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역시 가래떡은 (1)
선우네 백반의 공식 투덜이에서 이제는 공식 홍보대사가 된 황종훈.
그는 영진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 중 하나인 ‘황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투덜이이자 말이 많은 사람이 바로 황가 방앗간의 사장 황종훈인 걸.
하지만…… 누구도 그의 떡을 뽑는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 황가 방앗간 떡은 진짜 최고지.
- 똑같은 쌀을 써도 이 가래떡 맛이 안 난다니까.
- 황 씨가 말은 많아도 떡 뽑는 실력 하나는 진짜 알아줘야 해.
간식이랄 게 별로 없었던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황가 방앗간에는 오래된 단골들이 많이 찾는다.
오늘은 오래된 단골 중 하나인 한 손님이 무려 쌀 다섯 가마를 모두 가래떡으로 만들어 달라는 대형 주문을 의뢰했다.
갑작스러운 주문에 당황한 종훈 아저씨에게 연락이 왔다.
떡 뽑는 일을 좀 도와달라고.
평소에 많은 방앗간 손님을 백반집으로 보내 주는 그임을 알기에 종훈 아저씨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같은 시장에서 이렇게 도우면서 사는 거지.
다행히 오늘의 메뉴 준비는 모두 끝낸 상태였다.
“이 샤프. 와 줘서 고마워. 자, 일부터 빨리 시작하자고.”
“네, 아저씨. 전 뭐부터 할까요?”
“쌀부터 좀 날라 줘. 저기 있는 거.”
“네!”
전생에서도 떡 만드는 체험을 해 본 적이 있다.
떡이라는 게 쌀가루 만들어서 찜통에 넣어서 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안 해 본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마치 야구를 TV로만 경험한 사람처럼, 왜 한가운데에 들어오는 공을 보고도 못 치냐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
뭐든지 멀리서 보는 것과 실제로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법이니까.
맛있는 건 혼자만 먹을 수 없듯이 좋은 일을 하는데 혼자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든든한 지원군 두 사람을 불렀다.
그것도 외국인으로.
우리 가게의 단골 손님 빅터와 최근에 단골이 된 리자준이 그 주인공이다.
“황 씨! 쌀 어딨어?”
“뭐, 이놈아? 황 씨이?”
“빅터. 황 씨라고 부르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어? 왜? 다들 황 씨라고 부르던데. 왜 나만 안 되는 거야? 이거 외국인 차별 아니야, 차별?”
“아니, 그게 아니고…….”
“이 샤프. 됐다, 됐어. 바빠 죽겄구마잉. 뭘로 불러도 좋으니께 거그 있는 쌀이나 후딱 나르소. 빨리빨리.”
“오케이. 좋았어! 간다! 황 씨!”
“저도…… 시작할게요…… 황 씨.”
리자준도 빅터를 따라 일을 시작했다.
가래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쌀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장정 세 명이 포대째 옮긴 쌀을 커다란 싱크대에 붓는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씻은 쌀은 물에 잠시 불려 놓는다.
쌀이 적당히 불면 물기를 빼내고, 빻는 기계에 넣어 가루가 되도록 빻는다.
이때 소금을 적당량 쳐 준다.
잘 빻아진 가루는 네모난 시루에 담아 찜기에 찐다.
이렇게 해서 쪄진 떡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백설기이다.
종훈 아저씨가 백설기 상태의 떡을 한 움큼 떼어 맛을 보라고 건네준다.
체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식가 리자준이 새끼손가락만큼 떡을 떼어 맛을 본다.
“으음…….”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대부분의 음식이 방금 조리했을 때가 가장 맛있지만, 떡은 그야말로 조리한 후 시간이 얼마 지났느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지는 음식이다.
방금 한 떡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리자준의 고국 중국 또한 떡을 즐겨 먹는 나라이다.
“약간 거친 것처럼 보이는…… 알통이가…….”
“알갱이.”
“아, 알갱이가 정말 식탐이 좋아…….”
“식감.”
“아, 그래. 식감. 식감도 좋고…… 방금 만들어서 그런지…… 너무 고상해.”
“고소해.”
“아…….”
이제 빅터가 리자준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줄 정도가 되었나?
하여간, 다른 건 몰라도 음식에 관련된 단어만큼은 빨리 배우는 빅터이다.
백설기 상태의 떡을 가래떡 만드는 기계에 투입한다.
