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백반집에서 별걸 다 (2)
“주스…… 더 안 필요하세요?”
“아, 아. 네, 네. 조, 조금 더 주세요. 감독님도 더 드시…….”
김종훈의 시선 끝에 있는 박찬희.
그 역시 유혜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저, 저도 좀, 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혜승이 상큼한 미소를 남겨 두고 떠난 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딱 저런 이미지예요. 제가 생각한 배우…….”
“그쵸, 맞죠?”
“네, 완벽해요. 이미지는…… 하지만, 먹는 게…….”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밥 먹는 거 봤어요.”
“아, 봤어요? 어떤가요? 잘 먹나요?”
“후후…… 아마도 저렇게 생겨서 그렇게 먹는 여자는 이 나라에 두 명은 없을 겁니다.”
“오오오…… 그럼…….”
“딱입니다. 자, 감독님. 캐스팅하러 가시죠.”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이 주방 쪽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 * *
“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어안이 벙벙해진 유혜승.
그럴 만하다.
늘 그렇듯이 푸짐하게 밥을 먹고 저녁 장사를 대비해 조금 쉬려는 유혜승에게 갑자기 웬 캐스팅? 영화? 배우?
이건 뭐 길거리 캐스팅도 아니고, 백반집 캐스팅인가?
아니면, 김치찌개 캐스팅?
“아, 당황하셨죠? 참, 여기 계신 분은 오빠 분인가요?”
김종훈이 혜승이의 옆에 있던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음…… 네, 제가 혜승이 오빠죠.”
“아…… 반갑습니다. 아까 부모님들도 계셨던 것 같은데…….”
“휴식 시간이라 잠시 쉬러 올라가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오빠분이랑 같이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그럼 여기 말고 루프탑으로 가실래요?”
“루프탑이요?”
두 사람을 선우네 백반의 루프탑,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혜승이와 달리 나는 언젠가는 이런 일이 한 번쯤 일어날 줄 알았다.
혜승이는 언제고 어느 루트를 통해서는 배우가 될 애였다.
혜승이가 직접 움직이는 스타일이었으면 학원도 다니고 오디션도 보러 갔겠지만…… 쟤는…… 오로지 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말.
혜승이는 주머니 속에 있어도 언젠가는 눈에 띄고야 말 그런 애였던 거다.
“저희 루프탑 경치 어떤가요?”
“오…… 제법 운치 있군요.”
“근처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시야가 확 트여 있네요.”
두 사람이 경치를 구경하는 동안 혜승이가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쳤다.
“오빠. 저 사람들을 굳이 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딱 보니까 사기꾼들 같던데.”
“사기꾼?”
“네. 연예인 되라고 꼬셔서 순진한 애들 돈 빼 먹는 사기꾼. 돈뿐만이 아니라…… 별 이상한 짓도 다 시킨다던데…… 으으. 끔찍해.”
“아…… 그런 사기꾼? 저 사람들 그런 사람들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저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걸 아니까 그렇지.
사실 웬만한 사람들이 영화감독을 실제로 볼 일은 드물다.
출발 시네마 여행 같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 같은 데서 인터뷰로 보면 모를까.
해외에서 큰 상을 받아 금의환향하는 대감독들이 아니라면 그 얼굴을 알기는 쉽지 않다.
물론, 저기 있는 박찬희 감독은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었으면 이미 혜승이도 알아봤을 거다.
하지만…… 저 박찬희 감독과는 전생에서 인연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만났는데 솔직히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요리를 배우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난 그런 연예인들을 코칭해 주기 위한 셰프로 출연을 했었고.
그중 어떤 배우였더라.
하여간, 한 배우가 저 박찬희 감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음식을 만들어 주고 영화 촬영장까지 가서 음식을 대접해 주고 왔었다.
수많은 출연자 중에서도 저 박찬희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음식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 때문이었다.
진지한 태도…… 그러니까 음식을 매우 맛있게 잘 먹었다는 거다.
장사를 하면서, 외식 사업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의 먹는 모습을 지켜봐 왔지만…… 아마 영화감독 중에서는 제일 잘 먹는 사람이 바로 저 박찬희일 거다.
나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서 ‘박찬희’를 검색해 보았다.
- 박찬희
- 감독 박찬희
- 영화감독 박찬희
아무리 검색어를 바꿔 봐도 저 박찬희 감독의 얼굴은 잘 나오지 않았다.
겨우 겨우 스크롤을 내리고 페이지를 넘겨 찾은 얼굴 하나를 혜승이에게 보여 주었다.
“자, 여기 봐 봐. 이 사람이 저 사람이야.”
영화 시사회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근데 솔직히…… 너무 얼굴이 작게 나와서 이 사람이 저 사람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에이…… 이게 뭐예요. 이건 그냥 오빠라고 해도 믿겠네.”
“나? 나처럼 호리호리하고 얇은 사람이랑 저런 퉁퉁한 사람이랑 비교한다고?”
“그러니까요. 그만큼 사진이 멀리서 찍혀서 알아볼 수 없다는 거지. 진짜 맞아요? 저 사람이 영화감독인 거?”
“그래, 맞다니까. 하여간 맞아. 그러니까 일단 얘기나 좀 들어 보자고. 사기꾼은 아니니까.”
“음…… 알겠어요.”
사람에게 기회란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다.
전생의 나에게도 여러 번의 기회가 왔지만, 어떤 기회들은 그게 기회인 줄 모르고 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안 좋은 인연을 기회라고 믿고 덥석 잡기도 한다.
이를테면 상극인 사람과 결혼하여 결국에는 이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 같은 거…….
