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백반집에서 별걸 다 (1)
‘정말 맛있나 보네.’
말 한마디 없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박찬희를 보며 김종훈은 생각했다.
음식이 나온 이후로 박찬희는 이쪽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고 식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마치 김종훈이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것처럼.
지금 박찬희의 세계 속에는 오로지 그 자신과 백반 한 상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예술가들이란…….’
직업상 많은 감독을 만나면서 김종훈은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 가는 중이다.
이들의 모든 면이 다 같은 건 아니지만, 한 가지 그들을 관통하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어떤 것에 몰두하면 다른 건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거다.
하긴…… 그런 집중력이나 몰입 능력이 없으면 영화감독으로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는 요원한 일일 거다.
한편, 지금의 식사는 그에게도 다소 특별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지금 박찬희가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는 저 비엔나 소시지 볶음이 그랬다.
뭐,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다들 한두 번쯤은 겪어 봤음직한 그런 일이니까.
중학생 때였나.
김종훈의 가정 형편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늘 싸가는 도시락 반찬은 그게 그거였다.
김치와 계란프라이, 거기에다가 김 한 봉지 정도.
계란프라이조차도 늘 등장하는 주연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특별하게 등장하는 주연급 카메오 같은 존재였을 뿐.
그러니 점심시간만 되면 다른 친구들의 반찬을 뺏어 먹기에 바빴던 김종훈이었다.
- 야, 돈까스 하나 먹자.
- 소시지 맛있겠다. 하나 주라.
- 오, 장조림! 달걀 하나만!
김종훈의 어린 시절은 그랬었다.
그렇게 한마디씩 하면 서로 나눠 먹고 나눠 주는 그런 시절.
또 뺏어 먹냐고 한마디씩 하면서 투닥거리지만, 결국에는 다들 반찬통을 열어 모두 같이 반찬을 나눠 먹던 그런 때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런 걸 맘에 안 들어 하는 친구도 있었다.
- 야, 너 왜 내 소시지 처먹어?
- 처먹어? 야, 소시지 하나 먹었다고 처먹냐니. 말이 좀 심하다?
- 반찬 주인이 먹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먹은 게 처먹은 거지, 그럼 뭔데? 거지 새끼도 아니고…….
- 뭐?! 거지 새끼? 너 말 다했어!
그렇게 비엔나 소시지 하나로 드잡이질을 했다.
그 드잡이질은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선생님의 눈에 걸렸고, 하필 소시지 반찬의 주인공이었던 녀석의 아버지는 지역의 유지이자 정치권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권력자였다.
그 이후는 어떤 유행가의 가사 같은 그런 일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오셨고, 어머니는 선생님과 그 자식의 아버지에게 싹싹 비셨고, 그 광경에 자존심이 상한 김종훈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자괴감에 빠졌고.
뭐 대충 그런 얘기.
피식-
문어 모양 소시지를 들고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추억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에 괜히 헛웃음이 났다.
대형 영화 제작사의 캐스팅 디렉터로 성공한 그에게는 이제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되어 버린 그때의 기억이니까.
그나저나…… 이 집 반찬 참 맛있네.
눈앞에 있는 박찬희만큼은 아니었으나 김종훈도 이 집의 맛있는 밥과 반찬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뭔가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느낌이랄까?
연일 계속되는 미팅과 회식에 쩌들어 있던 김종훈의 위가 이 집의 반찬과 밥을 만나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학교까지 불려 오셨던 그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느낌이다.
그렇게 계속 식사를 하는 와중 그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아니, 장면이 아니라 사람인가?
백반집 사장님의 딸로 보이는 여자애였는데 그 먹는 모습이…… 가히 일반인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먹는 모습만 그랬다면 사실 크게 관심이 안 갔을 텐데, 그 여자애의 외모가…… 가히 보통 연예인의 그것을 뺨칠 정도였다.
청순가련형의 대명사 격인 이영애를 떠올리게 한달까?
그런 외모를 가진 애가 음식은 또 저렇게 괴물처럼 먹으니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
“감독님, 음식이 아주 맛있으셨나 봅니다.”
“어이쿠. 제가 너무 밥만 먹었죠? 이거 미안합니다.”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박찬희가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저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감독님께 감사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습니다.”
“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이 집 정말 괜찮네요.”
박찬희는 괜히 가게 내부와 일하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까다로운 켄터키 할아버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곳이라더니…… 정말 그럴 만했다.
“참 그러고 보니 미팅 하러 와서 일 얘기는 하나도 안 했네요. 배고파서 그랬나?”
