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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와이셔츠, 검은 양복바지, 와이셔츠 위에 검은 마이를 입은, 상주를 의미하는 두 줄의 완장을 팔에 차고 있는 앳된 얼굴을 한 청년에게 장정들이 다가왔다.

"상주님. 발인을 할 시간입니다."

그들보다 한참 어린, 아직 앳된 티도 벗지 못한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날 정도로 어린 청년을 향한 말이었지만 관계자들의 태도엔 정중함이 베여있었고 말투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죄송합니다."

실의에 빠져 멍하니 영정사진만 바라보고 있던 청년. 정호준은 다음 순서를 진행해야 한다는 관계자들의 말에 상념을 깨고 현실로 돌아왔다.

조문객이라도 있었다면 찾아온 손님들을 신경 쓰느라 사색(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었겠지만, 사흘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마지막 날. 그것도 직장인들의 출근하느라 바쁠 월요일 아침이었기에 식장을 찾는 객은 없었다.

조문객의 발걸음은 일요일 저녁을 끝으로 끊겼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카뻘에 달하는 어린아이임에도 정중함을 유지하는 관계자의 직업의식에 정호준 또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 상주님, 이동하실 차량이 없으시면 함께 타고 가시겠습니까?"

종종 안타까운 이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장례식장 관계자 박중우가 바로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슬픔을 갈무리하며 예의 바른 태도를 이어가는 호준의 모습은 장례식장 관계자 박중우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 나이에 양친을 동시에 잃어버린 정호준에게 작게나마 동정심을 품었는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불행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의젓하게 마지막까지 장례를 치러내는 정호준의 모습에 박중우는 오지랖을 부렸다.

"예, 감사합니다."

아무리 호의가 담긴 배려여도 경우에 따라 오지랖이 될 수 있지만 다행히 당사자인 정호준에게 박중우의 호의는 오지랖이 아닌 배려로 다가왔다.

장례식장에 붙어 있는 작은 방에 풀러 두었던 가방에 이튿날에 중간 정산을 해야 한다는 말에 결제하고 남은 부조금을 챙겨 나왔다.

탕!

정호준은 관을 운구하기 위해 마련된 SUV와 벤 중간 어딘가 크기의 중형차에 관과 함께 탑승했고 창문을 통해 빠르게 멀어져가는 장례식장을 바라보며 다시금 사색에 잠겼다.

*****

2021년 11월 27일.

대한민국은 1차 접종자의 수가 전체 국민 중 80%를 넘겼고, 2차 접종자까지 완료한 이 역시 전체 국민 중 77%에 달했다.

워낙 전파력이 강력한 데다 장기간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는 바람에 백신을 접종했음에도 확진자는 계속 나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어느 정도 집단 면역을 형성을 완료했다 판단했고 이를 자신들의 성과로 여기며 세계에, 그리고 자국민에게 알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경제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유럽처럼 시범적으로 '위드 코로나'를 시행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성급했다는 것을 일깨우듯 한국의 코로나 감염자 수는 폭발적으로 늘게 되었다. 그리고 감염자 중엔 두 차례 접을 마쳤음에도 감염된 이른바 돌파감염자라 일컫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돌파감염자든 아니든 확진 판정이 난 이들은 국가의 통제가 미치는 별도의 병원으로 격리되었다. 통계에 기록된 돌파 감염자 중엔 정호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콜록! 콜록! 콜록!

코로나 초기 증상인 발열이 시작된 다음 날부터 정호준의 체온은 40도 전후를 넘나들며 체온은 계속 고온을 유지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특유 증상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목이 아픈데 계속되는 기침으로 부을 때로 부어 버린 편도는 고통을 심화시킨다.

침을 삼키는 것, 호흡하는 것. 간단하고도 당연한 행위조차 행할 때마다 막심한 고통을 동반했고, 이윽고 호흡 곤란 증상까지 덮쳤다.

위중증 환자로 분리되어 중환자실에 격리되었다.