압출이라고 하는 이 과정을 거치면, 아까 리자준이 말했던 거친 식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가래떡이 된다.
압출된 떡은 물 속으로 뽑은 후 네모난 판에 가지런히 크기를 맞춰 잘라 담는다.
종훈 아저씨가 가래떡을 자르는 모습을 보니, 마치 기계 같았다.
오늘따라 영 달라 보이는 종훈 아저씨다.
말많은 투덜이에 우리 가게 홍보대사인 아저씨는 온데간데없고, 수십 년간 떡을 만들어 온 떡의 달인이 여기에 있었다.
기계에서 뽑아낸 기다란 가래떡을 규칙적이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 내는 모습에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온 노력과 경력이 그대로 느껴졌으니까.
쌀 다섯 가마를 가래떡으로 만드는 과정은 위의 과정의 무한 반복이었다.
쌀을 씻고, 씻은 쌀을 빻고, 빻은 쌀을 찌고, 떡이 된 쌀을 압축시켜 긴 가래떡으로 만드는.
종훈 아저씨가 가래떡을 크기에 맞게 잘라 내면 우리는 그 가래떡을 상자에 담아 포장했다.
그렇게 시간을 잊을 정도로 작업이 계속되던 어느 순간, 드디어 마지막 가래떡을 뽑아 상자에 담았다.
휴-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와…… 가래떡…… 이렇게 만들기 어려운 줄 몰랐어…… 황 씨…… 수고했어.”
“뭐, 인마? 이놈이 아까부터 진짜로.”
막 뽑아낸 가래떡으로 빅터를 내려치려던 종훈 아저씨를 겨우 막았다.
“아저씨. 얘 외국인이잖아요. 높임말을 잘 몰라서 그래요.”
“아, 진짜 이놈 모르는 거 맞당가? 아주 음식 이름은 기가 막히게 잘 알드만.”
“네. 쟤가 좀 그래요. 음식 이름‘만’ 기가 막히게 잘 알아요.”
“휴- 빅터! 오늘은 이 샤프 때문에 참는 걸로 알어. 다음부터 또 황 씨라고 불렀담 봐라.”
“아, 알겠어…….”
빅터에게 황 씨가 아니라 그냥 아저씨라고 하면 된다고 일러 주고, 널려져 있던 주변을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갈 무렵 방앗간 문을 열고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철물점 장만국 아저씨였다.
“어이, 황 씨! 아이고, 벌써 다 한겨? 내가 일 좀 도와주러 왔는데…….”
“에라이. 빨리도 왔구먼, 빨리도! 너 이 자식 일부러 지금 온 거제?”
“야, 인마. 나는 뭐 가게 없냐. 철물점 한다고 아주 팽팽 노는 줄 알어, 가만 보면…… 그리고, 너무 열내지 말어. 내가 좋은 거 갖고 왔으니께.”
“좋은 거?”
“짜잔.”
만국 아저씨의 손엔 웬 참기름병이 들려 있었다.
“야, 인마. 너 장난 치냐? 그거 참기름 아니여?”
“에헤이. 참기름 장사에 떡집까지 하는 놈이 눈썰미가 저래서야…… 딱 보면 모르겠어? 에라이. 자 한 번 찍어 먹어봐.”
만국 아저씨가 작은 그릇에 그 액체를 담아 줬고, 종훈 아저씨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일제히 가서 손가락으로 그걸 찍어 먹었다.
“으으음. 이거 진짜 스윗해. 이거 뭐야? 꿀이야?”
“음…… 이거 중국에도 많아…… 펭미…… 꿀…… 아, 꿀범이 방금 가져온 것처럼 신선해…….”
“꿀벌.”
꿀이라 확신하는 두 사람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하긴, 외국인들이라면…… 이 음식을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걸 꿀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도 있다.
맛은 정말 꿀이랑 비슷하니까.
하지만 이건…… 꿀도 아니고 설탕도 아니다.
두 가지 성분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조청이다.
조청은 엿기름과 물, 밥으로 만들어 내는 한국의 전통 음식이다.
조림, 볶음 등의 반찬에 넣어 설탕 대신 단맛을 내는 데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청 하면 가장 먼저 떠으로는 음식은 바로…… 가래떡이다.
예로부터 그랬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어 온 민족이다.
이유는 모른다.
아니,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맛있으니까.
가래떡 만들 때 본 것처럼 가래떡에는 쌀과 소금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고소하고 담백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심할 수 있다.
