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먹태와 여름밤
백윤호.
사실 이 자식과는 전생에 얽힌 스토리가 있다.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녀석을 본 김에 대강 전생의 일을 떠올려 보자면…….
녀석과 나와 재동이는 동네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삼총사’라고 불릴 정도로 붙어다녔다.
재동이가 머리도 좋으면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모범생 과였다면, 윤호는 어딘가 모르게 늘 나사가 빠진 것 같지만, 또 어딘가 모르게 늘 마음이 쓰이고 정이 가는 그런 친구였다.
녀석은 무슨 일을 해도 조금 부족해 보이고, 실수투성이였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참 좋아했다.
인간관계는 결국 상대적인 것.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나도 그에게 정이 갈 수밖에 없다.
윤호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었으므로 문제도 녀석의 그런 성격 때문에 터졌다.
시간이 흘러 윤호는 선우 푸드 본사의 인사팀장을 맡게 되었다.
외식업에서 인사를 책임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윤호는 숫자 다루는 데는 재능이 없었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는 재능이 있었기에 믿고 맡겼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윤호가 경영지원실 경리 직원과 짜고 회삿돈 10억 원을 횡령한 후 잠적했다는 소식.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쳤지만, 모든 정황은 윤호와 그 직원이 그랬던 걸로 판명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비통한 감정이 들었다.
10억 원?
겨우 10억 원?
그때 벌써 선우 푸드의 전체 매출이 몇천억 원을 호가할 때였다.
근데 10억 원이라고?
누군가에게는 큰돈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외식업계에서 큰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나와 선우 푸드에게는 사실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그게 수십 년의 우정을 배신한 대가라면?
더더욱 적은 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이 왜 그랬을까에 대한 생각보다는 왜 겨우 10억 원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더 강하게 들었다.
진실은 곧 밝혀졌다.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은 자기 집까지 담보를 잡혀서 수많은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고, 그 액수가 딱 10억 원이었다고 했다.
녀석은 나에 대한 우정 때문에 집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만 횡령해서 집을 살려 두고 해외 어딘가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 그냥 그깟 10억 빌려 달라고 말을 하지!
하여간, 전생에서의 녀석과의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었다.
물론, 이번 생에서는 녀석이 그런 선택을 하게 두지 않을 거다.
새로운 삶에서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해 갈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녀석은 얼마 전 일본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한 터였다.
그게 회귀하고 나서 지금까지 녀석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지금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좋은 친구와 진하게 회포를 풀 시간이었다.
전생에서 있었던 일들을 벌써 생각하기에는 아직 한참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백윤호!”
“이선우! 이 자식, 오랜만이다? 요새 형님한테 연락도 없고? 너 아주 요새 잘나간다며? 이 가게도 네 거라고? 이 새끼. 잘나가면 잘나갈수록 주위 사람한테 잘해야지, 인마!”
무슨 인사가 이렇게 기냐…….
하여간, 말도 많고, 정도 많고, 웃음도 많은 녀석이다.
그리고, 정정할 게 있다.
“야, 이 가게는 내 거 아니거든?”
“뭐? 재동이가 네 거라던데?”
“브랜드는 같이 만든 거고…… 이 가게는 저기 있는 창성이 형 거지.”
“브랜드를 같이 만들었는데, 가게는 창성이 형 거라고? 너 설마…… 형한테 지금 사기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사기?”
창성이 형이 너처럼 남의 돈 먹고 튀는 그런 사람인 줄 아냐.
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런 건 아니고. 하여간, 설명하면 복잡해. 그냥 형이랑 동업 관계라고 해 두자. 어서 앉아. 더운데 맥주나 마시고 있어.”
“그래. 생각하니까 괜히 복잡하다. 어, 창성이 형!”
녀석은 녀석답게 복잡한 생각은 접고, 오랜만에 만난 창성이 형에게로 달려들었다.
* * *
깡-
두터운 맥주잔들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각자의 잔을 깊게 들이켠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야, 그동안 형 없이 잘들 지냈냐?”
윤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인마. 너 없다고 뭐 우리가 잘 못 지낼 줄 알았냐?”
“이 새끼…… 요새 술도 끊었다며?”
“뭐 끊은 건 아니고…… 맥주 한두 잔 정도는 가끔 마시지.”
말을 하는 재동이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오늘은 세 잔까지? 오케이!”
재동이가 부모님에게 사탕을 허락받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윤호는 ‘이게 뭐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전생에 녀석이 돈을 갖고 튄 후, 죽기 전까지 한 번도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와이프와의 사이는 끝도 없이 벌어져 결국 이혼을 하고, 재동이가 알코올 중독에 허덕이는 와중, 윤호는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존재였다.
오로지 보스와 직원 관계로만 맺어져 있는 선우 푸드에서, 윤호는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맺어져 있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녀석을 잃은 아픔이 유달리 크게 다가왔다.
아까 윤호가 물었었다.
- 그동안 잘 지냈냐?
나는 윤호가 말한 ‘그동안’이라는 단어에서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성을 느꼈다.
윤호의 ‘그동안’이 녀석이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1년간의 시간이었다면, 내게 ‘그동안’은 녀석의 배신에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죽었다가 다시 이 시간으로 회귀하는 기묘한 일을 겪은 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 그런 시간이니까.
난 말없이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푸근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말이 없어졌어? 재동아.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냐?”
“아니? 그냥 좀 피곤한가 보지. 선우야, 오늘 일 많이 바빴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 아무 일도 없으니까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해.”
