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백반집에서 별걸 다 (4)
“왜 저를 이혜승이라고 소개했어요?”
“아…… 그거…….”
캐스팅에 성공한 박찬희 감독도 가고, 오후 장사도 끝마친 뒤 혜승이와 나는 다시 루프탑에 올라왔다.
내 손에는 맥주, 혜승이의 손에는 콜라가 들려 있었다.
내 손에는 500밀리미터 맥주 한 캔, 혜승이의 손에는 1.5리터짜리 콜라 페트병이 들려 있긴 했지만…… 어쨌든 저것도 들려 있는 거니까.
“너 내 동생 맞잖아. 그러니까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럼 주광재 오빠도 내 친오빠고, 빅터 요한손 오빠도 내 친오빠인 거예요?”
“아니, 그건 또 다른 얘기지.”
“뭐가 달라요? 피 한 방울 안 섞인 건 똑같은 건데.”
흐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는 왜 유혜승을 이혜승이라고 그들에게 얘기했던 걸까.
왜 내 친동생이 아니라 우리 가게 직원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안 그래도 오후에 장사를 하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던 참이었다.
“그냥 넘어가자. 일도 잘됐는데.”
“엥? 왜 얼버무려요? 그리고…… 나는 이게 잘된 건지 못된 건지 아직도 헷갈린다는 말이에요. 갑자기 이게 뭐야. 내가 배우라니…….”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혜승이에게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지금 네가 잘됐는지 못됐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그 배역…… 배우 지망생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따고 싶어 할 그런 배역이란 말이다.
이미 영화판에서는 잘 알려진 박찬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JJ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가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내가 이래서 이재동이나 유혜승 같은 천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들은 잘났는데도 지들이 얼마나 잘났는지 잘 모른다.
어쩌면 그게 다 자기들만의 콘셉트일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나도 모르게 유혜승을 이혜승으로 소개한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건 일종의…… 보호 본능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혜승이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유혜승이 되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날아올 그 시선이 맘에 안 들었다.
고아라는 낙인.
그 낙인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이미 색안경을 끼고 혜승이를 바라보게 될 거다.
그건 시작부터 혜승이의 삶이 뭔가 틀어질 수 있다는 거다.
혜승이의 말마따나 이상한 놈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고.
그런 복잡한 계산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이뤄진 듯했다…… 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암튼 그냥 좀 넘어가자. 말이 헛 나온 걸로 하자고.”
“엥? 말이 헛 나왔다니요. 그러기엔 감독님이랑 실장님 가기 전까지 너무 친오빠 모드였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을?”
“에휴……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모든 걸 포기하고 또 내 나름대로의 이유를 말해 주려니까 도저히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내 몸이 윙윙 여름밤을 날아다니는 모기만큼 작아지는 듯했다.
내 입으로 어떻게 그걸 말해.
널 보. 호. 해 주고 싶었다고.
으으으.
그러다 불현듯 저 아귀의 입을 틀어막을 만한 묘책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네? 먹고…… 싶은 거요?”
혜승이의 눈동자가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 떠오른 수많은 먹고 싶은 것 중에 하나를 고르는 중일 거다.
커다란 은행의 예금 잔고가 비는 일이 없는 것처럼 혜승이의 음식 생각 창고가 빌 일은 결코 없으니까.
“음…….”
혜승이의 머릿속이 심히 복잡해 보인다.
음식을 골라야 할 때만 저런 진심 어린 표정을 띠는 녀석이다.
한참을 음…… 음…… 거리던 녀석이 드디어 음식 이름을 입에 올렸다.
“수박 화채요.”
“오…… 좋은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마침 수박 사 놓은 게 있어서 금방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바람처럼 루프탑을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민망한 대답을 해야 할 순간을 피했다는 생각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수박 화채.
빨갛게 잘 익은 수박만 있다면 ‘요리’라고도 할 수 없는 간단한 음식이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여름밤, 평상에 앉아서 먹기엔 이것만큼 좋은 야식도 없었다.
