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밥차 (1)
[선우네 백반 임시 휴무]
-오늘 영진동의 자랑 ‘유혜승 배우’의 촬영지로 밥차 지원을 나가는 관계로 하루 쉬어 갑니다. 고객 여러분의 너른 양해 바랍니다.
* * *
오늘은 영화 [따뜻하고 정겨운, 밥]의 첫 촬영일이다.
줄여서 [따정밥].
처음 촬영장에 가는 혜승이를 위해 우리 선우네 백반에서는 밥차 지원을 해 주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감독인 박찬희가 뛸 듯이 기뻐했다는 후문.
그는 아예 밥차 전속 계약을 맺을 수 없냐고 혜승이를 통해 물어왔다고 했다.
물론, 그건 안 되는 일이었고.
밥차를 위해 빌린 트럭은 민호 삼촌과 순미 이모가 타고 오고 있었다.
부모님과 혜승이는 내가 모는 구형 SUV에 타고 있었고.
나는 백미러를 내다보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거기 가면 다 해 줘요.”
“너는 운전이나 잘해. 아무리 그래도 예쁘게 하고 가야지.”
어머니는 아침부터 혜승이를 꾸민다고 유난이셨다.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 주고, 온갖 화장품을 꺼내 메이크업을 하시고…….
전생에 수없이 방송 출연을 해 본 나는 저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현장에 가면 다시 메이크업을 해야 하니까.
정작 혜승이 본인은 아무런 말 없이 어머니의 손길에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자신을 매만져 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혜승이의 얼굴엔 묘한 행복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요. 사장님이 해 주신다는데…… 사장님, 입술이 조금 덜 발린 거 같은데요?”
“어, 그래? 어디, 어디?”
혜승이의 너스레에 괜히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혜승이는 몰라서 저러는 게 아닌 거다.
알면서도 좋아서 저러는 거다.
지금껏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엄마’의 손길.
물론, 영진꿈마을에도 ‘엄마’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너무나 아이들이 많다.
일일이 머리를 따주고, 얼굴을 만져 주는 건 최미란 원장에게는 너무 무리한 일이었을 테니까.
“아버지, 저 물 좀…….”
아버지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아버지의 촉촉한 눈가가 보였다.
어쩐지 아까부터 차에 습기가 차더라니…….
레버를 돌려 에어콘 온도를 확 낮췄다.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눈물을 보이시는 걸까.
“선우야.”
달라는 물은 안 주고, 아버지가 촉촉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
“정말…… 행복한 광경 아니니?”
“…네? 어떤…….”
“우리 네 사람…… 완벽한 한 가족처럼 보이지 않냐고.”
“끄응.”
또 그 소리시구나.
요즘 들어 틈만 나면 혜승이를 우리 식구로 묶는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두 분이 예전부터 딸을 원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걸 조금 아쉬워하는 것도 느껴졌고.
그래도 이건 너무 급발진이지.
이제 혜승이를 안 지 몇 달이나 되셨다고.
“온 가족이 모여 막내의 촬영장에 밥차를 끌고 가고.”
“오빠는 동생을 위해 아침부터 일어나서 먼 길을 운전해 가고.”
“엄마는 딸을 위해 머리를 따 주고, 화장을 해 주고.”
“아빠는 그런 가족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치 시구절을 읊듯 문장을 주고받으셨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천생연분이지 싶다.
정말 잘 만나셨다.
* * *
촬영장은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한 영화세트장이었다.
촬영 준비를 하던 박찬희 감독이 직접 우리를 맞아 줬다.
우리를 맞아 준 건지 밥차를 맞아 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시종일관 그의 시선은 밥차를 향해 있었고, 그의 코는 인사를 하는 내내 벌름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결정적인 한마디.
“오신다고 해서 아침도 안 먹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 말이야말로 우리 대신 밥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아침도 안 먹은 게 우리를 기다렸다가 뜯어먹겠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물론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우리 밥이 맛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적당한 위치에 밥차를 세워 두고, 먼저 현수막을 내건다.
[영진동의 자랑, 유혜승이 쏜다! 선우네 밥차입니다!]
음…… 현수막 문구가 딱 90년대 스타일이다.
정작 그 문구를 쓴 장본인은 내건 현수막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구 진짜 좋지?”
“음…… 네, 삼촌…….”
민호 삼촌은 이제야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 사이의 거리도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진짜 삼촌 같기도 하고.
오늘은 그 감정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딱 삼촌의 나이대에서 나올 수 있는 현수막 문구를 보고 나니 말이다.
밥차.
영화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촬영장의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그런 치열한 현장에서…… 식사 시간만큼은 사실상 스태프들에게 유일하게 휴식이 허락된 시간이다.
그러니, 밥차를 보면 누구든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 거다.
밥차를 준비할 때는 메뉴 구성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밥차에서는 메뉴 구성에 필히 가격이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하지만, 오늘의 밥차는 가격 같은 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혜승이의 이름을 달고 영화 스태프들을 응원차 나온 거니까.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반찬을 가득 준비해 왔다.
<오늘의 ‘밥차’ 메뉴>
- 우거지된장국
- 제육볶음과 쌈채소
- 닭도리탕
- 탕수육
- 삼색 나물
- 진미채 볶음
- 깻잎무침
- 김치 5종(배추김치, 갓김치, 깍두기, 총각 김치, 열무 김치)
- 후식 아이스크림
* * *
휑- 했다.
식사를 준비한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들 지쳐 가고 있었다.
흐음…….
“제가 안에 한번 쓱 둘러보고 올게요.”
어서 갔다 와보라는 듯 사람들이 손짓을 했다.
세트장 안.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세트는 무슨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 느낌이었다.
하지만, 촬영은 멈춰 있었고, 일부 스태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박찬희 감독 앞에 서 있었다.
