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계곡의 맛 (1)
비를 퍼붓던 장마철도 지나고, 계절은 이제 본격적인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높은 온도에 높은 습도까지 겹쳐 연일 불쾌지수가 높은 날씨가 이어졌다.
이러면 이럴수록, 더 열심히 맛집 탐방을 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은 우리를 기운 나게 하고, 우리를 기분 좋게 하니까.
한여름이면 꼭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사실 에어컨이 일반화된 요즘 같은 세상에 실내에만 있으면 웬만한 더위는 피할 수가 있다.
하지만, ‘라떼’는 안 그랬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에어컨이라는 물건은 부자집에서만 가질 수 있는 그런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에어컨을 잘못 돌렸다가는 전기세 폭탄을 맞는다는 이야기는 무슨 괴담처럼 퍼져 있었고.
그때는 그랬을 거다.
전기 효율도 낮았을 거고, 에어컨 값도 원체 비쌌을 거다.
그러니, 한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여기저기 떠나기에 바빴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쏟아지는 폭염을 피하기 어려웠으니까.
피서지 중에서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바로 ‘계곡’이었다.
수영장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번잡스러웠고, 바다는 어린 마음에 조금 무서웠다.
계곡은 시원하면서도 놀기 좋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몸을 담글 때는 줄줄 흐르던 땀도 확 식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물놀이를 하다 보면 저기서 어른들이 불렀다.
- 밥 먹고 놀아.
그때 먹었던 삼겹살, 라면, 수박 등등.
물놀이를 하며 힘을 빼고 온 터라 몇 배는 더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에너지 충전을 한 아이들은 다시금 물놀이를 하러 달려 나갔다.
“계곡이요? 서울에도 그런 데가 있어요?”
이초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 이초희는 방학을 맞아 가게에 와서 살다시피하고 있다.
말로는 계절학기도 들어야 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한다는데…… 홍보대사로서 무한 리필이 되는 무료 식사를 최대한 즐기려고 하는 것 같다……는 나의 느낌적인 느낌이다.
단, 본인도 본인의 식사량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밥을 먹고 나면 꼭 이렇게 몇 시간씩 일을 도와주곤 했다.
“네, 서울에도 있죠. 물도 좋고, 음식도 맛있는 데가.”
난 방금 이초희에게 맛집 탐방 장소로 계곡을 제안한 터였다.
“오…… 저야 무조건 좋죠! 와…… 맛있겠다. 닭도리탕, 도토리묵…….”
이초희가 계곡에서 먹을 몇 가지 음식들을 중얼거릴 때 나는 얼른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이 집에는 음식 얘기만 나오면 어디선가 홀연히 등장하는 귀신이 산다.
이름하여 아귀.
이초희의 입을 막은 뒤 십여 초가 흘러도 아귀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휴- 하고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토종닭이 크고 맛있는데.”
“그렇죠. 역시 토종닭이…….”
이초희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대답을 하려는데 내 앞에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어떤 존재가 현현해 있었다.
세상 청순한 얼굴에 그보다 더 청순하고 순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존재.
그러나 먹을 때만큼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존재.
아귀.
“허업-!”
아귀에게 들킨 이상 그녀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서든 음식 냄새를 맡고 따라올 게 뻔하니까.
그렇게 해서 ‘계곡 맛집 탐방’의 멤버는 나와 이초희, 그리고 유혜승으로 정해졌다.
계곡 음식점의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질 그 커다란 상이…… 진짜 부러질 수도 있겠다.
* * *
서울 북서쪽 끝자락.
이곳에는 북한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몇 개의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몇몇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우리 셋은 그 계곡의 음식점을 찾아서 뙤약볕을 걷고 있었다.
“하아…… 오빠 그냥 지금이라도 택시 타고 가요.”
“무슨 소리야. 다 왔어.”
“…….”
혜승이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고, 사정은 이초희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차이라면, 혜승이가 쉴 새 없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가는 반면, 이초희는 어느 순간부터 아예 말을 잃었다는 거다.
표현은 다르지만, 둘의 마음은 사실 같을 거다.
지하철역에서부터 3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걷자고 한 나에 대한 원망이겠지.
내가 무슨 가학적인 것에서 재미를 찾는 사디스트는 아니다.
나는 그저 어떻게 하면 가장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다.
맛있게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음식 자체가 맛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분위기와 상황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더위에 한창 지쳐 있을 때 마주하는 시원한 계곡, 그리고 맛있는 음식.
이것이 주는 보상이 그냥 에어컨이 나오는 택시를 타고, 편하게 계곡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보상감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고행은……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한 준비 같은 것이다.
두 여자들이 내뿜는 살기 비슷한 눈총이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 따가운 것 같긴 하지만.
이것 또한 내가 이겨 내야 하는 고행의 일부겠지.
우리는 그렇게 계곡 최고의 맛집 ‘닭집’에 도착했다.
“휴우 다 왔다…… 근데…… 가게…… 이름이…… 닭집?”
혜승이가 여전히 숨을 헉헉대며 말한다.
“응. 닭집. 어때? 가게 이름에서 포스가 느껴지지?”
이 질문에 대답한 건 이초희였다.
“좋아…… 보이는……데요?”
닭집의 간판은 그 모양과 문구들에서부터 오래된 집의 포스를 팍팍 풍겼다.
- 원조 오리탕, 닭도리탕 전문
- 족구장 완비
- 단체석 구비
- 시원한 물가 자리 있읍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오방색의 부채를 부치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계곡 자리 있나요?”