"으윽, 씨X."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코로나 특유의 근육통은 쉬지 않고 전신을 들쑤셨기에 정호준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힘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신세를 한탄하는 게 전부였다.

기침, 호흡곤란, 근육통. 발열에서 비롯되는 온갖 종류의 고통에 며칠을 시달리다 지쳐 피곤함에 찌든 채로 기절하듯 눈꺼풀을 감은 것까지가 정호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03년 10월 4일 토요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기현상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다.

'아프다,'

꿈이 아닌 현실이란 걸 증명하듯 세게 꼬집은 볼에서는 통증이 가득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한바탕 긴 꿈을 꿨다고 생각하고 모른 척 넘어가기엔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고통에 절었던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2003년 10월 4일.'

그런데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달력과 정호준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기억과 감각이 잘못된 거라고 부정하는 것처럼 여기가 만들었다.

2003년 10월 3일 금요일부터 2003년 10월 6일 월요일까지 나흘 간의 나날들은 정호준의 기억 속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날들이었다.

10월 3일. 개천절은 일상에 치이는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겐 그저 하루 쉴 수 있는 빨간 날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호준에게 있어 2003년 10월 3일 개천절은 37년의 인생의 그 어떤 날보다 기억에 남는 그런 날이었다.

2003년 개천절은 호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신 날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다.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이었기에 이맘때의 수험생들처럼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 중이었던 정호준은 비보를 전하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119구급대원입니다…."

사고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고 구급대원이 알려준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황급히 달려갔지만.

"2003년 10월 3일. 23시 39분경 외상 후 쇼크로 사망하셨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전력으로 질주해 들어간 병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리는 의사의 사망선고가 전부였다.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우리 아빠, 엄마가 왜 죽어!!!!"

과거의 그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의사가 내린 사망 선고를 부정했었다.

물론 정호준이 부정한다고 있는 일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

어느 지역을 가던 대한민국 야경에 항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십자가의 붉은 불빛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에는 온통 기독교 신자만 있을 것 같지만 통계상으로만 따지면 기독교보다 불교를 믿는 인구수가 더 많았다.

불교가 기독교와 다른 게 있다면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며 티를 내고 신도에게 불신자를 믿게 하려는 행위, 일명 전도를 장려하며 하나의 덕목으로 삼아 거리에서 종종 함께 거리로 나와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불교 신자들은 불신자들에게 불교를 믿으라 전파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더 나아가 자신이 불교를 믿는다는 티도 잘 내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불교를 믿는 이를 사회에서 쉽게 찾아보기가 힘든 거지 신자 수는 기독교만큼이나 많았다.

정호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찾고자 노력해야 알게 되는 그런 불교신자였다.

가부장적, 혹은 가족 중심의 사회인 이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모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이어진다.

어렸을 때는 아이를 혼자 둘 수 없기에 자연스레 부모와 함께 손잡고 다니며 신앙생활을 함께했고 집에서 홀로 생활하는 게 가능할 정도의 이성을 확립한 초등학교 고학년 또는 중학생이 되어서 가고 싶지 않음에도 부모의 강요(?)하에 신앙 생활을 이어가곤 한다.

"입시 3년 남았는데 공부해야지. 당분간은 교회 안 나가도 되니까 공부에 집중해라."

대학입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고교 3년은 부모를 따라 교회나 절에 가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최고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곤 했지만 말이다.

"집에 있을래?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불교가 그런 특성이 없는 건지, 정호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앙을 자식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지 않으셨던 건지 홀로 식사를 차려 먹으며 집에 있을 수 있다 판단되는 나이인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순간부터 절에 가는 것에 정호준의 의향을 물었다.

종종 '추석' 같이 특별한 날에 한 번씩 절에 같이 가겠느냐고 묻곤 했지만.

이는 권유였지 결코 강제가 아니었다.

"전 그냥 집에 있을게요."

그마저도 수 시간을 차 타고 내려가야 하는 게 싫어 매번 단호히 거절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호준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이후로는 수학여행 때문에 사찰에 간 적은 있어도 부모님과 함께 사찰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도 똑같았다.

