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백반집에서 별걸 다 (3)
과거로 돌아온 ‘회귀’라는 기이한 일을 겪으면서 처음 얼마간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 당황은 이내 설렘 같은 감정으로 바뀌었다.
그래, 이번 생은 더 잘 살 수 있어.
이건 신이 내게 내려주신 기회인 거야.
이번에는 진짜 행복하게 후회 없이 잘살아 보자.
그러면서 하나둘씩 삶을 바꿔 나갔고, 내 삶이 바뀌면서 자연히 주변 사람들의 삶도 바뀌어 갔다.
화마에 유명을 달리하셨던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셨고, 민호 삼촌은 이런저런 사업을 전전하는 대신 선우네 백반에 자리를 잡았다.
순미 이모나 재동이의 삶도, 영진순댓국 영숙 이모의 삶도 조금씩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뀌어 갈 것이다.
혜승이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배우 이전의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 전생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이렇게 나의 주변 사람이 됐다.
게다가 혜승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조금 더 마음이 쓰였다.
애초에 고아원 출신인 데다가 막말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가족조차도 없는 애다.
이런 애의 인생에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게 가끔씩 큰 책임감 같은 걸로 다가오기도 했다.
고아원에서 혜승이를 처음 만난 날, 그 김밥 때문에 선우네 백반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혜승이는 진작 배우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쯤 어디 소속사에 소속이 되어 배우가 되기 위한 담금질을 하고 있어야 할 애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은근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오늘의 이 우연한 캐스팅 기회가 나에겐 참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루프탑 평상 위에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백반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자, 음식은 준비됐습니다.”
“음…… 좋습니다. 그럼 진짜 시작해 보겠습니다. 혜승 씨, 준비됐어요?”
“네?”
혜승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런 혜승이를 바라보며 무심코 한마디 던진다.
“그냥 평소에 먹는 것처럼 먹어. 연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변에 누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
“뭘 그렇게 머뭇거려? 어차피 너 아까 먹은 거 배 다 꺼질 때 됐잖아. 지금 살짝 배고프지 않아?”
“배…… 고파…… 요.”
“그래. 그럼 된 거야. 자, 시작해.”
혜승이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조심스럽던 그녀의 손길은 김치찌개를 한술 뜨자마자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듯 은은한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손은 기계적으로 음식을 퍼서 나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입은 그렇게 날라진 음식을 기계적으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음…….”
박찬희는 혜승이의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확실히 잘 먹는 건 맞다.
이 정도면 음식을 먹는 연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배역의 역할과는 다소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할까?
지금 혜승이가 먹는 느낌은 뭔가 푸드 파이터의 느낌이다.
전투적으로 밥을 먹어 대는.
그가 원하는 여배우의 역할은 푸드 파이터가 아니다.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식탐을 갖게 된 여자이다.
두 가지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다른 건 역시 다른 거다.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는 식탐에 빠진 사람은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식탐이라는 건 일종의 정신적 강박에 가까운 거니까.
결코 행복한 상태가 아닌 거니까.
“자, 잠깐만요.”
“…….”
“지금 잘 드시는 건 좋은데…… 혹시 제가 말씀드리는 상황을 좀 고려해서 드셔 볼 수 있을까요?”
먹기를 중단한 혜승이가 박찬희 감독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조금 슬프게 먹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배역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식탐을 갖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어린 시절 못 먹었던 기억 때문에 먹을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먹어 대는. 그 맛도 제대로 모른 채 말이죠. 음…… 조금 어렵죠? 흠…….”
“…한 번 해볼게요.”
“가능하시겠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박찬희는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말을 마쳤다.
생각해 보니 이게 무슨 짓이었나 싶은 박찬희였다.
아무리 외모가 딱인 데다가 음식을 잘 먹는 게 자신이 생각하는 배역이랑 맞다고 한들…… 배우는 그래도 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잘 먹는 것 이전에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거다.
물론, 자신에게 맞는 배역을 잘 만난다면 약간의 연기 실력만으로도 그 배역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저기 유혜승에게서 어린 시절 못 먹고 못 산 트라우마 같은 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저렇게 든든한 오빠도 있고, 한없이 밝아 보였던 주인 사장들인 부모님도 있고…… 그렇게 자란 아이에게서…… 고작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에게서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연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박찬희는 옆에 앉은 김종훈을 일견했다.
김종훈의 표정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실제로 잘 먹는 배우를 찾는다고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배우’라는 틀 안에서 찾아야 했던 거 아닌가 싶다.
저기 이혜승이라는 친구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너무 훌륭하지만…… 연기를 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김종훈이 조용히 박찬희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네요.”
“음…… 아니에요. 저도 뭔가를 실수한 것 같습니다. 감독님.”
한편, 박찬희의 주문을 받은 유혜승은 생각했다.
트라우마…… 트라우마?