일단, 시원하게 쟁여 놓은 수박 한 통을…… 아니, 두 통을…… 음…… 두 통도 모자란가?
그래.
혜승이 입도 확실하게 막을 겸…… 세 통을 꺼낸다.
수박을 반으로 자르고, 커다란 스테인레스 대야에 수박을 퍼 넣는다.
수박을 퍼 넣을 때 한 가지 팁.
동그란 아이스크림 스쿱을 사용하면 동글동글하고 예쁜 모양의 수박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땅을 파서 뭔가를 채굴하듯 수박을 퍼내고 난 뒤 우유와 사이다를 대강 대야가 차오를 만큼 붓는다.
우유와 사이다의 비율은 그야말로 취향 차이인데, 톡 쏘는 탄산 맛을 좋아하면 사이다를 더 집어넣고,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좋아하면 우유를 더 집어넣으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박 화채에 꼭 필요한 재료.
바로, 캔에 담긴 후르츠 칵테일.
빨갛고, 노란 과일 조각이 가득 담긴 캔을 까 통째로 대야에 붓는다.
수박이 세 통이니 후르츠 칵테일도 최소 세 통이 들어가야 한다.
이거 어린이 돈까스 나갈 때 사이드 메뉴로 주는 건데…… 오늘 다 쓰게 생겼다.
낑낑거리며 수박 화채가 가득 담긴 커다란 대야를 들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왔다.
혜승이가 버선발로 나를…… 아니, 화채를 마중 나왔다.
동그랗게 퍼낸 수박 조각은 보기에도 좋지만 식감도 좋았다.
동글동글한 수박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으면 뭔가 굴리는 재미도 있었고, 네모나게 조각난 수박보다 더 부드러운 걸 씹는 것 같은 느낌도 좋았다.
중간중간 씹히는 후르츠 칵테일 또한 수박 화채를 먹는 큰 재미 중 하나였다.
파인애플, 체리, 황도 등의 과일 모두 제각각의 맛을 내며 존재감을 발휘하지만, 후르츠 칵테일 중 최고의 과일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이 녀석이다.
“오빠. 이 하얗고 쫄깃쫄깃한 게 뭐예요? 난 이게 제일 맛있더라.”
그게 제일 맛있다고?
안 맛있는 게 있긴 하고?
입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후르츠 칵테일과 함께 씹어 삼키며 말했다.
“그건 쉽게 말하면…… 그냥 코코넛이라고 생각하면 돼.”
“코코넛? 열대 과일?”
“응. 정확하게는 코코넛 즙을 가공해서 젤리로 만들어 놓은 거야. 설탕 같은 당 성분을 추가해서.”
“아…… 그럼 이건 코코넛 젤리구나?”
“그렇지.”
코코넛 젤리가 가장 맛있다는 녀석의 말에는 이백 프로 공감한다.
어떤 때는 이 코코넛 젤리만 가득 담긴 통조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쫄깃쫄깃한 식감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한 통 정도는 금방 비워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수박이나 후르츠 칵테일 등의 건더기도 좋지만, 수박 화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시원한 국물이다.
우유, 사이다, 후르츠 칵테일의 국물이 합쳐진 데다 얼음을 동동 띄워 시원한 국물은 ‘피서’ 그 자체다.
대접째로 시원하게 국물을 들이켜면 몸 전체가 순식간에 계곡물에 입수한 것만 같은 시원한 느낌이 드니까.
그렇게 나와 혜승이가 수박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매우 익숙한…….
“어라. 이게 누구야? 너희들 여기서 뭐해?”
선우네 백반의 어른들.
어머니, 아버지, 민호 삼촌, 순미 이모까지.
어디서 거나하게 1차를 즐기고 오셨는지 다들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듯 보였다.
“어라? 저희 모르게 네 분이서 회식하신 거예요?”
“네가 혜승이랑 할 얘기 있다며? 그래서 우리도 우리끼리 얘기하고 왔지. 헤헤헤.”