난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재동이에게 말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뭐. 야, 먹태 나왔다.”
창성이 형이 잘 구운 먹태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형은 [먹태와 여름밤]이라는 글자와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먹태의 모양과 여름밤의 별을 모티프로 만든 [먹태와 여름밤]의 로고는 성진이 형의 작품이었다.
그 형이 참…… 인쇄만 잘하는 게 아니라 디자인도 꽤 한다.
이래서 전생에서도 형이랑 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야, 동업자. 오랜만에 친구들 만났다고 일은 안 하고 수다만 떨기냐?”
“형, 나 선우 일 년 만에 만났어. 좀 봐주라, 봐줘.”
“이 자식이…… 나는 뭐 일주일 만에 만났냐? 이 형은 안 보여?”
“에이…… 아무리 형이 좋아도 선우랑 형은 비교 불가지.”
윤호는 그 말을 하며 내 어깨에 척 손을 올렸다.
여름밤이라 좀 후끈하긴 했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아…… 나 좀 너무 느끼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윤호.
그리고, 앞으로는 전생에서 이상하게 끝나 버린 우리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냥 지금이 좋은 나였다.
“그래, 자식들아. 누가 불알친구들 아니랄까 봐. 옛다. 먹태나 실컷 먹어라.”
실컷 먹으라는 형의 말처럼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먹태.
“우와…… 내가 진짜 이 먹태를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말을 마친 윤호는 잘 구워져서 바스락거리는 먹태를 마요네즈 소스에 찍어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근데, 가만 있어 보자.
일본에도 분명 먹태가 있을 텐데?
일본 먹태를 먹은 지 오래되다 보니 나도 정확한 맛과 모양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에도 분명히 먹태가 존재한다.
“일본에도 먹태 있잖아?”
“어, 선우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있지. 일본에도 먹태가 있지. 근데 말이야. 이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먹태랑은 분명히 차이가 있지.”
“차이?”
“응. 한국식 먹태가 바삭한 것과는 달리 일본식 먹태는 촉촉하다고나 할까?”
“아…….”
“뭐지? 그 다 알았다는 표정은?”
맞다.
다 알았다는 표정.
촉촉하다는 단어를 듣자마자 실타래에서 실이 뽑아져 나오듯이 일본식 먹태에 대한 기억이 뽑아져 나왔다.
일본식 먹태가 촉촉한 이유.
그건 바로 일본에서는 먹태를 일본 전통술인 사케에 재워 숙성시킨 후 먹기 때문이다.
윤호의 말은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먹태를 시키면 주인장이 무슨 한지 같은 종이에서 먹태 한 마리를 통째로 꺼내. 그 다음에 먹태의 속살을 찢어서 접시에 올려 주지. 그걸 소스에 찍어서 먹는 거야.”
사케에 숙성시킨 먹태는 식감은 반건조 오징어와 비슷하고, 맛은 뭐랄까? 코다리의 속살을 더 조금 건조시켜서 먹는 기분이랄까?
이건 한국의 먹태와는 분명히 다른 맛이다.
아예 다른 음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속살을 벗겨 내면 껍질이 남잖아. 이 껍질은 또 통째로 구워다 줘. 아, 이건 한국이랑 똑같네. 여기 이 바삭한 껍질처럼. 그래, 이 맛은 똑같아.”
윤호의 말처럼 껍질을 통째로 구워 먹는 건 한국과 일본이 같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데에 있다.
“사실은…… 먹태 맛보다는 이 소스 맛이 그리웠어. 청양고추와 마요네즈가 만나서 매콤 짭짤 고소한 이 소스. 일본 소스는 뭐 여러 가지 넣어서 다양한 맛은 나는데…… 이 매콤한 청양고추의 맛이 없거든. 이게 핵심인데 말이야.”
그렇다.
윤호가 눈물나게 그리웠던 건 먹태보다도 바로 이 청양마요소스였을 것이다.
바삭하고 고소하지만, 뭔가 한끗이 부족한 먹태의 맛을 채워 주는 게 바로 이 소스이다.
마요네즈와 간장이 버무려진 소스를 듬뿍 찍어 먹은 후, 편으로 썰어져 있는 청양고추 한 조각을 딱 먹어 주면 비로소 완벽한 먹태의 맛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신나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녀석의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의 녀석에게서는 어떤 어두운 구석도, 힘들어 보이는 구석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 내 안에서는 자꾸 의미 없는 의문들이 맴돈다.
- 윤호야. 왜 나를 속여 가며 그런 짓을 한 거냐?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돈 좀 빌려 달라고.
모르겠다.
왜 윤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한 건지.
어쩌면 윤호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던 건지.
내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못 하는 어떤 ‘감정’이 우리 사이에 형성되고 있었던 건지.
짐작 가는 건 하나 있다.
그때 난 ‘사업’에 완전히 미쳐 있었다.
그땐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완전히 망가져 버린 가족, 얼마 남지 않은 인간관계…… 몰두를 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런 것들을 다 잊을 수 있었으니까.
나만 혼자 윤호를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밑빠진 독처럼 우리의 관계는 점점 새고 있었는지는 모른 채.
괜히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오늘은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날이 아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윤호가 내 앞에 있고,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전생에서 일어났던 그런 일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다.
지금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행복하게.
웃으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면서.
자, 마시자.
깡-
두터운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생맥주 거품에서 터져 나온 포말이 테이블 사방으로 튀었다.
여름밤의 축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