제대로 된 쌀밥 한 번 먹을 수 없어서 주린 배를 물로 채웠던 것도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다 돈이 생기면 밥 대신 슈퍼에 가서 아빠의 술을 사다 준 것…… 그런 것도 어린 시절의 상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음식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들었던 것…… 그런 게 바로 식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트라우마…… 식탐 같은 단어들은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왠지…… 박찬희 감독님이 말한 여자…… 그녀가 처한 상황에는 공감이 갔다.
못 먹었던 것이 슬픈 기억이 되면…… 음식을 앞에 두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처음 고아원에 갔을 때 자신이 그랬었다.
그런 식탐을 조금씩 자제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여기서는 내가 밥을 굶을 리도…… 밥을 먹는다고 나를 구박할 아빠도 없다는 게 체감이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체할 수 없던 식탐이 조금씩 제어가 됐다.
유혜승은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기 시작했다.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욱여넣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녀는 거의 음식을 입속으로 욱여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혜승의 동작에는 어색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식탐이 생긴 여자…… 그 자체였다.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먹어야 해서 먹는 그런 사람처럼…… 무작정 음식을 입속에 욱여넣고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턱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관찰자로서 한 발 떨어져서 이 ‘오디션’ 현장을 지켜봤다.
처음에 혜승이는 ‘평소대로’ 잘 먹었다.
잘 먹는 혜승이를 보는 박찬희와 김종훈의 표정이 처음에는 좋았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에는 약간의 불만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냥 잘 먹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 배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을 거다.
사람은 다 똑같다.
영화 몇 편을 찍은 감독도 수많은 배우를 캐스팅했던 캐스팅 디렉터도 처음에는 혜승이의 외모와 ‘잘 먹는다’는 특징 하나만으로 완벽한 배우를 찾았다고 설렜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 테스트를 해 보니 바로 부족한 점이 눈에 띄었을 거고.
어쨌든 박찬희는 혜승이에게 다른 주문을 했다.
그 주문을 들은 혜승이는 다소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다시 한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늘 음식 앞에서 밝고 열정적이었던 혜승이는 온데간데없었다.
혜승이는 그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음식을 무작정 입속에 욱여넣고 있었다.
‘맛있다’, ‘행복하다’와 같은 감정은 혜승이에게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같은 감정만이 느껴졌다.
트라우마 때문에 식탐이 생겨 버린…… 박찬희 감독이 말했던 그 여자애가 혜승이에게 찾아와 있었다.
유혜승을 바라보던 박찬희의 표정은 의심에서 놀람으로, 놀람에서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김 실장님……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진짜 현실 맞는 겁니까?”
“그건 제가 여쭤보려고 했는데요? 지금 저 아이가 방금 전 그 아이가 맞는 겁니까?”
“그러니까요. 그냥 주문 한 마디 던진 것뿐인데 완전히 은주가 되어 버렸는데요?”
“은주요?”
“혜승이가 맡게 될 배역 이름이요.”
“아, 은주였군요. 이름도 왠지 잘 어울리네요. 저 친구…… 딱 은주 같아요.”
“그쵸? 완전 딱입니다. 딱이에요.”
“역시…… 우리가 잘 본 것 같습니다. 하긴, 제가 이래 봬도 캐스팅만 십 년을 넘게…….”
“아까 뭔가 실수한 것 같다고 하셨던 분이 누구였더라…….”
“그러는 감독님은 아까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고…….”
“그건 저 아이의 제대로 된 연기를 보지 못했을 때라…….”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 부분이라…….”
두 사람이 쓸데없이 서로의 탓을 하고 있을 때도 혜승이의 연기는 계속됐다.
그녀는 ‘은주’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수저를 움직이고 턱을 놀리는 그녀의 동작에서는 슬쩍슬쩍 광기마저 엿보이는 듯했다.
저러다가 진짜 애 잡겠다.
아무리 혜승이가 푸드 파이터라지만, 그건 즐겁게 즐기면서 밥을 먹었을 때에 한한다.
지금의 혜승이는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식탐에 빠진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니까.
탁-
혜승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혜승아, 이제 그만 먹어도 돼.”
“@($*&@?”
“응. 이제 연기는 그만해도 돼.”
“쥐…… 좌…… 요?”
“응. 진짜야.”
단호하면서도 진지한 내 눈빛을 마주한 혜승이는 그제야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연기를 멈췄는데도 여전히 혜승이의 주위에서는 정신 질환자의 아우라 같은 어떤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건 혜승이가 그만큼 ‘은주’의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혜승이가 연기를 멈추자 두 사람도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었다.
“두 분…… 혜승이 연기는 충분히 보신 건가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쪽에서 지켜보던 나조차도 전율이 일 정도의 연기였다.
연기가 아니라 마치 실제의 인물을 데려다 놓은 듯한.
혜승이의 평소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었다.
전생에 나는 요리를 하고, 장사를 하고, 사업을 했다.
처음에는 고생을 좀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만드는 요리마다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손대는 장사마다 대박을 터뜨렸고, 사업은 계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천재’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천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했다.
배우지 않아도 이미 몸 안에 그 재능이 담겨져 있는 그릇.
그러니까 결국에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이 태어난 사람.
혜승이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