11월 05일에 열리는 대학 수학능력평가를 앞둔 정호준을 위해 여느 부모처럼 쉬는 날을 맞아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나 때문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고, 절에 가 불공을 드리고 와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하지만 어쨌건 정호준의 부친과 모친이 절로 향한 게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서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본인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죽음은 코로나에 걸려 사망하기 전까지 살아온 16년 평생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피어오르는 건 회귀해 정신이 성숙한 상태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X발! 왜, 왜! 어제 눈을 뜬 거야! 이틀만, 아니 하루만 더 일찍 눈을 떴으면,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잖아!'

보는 눈이 있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정호준은 장례식에 찾아와 준 아버지, 어머니의 직장 동료, 친우분들과 맞절하면서도 소리 없는 절규를 이어갔다.

그에게 왜 회귀라는 기적적인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으나 기왕 회귀할 거 부모님이 사망하시기 전으로 돌아올 순 없는 거였을까?

모두가 바라마지 않을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하고 배부른 소리한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일어날 기적이었다면.

하루만... 단 하루만 일찍 눈을 떴으면 안 되었을까?

하루만 일찍 눈을 떴다면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이전과는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

정호준의 집안은 친가, 외가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손이 귀했다. 정호준은 물론이고 그의 부친까지 따로 형제가 없었다.

부친과 달리 정호준의 조부에겐 손위 누이가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은 조부에게서 가족을 모두 앗아갔다.

"아이고 내 새끼!! 엄마만 두고 가면 어떡해!"

정호준의 외가 즉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1남 2녀의 자녀를 밑에 두셨다. 정호준의 모친인 강혜순은 1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정호준에게 삼촌, 이모가 되었을 분들은 모두 채 피어보기도 전에 돌아가셨단다.

60년대 후반 아니 70년대 초반까지는 주변에는 한 가족 이상 어린아이가 병치레로 죽는 일이 종종 흔하게 발생했고, 어머니의 형제분들은 그런 불운한 경우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국토 탓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국가 중 하나로 손에 꼽히었고 의료기술 및 의료인력은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 시절을 살아본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순 없었지만 정호준에게 이모나 외삼촌이 될 뻔했을 분들의 이른 죽음은 시대의 아픔임은 분명했다.

문제는 모친인 강혜순의 불행은 그걸로 끝이 아니란 것에 있었다. 자식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경험을 두 번이나 겪은 외할머니께선 자식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앓아누우셨고, 어머니의 연세가 10세가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고 말을 전해 들었었다.

여하튼 이런 말을 왜 꺼내놓냐 하면 정호준과 혈연으로 이어진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던 터라 장례 절차나 묘를 알아보는 것 등의 일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 그를 도와줄 이가 이 세상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집안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님에도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시신을 화장해 납골당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회귀한 덕에 육신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물은 19세가 아니었지만, 장례식장 관계자들이 봤을 때 그는 연고 하나 없이 조실부모하고 부모 명의로 된 통장이 모두 막힌 19세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털컥!

화장을 마친 부모님의 유골함을 남양주의 한 납골당에 안치한 정호준은 봉분 앞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깨를 오른팔로 안은 채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을 뻔히 바라봤다.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두 분의 얼굴을 보니 더 가슴이 아려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하루만 더 빨리 돌아왔어도.'

어떻게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계획하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괜한 자책감이 심중에서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잠에 들면 이 모든 것이 꿈일 것만 같다.

멍하니 서서 얼마나 지켜봤을까?

화장을 마치고 납골당에 도착했을 때 11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던 손목의 시계는 어느새 15시를 지나 1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중력과 몰입력이 흐트러지고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생기자 이내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잔뜩 몰려들었다. 상주로 있는 사흘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자리를 지킨 데다가 오랜 시간 가만 서서 영정을 지켜보는 것에서 생긴 피로는 결코 작지 않았다.

'금방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정호준은 침대에 몸을 눕자마자 곧장 수마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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