할머니는 연신 부채를 부치며 가게 뒤편에 있는 계곡 자리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계곡 쪽으로 들어서자 벌써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바람에 찡그렸던 두 여자의 인상이 확 펴지는 게 보였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늘의 아래에는 평상이나 돗자리가 죽 깔려 있었다.
우리는 평상 위의 한 자리로 안내받았다.
“어때요? 막상 오니까 좋죠?”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승이는 물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혜승이가 늘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풍경이 있다.
가게에 엄마, 아빠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혜승이의 눈에는 부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혜승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혜승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 아이가 튜브에 탄 채로 아빠와 함께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자지러지는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그런 혜승이는 두고, 나와 이초희는 메뉴판을 들여다 보았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메뉴판을 보며 이초희는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너무 많으니까 뭐 시킬지 고민되죠?”
메뉴의 개수는 자그마치 십여 개가 넘어 보였다.
아무리 이초희와 유혜승이지만, 이걸 다 시킬 수는 없으니까.
고민하는 게 당연한 거다.
이들이 인간이라면 말이다.
“고민이 되네요…….”
“그쵸……?”
“네, 진짜 고민이 되네요. 도대체 뭘…… 빼야 할지. 다 맛있게 생겨서…… 빼야 할 걸 고르는 게 만만치 않네요.”
“아…….”
머리에 망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더위로 인해 노곤해졌던 뇌가 퍼뜩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초희였지.
유혜승이었고.
십여 개의 메뉴 중 뭘 주문해야 할지가 아니라 뭘 빼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하는…….
정말이지 ‘클라쓰’가 다른…… 격이 다른 존재들.
“저 혼자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혜승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평소대로 시킬 수는 없고…… 에이…… 그냥 다 시킬까요?”
“음…….”
놀랄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라면 이 메뉴를 다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까.
이러다가 진짜 상다리 부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 *
고민 아닌 고민 끝에 몇 가지 메뉴가 선택됐다.
한방오리백숙, 토종닭도리탕, 생삼겹살, 도토리묵 무침, 해물파전, 두부김치.
얼핏 보면 많지 않아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한방오리백숙이 세 마리, 토종닭도리탕이 세 마리, 생삼겹살이 9인분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열띤 토론 끝에 결국 메뉴의 종류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보자고 결판이 났다.
너무 여러 가지를 시키는 것보다 한 가지를 깊게 파자는 것.
이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종류도 엄청나게 많이 시킨 거긴 하다.
난 여러 가지 메뉴를 먹을 수 있어 기쁘면서도 괜히 옆 평상의 테이블을 바라봤다.
한 여덟 명쯤 오셨나?
테이블 위에는 오리백숙 두 마리와 두부김치 한 접시가 소탈하게 놓여 있었다.
그래.
보통은 저렇게 먹는 게 맞지.
잠시 후.
직원분이 커다란 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이쪽으로 다가오셨다.
무슨 상을 쟁반 들 듯이 가볍게 한 손으로 들고 오신 그분은, 들고 온 상을 가볍게 평상 위에 올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상 두 개 더 올 겁니다. 일행 분들은 다들 언제 오시나요?”
“예……? 아, 그게…….”
시킨 양으로 봐서 최소 열두 명은 온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괜히 민망한 나를 대신해 혜승이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세 명인데요? 다 온 거예요.”
“아…… 그,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금방 나머지도 가져다 드릴게요.”
남자는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혜승이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뭘 저렇게 놀라? 다들 이렇게 시켜먹는 거 아닌가?”
혜승이는 고개를 돌려 휘익- 다른 테이블을 쳐다봤다.
응, 아니야.
아니라고.
누가 보기에도 전혀 많이 먹을 것 같지 않은 세 사람이 와서, 상 세 개가 아주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놓고 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먹는 광경.
그 광경에 계곡에 놀러온 많은 사람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 다 쳐다보는 것 봐. 그러게 그냥 나눠서 갖다 달라고 하자고 했잖아.”
“에이…… 그렇게 해서 언제 먹어요.”
“에이…… 음식은 한꺼번에 차려 놓고 먹어야 맛이죠.”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말을 쏟아 냈다.
에휴.
먹는 것에 있어서는 남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사는 두 사람이다.
뭐, 사람들의 시선이 좀 따갑긴 하지만…… 결국 저 시선들도 금세 사라질 거다.
남들 눈 그렇게 의식해서 뭐하나.
그러다가 음식 다 식으면 나만 억울하지.
자, 뭐부터 시작해 볼까.
상을 꽉 채운 음식을 행복한 표정으로 보는 내 눈에 확 들어온 음식.
그건 바로 도토리묵 무침이었다.
이모에게서 얻어온 도토리로 맛있게 묵을 만들어 먹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뜨거운 여름일수록 왠지 불에 조리한 것보다는 도토리묵 같이 왠지 시원하게 느껴지는 음식들이 더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미끄덩거리는 도토리묵을 앞접시에 옮긴다.
혹여 떨어질세라 손가락에 온 집중을 다 쏟아 넣는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떨어질 틈이 없이 신속하게 묵을 옮긴 후, 오이, 쑥갓, 양파 등의 채소를 그 위에 정갈하게 얹어 준다.
그리고는 숟가락을 이용해서 한입에 와앙-
오물오물.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도토리묵과 함께 씹히는 각종 채소들의 조화.
짭짤하면서도 고춧가루가 들어 있어 칼칼한 양념의 맛.
역시…… 내 첫 번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