하여간…… 오늘이 혜승이에게는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을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혜승이의 인생은 나로 인해 경로가 바뀌었다.
내가 지난 생과 다르게 살겠다고 영진꿈마을에 자원 봉사를 가지 않았더라면 혜승이가 선우네 백반에서 일을 할 리는 없었을 거다.
선우네 백반에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난데없이 밥을 먹으러 온 영화감독이 혜승이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리도 없을 거고.
이건 분명히 우연에 가까운 일이지만, 어떤 우연은 필연을 동반하기도 한다.
“감독님.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여기 있는 애는 제 동생 이혜승이고요. 저는 혜승이 오빠 이선우입니다.”
“아, 선우네 백반의 그 선우가 여기 계셨군요.”
“네, 그런 셈입니다. 하하.”
한편, 유혜승은 이게 뭔가 싶었다.
이혜승?
멀쩡한 내 성을 왜 ‘이’로 바꾸는데?
그런 의문을 눈치챘는지 선우가 이쪽을 바라보며 살짝 눈짓을 한다.
“어쨌든 선우 씨, 혜승 씨 반갑습니다. 저는 영화감독 박찬희라고 합니다. 요 앞 영진대학교 영화과에서 교수직도 겸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JJ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디렉터 김종훈이라고 합니다.”
“오…… JJ엔터테인먼트라면…….”
JJ엔터테인먼트.
JJ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이곳은 문화, 방송, 영화 업계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국내에 존재하는 기업 중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계열사 중에는 JJ푸드도 있는데, 이곳 또한 외식업계에서 탑 5위 안에 드는 큰 회사이다.
그런 회사에서 캐스팅 디렉터라…… 모르긴 몰라도 이 김종훈이라는 사람 또한 업계에서는 꽤 힘을 쓰는 사람일 거다.
“그나저나…… 우리 혜승이를 캐스팅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뜬금없이 들리시겠지만…… 제가 기획하고 있는 다음 영화의 한 역할에 혜승 씨가 정말 딱일 것 같아서요.”
“맞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 혜승 씨가 박 감독님이 얘기하신 조건을 전부 갖춘 사람입니다.”
“음…….”
신나서 얘기하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유혜승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갑자기 영화 배우 캐스팅이 무슨 얘기란 말인가?
물론, 길거리에서 연예 기획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명함은 수도 없이 받아본 그녀였다.
그건 당연하게도 빼어난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을 거고.
그렇지만…… 한 번도 그녀는 스스로가 영화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꿈을 물어보면 그녀는 늘 같은 대답을 하곤 했다.
-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어요.
정말 그게 다였다.
그녀가 돈을 번다면 그건 맛있는 걸 사기 위함일 것이고,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건 맛있는 걸 먹기 위함일 것이다.
먹는 걸로 가득 찬 그녀의 꿈 주머니에 다른 잡다한 장래 희망이 들어올 공간 같은 건 없었다.
“저기…… 근데요. 죄송하지만, 저는 배우를 할 생각이 없는데요. 배우라면 연기를 해야 되는데…… 저는 연기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어요.”
“혜승 씨. 바로 그 점 때문에 저희가 혜승 씨를 캐스팅하려는 겁니다.”
“네? 연기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요. 연기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좋은 겁니다. 한 번도 연기를 안 해 봤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네? 뭐, 음식을 먹는 거야 자신 있지만…… 근데, 음식 먹는 거랑 연기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저희가 배역에 대해서 설명을 안 드렸군요.”
이어지는 박찬희 감독의 설명을 듣자 그들이 왜 혜승이를 캐스팅 대상으로 정했는지 이해가 갔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나이.
이건 뭐 혜승이가 그냥 그 나이니까 볼 것도 없고.
청순가련형의 외모.
이것 또한 혜승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당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이다.
물론, 나는 좀 다르다.
혜승이를 볼 때마다 아귀처럼 음식을 먹어 대는 얼굴이 겹쳐 보여서…… 원래 얼굴은 거의 까먹을 지경이니까.
마지막 조건.
잘 먹을 것, 먹는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 먹을 것.
연기로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진짜 잘 먹는 사람일 것.
이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아까 혜승이가 점심을 먹는 모습을 힐끗 봤다고 했었나?
역시 캐스팅 디렉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어딜 가든 더듬이를 내어놓고 장래에 배우가 될 만한 사람들을 관찰해야 하는 거니까.
배우가 된 혜승이의 모습을 봤고, 이번에도 배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나와는 달리 여전히 혜승이는 의구심과 걱정이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 역할이 저랑 맞는다 해도…… 연기를 한 번도 안 해 본 제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비중이 있는 중요한 역할인데…….”
혜승이가 자꾸 머뭇거리자 캐스팅을 하러 온 두 사람도 조금씩 흔들리는 듯했다.
그들에게도 슬슬 의문이 들 만했다.
이미지는 완벽하고, 잘 먹는 것까지 완벽하지만 막상 전혀 연기를 못 한다면?
대부분은 제대로 먹는 걸로 연기가 다 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기본적인 연기 실력은 동반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이 너무 흥분한 것 아니었을까?
너무 적절한 사람이다 싶어서 눈이 먼 것 아니었을까?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니었을가?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평상 바닥을 한 번 탁 내리쳤다.
그렇게 주의를 환기시킨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한 번 해보면 되죠.”
“네?”
“여기서 한 번 테스트해 보면 되잖아요. 진짜 제 동생 혜승이가 연기를 잘할지 못할지.”
“오빠?”
혜승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올려 주었다.
넌 모르겠지만…….
넌……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냥 한 번 해 봐.
두려워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