이때 그 심심함을 완벽하게 잡아 주는 것이 바로 조청이다.
빅터와 리자준에게는 대충 이게 꿀이 아니라 조청이라는 걸 알려 주고 바로 시식에 들어갔다.
방금 만들어서 김을 뿜어내는 가래떡을 한 움큼 떼어 낸다.
가래떡은 모짜렐라 치즈처럼 죽 늘어난다.
떡이 얼마나 부드러우면 이렇게 치즈처럼 늘어나냐.
그 모습만 봐도 군침이 돈다.
손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길게 떼어 낸 떡에 조청을 듬뿍 바른다.
어찌나 듬뿍 발랐는지 떡을 쥔 손가락 사이로 갈색 조청이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조청을 입으로 한 번 훔친 후, 가래떡을 입으로 가져간다.
오물오물.
쩝쩝.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조청의 맛을 느끼자마자 쫀득쫀득한 가래떡의 식감이 입안을 완전히 지배한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방금 뽑은 떡은 정말…… 지금 이 순간 이 가래떡을 이길 수 있는 음식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만큼 압도적인 맛이었다.
다들 족히 삼십 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가래떡을 순식간에 하나씩 해치웠다.
아, 물론 리자준은 제외.
녀석은 엄지손가락만 한 거 하나를 조금씩 조금씩 뜯어먹으며 맛을 음미하고 있었으니까.
부드러운 떡은 조청과 함께 먹으니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가래떡은 막 뽑아낸 떡을 생으로 먹어도 좋지만, 역시 구워 먹기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단, 구워 먹기에는 방금 뽑은 떡보다는 만든 지 조금 지나서 약간은 굳어 있는 떡이 더 좋다.
“종훈 아저씨. 혹시…… 어제 만들어 둔 가래떡 없어요?”
“아니, 방금 뽑은 떡이 이렇게 맛있는데 어제 만든 떡은 왜 찾는건가?”
“구워 먹으려고요.”
“오…… 가래떡을 구워서 조청에 싸악 찍어먹는다 이 말이지? 그렇다면 잠시만.”
종훈 아저씨는 어제 팔려고 만들어 둔, 랩에 씌워져 있는 떡 한 접시를 얼른 가져왔다.
가스 버너와 석쇠는 어느새 사람들의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살짝 굳은 떡을 석쇠에 일렬로 집어넣고, 약한 불에 살살 굽는다.
살짝 태워도 맛있지만, 그렇다고 한꺼번에 불을 높여 겉만 태우면 맛이 없다.
겉은 살짝 타서 바삭하고, 속은 열이 잘 전달되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뭐든 겉바속촉이 진리다.
가래떡이 익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며, 석쇠를 위아래로 자주 돌려 가며 떡을 굽는다.
겉이 노릇노릇해지면서 중간중간 탄 부위가 생길 때쯤 불을 끈다.
“자, 하나씩 집으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손을 호호 불어 가며 집은 구운 가래떡.
손에 느껴지는 바삭한 촉감이 좋다.
조청을 찍기 전에 우선 한입 베어 문다.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겉면의 고소함이 느껴지자마자 따뜻하면서도 부드럽게 혀를 파고드는 가래떡의 속살.
아…… 이건 또 방금 뽑은 떡과는 또 느낌이 다르다.
뭐랄까?
홈런볼 같은 과자를 먹는 느낌이랄까.
막 뽑은 가래떡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강의 부드러움으로 승부한다면, 구운 가래떡은 약간은 거친 겉면에 숨은 부드러운 속살이 이중적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굴지만, 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처럼.
거기다가 조청과의 궁합은 또 어떤가.
구운 가래떡에 아주 착착 달라붙는 조청의 달달하고 구수한 맛이었다.
가래떡의 향연을 즐기고 나니, 떡을 뽑아내느라 힘들었던 시간들이 싹 잊혀진다.
그리고…… 그 비어 있는 뇌 속으로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가래떡을 보니까…… 이 음식이 또 생각나지 않을 수 없네?
“종훈 아저씨? 저녁도 그냥 여기서 해 먹을까요?”
“응? 내가 맛난 거 좀 사 줄려고 했는디.”
“제가 해 드릴게요. 충분히 맛있는 게 생각나서요.”
“나야 뭐 이 샤프가 해 주면 좋지! 난 찬성!”
빅터와 리자준, 만국 아저씨도 동시에 ‘찬성’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