딱 봐도 꾸지람을 듣는 것 같은 모양새.
“휴…… 일정 똑바로 확인했어야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
“…죄송합니다…….”
박찬희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말을 하면서 고개를 더 숙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말했다.
“어차피 단역이니까 엑스트라 한 명 연습시켜서…….”
“야!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어디서 불어를 하는 잘생긴 젊은 사업가를 엑스트라로 구해 와, 인마! 너 지금 당장 불어 연습해서 초보 티 안 나게 말할 수 있어? 영어도 아니고, 불어잖아! 얼굴은 또 어떻게 하고!”
“…….”
괜히 나선 그 스태프는 본전도 못 건지고 다시 쭈그러들었다.
아무래도 배역 캐스팅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나저나 불어를 할 줄 아는, 잘생긴 젊은 사업가라…….
단역이지만 단역 중에서는 꽤 비중이 있는 역할인 듯싶다.
혜승이 이 녀석…… 첫 촬영부터 고생 좀 하겠구만.
모든 일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영화 촬영장도 역시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큰 실수가 발생했으니 촬영장 분위기가 좋을 턱이 없다.
문자나 한번 보내 볼까?
- 유혜승. 긴장하고 있냐?
- 긴장은 무슨…… 오빠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밥 다 식어서.
-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냐. 전기밥솥 다 있는데 무슨 걱정.
- 저도 무슨 걱정. 어차피 내가 실수한 것도 아닌데. 헤헤.
허세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문자 메시지에서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안 느껴진다.
역시 대배우가 될 자질이라 그런가?
그때 박찬희 감독이 문밖으로 나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빨개진 얼굴로 내게 슬쩍 목례를 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옆에 같이 서 있던 조연출에게 물었다.
“상훈아.”
“네, 감독님.”
“오늘 이준 역으로 오기로 한 배우 사진 줘 봐.”
“아, 잠시만요.”
잠시 후 조연출이 클리어파일에 끼워져 있는 A4 사이즈의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사진과 나를 번갈아 훑어보던 박찬희가 다시 조연출에게 물었다.
“비주얼은 딱이지?”
“네, 완벽한데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찬희의 고개가 다시 나를 향했다.
“사장님 혹시…… 불어…… 할 줄 아세요?”
“네?”
질문을 하는 박찬희의 표정이 묘했다.
뭐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
박찬희 감독의 의중은 이미 파악됐다.
- 불어를 할 줄 아는, 잘생긴 젊은 사업가.
펑크 난 캐스팅을 나로 메꿔 보려는 생각일 거다.
그런데…… 자기들이 봐도 이상할 거다.
동네 백반집 사장인 내가 영어도 일어도 중국어도 아닌 불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영화의 설정상 불어 발음도 꽤 능숙한 편이어야 할 듯한데.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는 늘 불가해한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어떤 불가해한 일은 기적이라 부르고, 어떤 불가해한 일은 미스테리라 부른다.
한 번 죽은 내가 십오 년 전으로 회귀한 것 또한 기적 아니면 미스테리라고 불릴, 불가해한 일들 중 하나일 테고.
그리고…… 그런 불가해한 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겠지만…… 나의 전 부인은 프랑스 여자였다.
한국 음식을 사랑해서 한국에 눌러 살게 된 프랑스 여자.
하여간, 나는 에밀리(Emilie)와의 소통을 위해 불어를 열심히 배웠다.
어쨌든 연애하는 동안 만큼은 우리도 뜨거웠으니까.
“Qu'est-ce que tu racontes?(무슨 말씀이세요?)”
“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야, 상훈아. 이거 불어 맞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연출 대신에 내가 해 줬다.
“네, 불어 맞아요.”
“오…….”
박찬희 감독의 얼굴에 서광이 내비쳤다.
마치 기적을 마주한 신도 같았다.
“사장님…… 영화 출연 한 번 해 보지 않을래요?”
박찬희는 내가 예상하고 있던 제안을 했다.
“음…… 좋아요.”
그가 질문을 던지기 전부터 답은 생각해 뒀다.
단역으로 한 컷 출연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오, 됐다!”
좋아하는 박찬희.
하지만, 그 전에 꼭 할 게 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어리둥절해하는 박찬희를 보며 손가락으로 밥차를 가리켰다.
“밥 다 식어요. 식사부터 하고 하시죠.”
“아, 아! 죄송해요. 갑자기 캐스팅이 펑크가 나는 바람에. 야, 오상훈. 다들 나와서 밥부터 먹으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조연출이 헐레벌떡 세트장 안으로 뛰어갔다.
* * *
밥차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자, 부모님과 이모, 삼촌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오, 사람들 나온다. 자, 준비합시다!”
고종숙 여사가 힘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다독였다.
아버지는 식탁을 다시 세팅하고, 집기류를 점검했다.
민호 삼촌은 크고 넓은 프라이팬에 제육볶음을 볶기 시작했다.
순미 이모는 배식대의 맨 마지막에 서서 사람들에게 된장국을 손수 퍼 줬다.
어머니는 식판을 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리 혜승이 잘 부탁드립니다!”
실과 바늘처럼 아버지도 옆에서 함께 했다.
“부족하지만 잘 좀 봐주십시오!”
누가 보면 혜승이가 진짜 딸인 줄 알겠다.
아마 이 촬영장의 누구도 혜승이가 우리집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거다.
아버지,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 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진짜 딸이 아니어도, 몇 개월밖에 보지 못한 게 전부여도,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혜승이는 우리 선우네 백반 식구이고, 식구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게 당연한 것을.
애초에 오늘 이 자리에 밥차를 끌고 나온 것도 다 그런 의미였으니까.
밥차로 다가간 나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혜승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우리 아귀는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 걸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