고종숙 여사가 불그레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수박 화채를 가운데에 두고 선우네 백반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코 혜승이의 캐스팅 일화였다.
“난 혜승이가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민호 삼촌의 한마디.
삼촌뿐만 아니라, 사실 선우네 백반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혜승이의 외모는 그만큼 뛰어났으니까.
그냥 예쁜 것과는 급이 다르다고나 할까?
연예인 ‘급’의 외모라고 다들 생각했던 거다.
물론, 혜승이가 제대로 먹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혜승이의 외모보다 먹성에 더 놀라곤 했지만.
“근데요. 아까 선우 오빠가 감독님한테 저를 이혜승이라고 소개했어요.”
“그런 거야 좀 틀릴 수도 있지. 그게 신경 쓰였던 거야?”
민호 삼촌이 또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소리를 했다.
그게 틀린 게 아니고…… 일부러 그랬던 거잖아요.
삼촌이 가끔 이런다.
우직하고,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눈치가 없을 때가…… 많다.
뭐랄까?
너무 곧이곧대로 사람들 말을 받아들인다고나 할까.
이런 사람이 영업 사원으로 30년을 살았다는 게 가끔씩 신기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우직함과 진실함이 거래처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았을 수도 있다.
세상에 말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실된 사람은 몇 없으니까.
한편, 내가 유혜승을 이혜승으로 만들었다는 소리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은 반응을 보이셨다.
“당연한 거지.”
“당연한 일을 했네.”
“네? 그게 왜 당연해요? 아무리 그래도 저는 유혜승인데.”
혜승이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의문이 해결 안 된 건 옆에 있던 민호 삼촌도 마찬가지.
그러자 입을 연 건 순미 이모였다.
“혜승아. 선우 오빠가 너 지켜 주려고 그런 거야.”
“엥? 저를 지켜 주려고요? 선우 오빠가? 만날 일 느리다고, 많이 먹는다고 구박만 하는 오빠가요?”
“야, 또 내가 언제 너를 구박을…….”
진짜 구박까지 한 적은 없다.
가끔씩 인간이 아닌 괴물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아버지가 순미 이모의 말을 받았다.
벌써부터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울 준비를 미리 하시는 건가?
“혜승아. 우리는 한 식구잖아. 선우네 백반에서 함께 사는 한 식구.”
“…….”
“식구끼리는 서로 지켜 줘야 하는 거잖아. 식구의 약점이 있으면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려 주고, 식구의 부족한 점이 있으면 다른 식구가 그걸 보완해 주고.”
“네, 아저씨.”
“선우는 그 일을 한 거야. 그 사람들이 혜승이를 우리의 가족으로 생각하도록. 그래서 혹시나 혜승이에게 함부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혜승이의…… 약점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
그제야 혜승이도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제야 알겠냐?
오빠로서의 내 깊은 마음을.
아버지의 눈가에는 이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또로록.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참…… 눈물 많은 분이다.
그리고 꼭 아버지는……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감동받아서 운다.
“여보. 분위기 이상해지게 또 울지 말고, 정신 차려요.”
“어, 아, 그럴까?”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역시…… 부부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는 없다.
“혜승아. 너 진짜 우리 딸 할래? 안 그래도 아줌마가 딸이 없어서 늘 아쉬웠는데.”
“네? 따, 딸이요?”
맙소사.
아버지를 말리는 것 같던 어머니가 더한 폭탄을 던지신다.
언감생심 딸이라니…… 입양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
“그래. 우리가 혜승이 입양합시다.”
푸웁-
입속에 가득 차 있던 수박 화채가 튀어나왔다.
“아이, 더러워.”
“선우야!”
“아, 죄송해요. 아니,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셔서.”
“참내. 농담 좀 한 번 한 거 가지고 놀라기는…….”
졸지에 다 큰 동생이 생긴다는데 안 놀라게 생겼습니까?
하여간…… 두 분은 다 좋은데, 너무 기분파야.
기분 좋으면 아주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으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