“그랬었나요? 하하. 하긴 배가 고프면 일 생각이 안 나는 법이죠. 배가 두둑이 부르니까 자연스럽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네요”
“좋습니다. 그럼 저희 근처에 어디 카페라도 가서…….”
이때 두 사람의 앞에 붉은빛이 감도는 주스 두 잔이 배달되었다.
“오미자청으로 만든 주스입니다. 시원하게 만들었으니 드시고 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백반집에서 후식도 다 주시네요?”
“아…… 마침 저희가 후식으로 주스를 먹으려다 보니 손님이 두 분만 계셔서 드리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김 실장님. 주스도 있는데 그냥 여기서 마저 얘기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럼 그럴까요?”
“네. 일단 이 주스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요.”
박찬희의 입속으로 레드 와인 색을 닮은 주스가 빨려 들어갔다.
“으음…… 이건…….”
나름 입맛에 대한 가방끈이 길다고 자부하는 그.
이 오미자청은 마트에서 파는 그런 제품이 아니다.
시중의 제품은 오미자보다는 설탕 성분이 많이 들어가 단맛이 많이 난다.
하지만, 이건 그렇지 않다.
오미자가 왜 오미자인가.
시고, 달고, 맵고, 쓰고, 짠 다섯 가지 맛을 내는 과일이라 해서 오미자(五味子)라고 부르지 않던가.
이 오미자 주스는 오묘한 여러 가지의 맛이 느껴졌다.
솔직히 시고, 달고, 쓴 맛은 잘 느껴지고, 맵고, 짠 맛까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오미자 주스의 오미자청에는 신선한 오미자가 잔뜩 들어가 있을 거라는 거다.
“와…… 이 집은 후식까지 완벽하네요.”
“오미자 주스가 원래 이런 맛이었군요? 단맛은 덜한 대신 여러 가지의 다양한 맛이 느껴지는 게 아주 재미있네요.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미자 주스를 음미하던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참, 감독님. 이번에 기획하고 계신 영화 시나리오가 대강 어떻게 되시나요?”
“아, 이번 영화요? 음…… 일단, 음식 얘기입니다. 음식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아픔을 치유하고, 인생을 얘기하는 그런 스토리가 될 것 같아요.”
“오…… 감독님 얘기를 들으니 최근에 봤던 일본 영화 한 편이 생각나네요. 타코야키를 파는 노점상 얘기였는데…….”
“아…… <야키야키>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그거. 잔잔하면서도 뭔가 깊은 여운이 있는 영화였어요.”
“네. 저도 이번에는 그런 느낌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복수에 쩌든 살인귀, 아내를 잃고 오직 범인만을 광적으로 쫓는 형사…… 그런 거에 저도 좀 질려서요.”
“후후. 하긴…… 지금까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셨죠?”
“실장님, 말소리 낮추세요. 누가 보면 제가 진짜 살인범인 줄 알겠네.”
“하하하. 이렇게 인상 좋고 후덕하게 생기신 살인범이 있을 리가요.”
“어라, 기억 안 나세요? 제 세 번째 작품. 완전 평범한 아저씨가 연쇄 살인범이던…….”
“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설마 그 남자 주인공이 감독님의 실제 캐릭터를 모티프로 만드신…….”
“에이, 또 그러신다.”
“농담입니다, 농담.”
두 사람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럼 주인공 캐릭터도 대충 정하셨어요?”
“음…… 대충 정하기는 했는데…… 사실 다른 캐릭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배우들이 있는데, 유독 핵심 조연 여자 역할 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는 배우가 없네요.”
“핵심 조연이요?”
“네. 누가 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운 미녀인데,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늘 잘 못 먹고 자랐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식탐이 생긴 거죠. 정말 많이 먹고, 잘 먹고, 빨리 먹어요.”
“음…… 절세미녀인데, 잘 먹는다라…… 미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은 많지만, 그중에 잘 먹는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라…….”
김종훈은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배우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영애, 김희선, 이나영, 손예진 등등.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이다.
게다가 여배우로서는 딱히 선호되지 않을 역할이다.
폭식을 하는 여배우라니.
연기 자체가 쉽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은 그런 역할을 맡기 꺼려 할 거다.
결국 신인급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아무래도 그런 역할이면…… 결국 오디션을 통해 선발해야겠네요.”
“음…… 김 실장님이 봐도 그렇죠? 하아…… 근데 오디션이라는 게 잘 아시다시피…….”
오디션을 통해서 캐스팅을 하는 것은 캐스팅하는 입장이나 캐스팅을 당하는 입장에나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신인들은 낙타 바늘 구멍 뚫기인 그 관문을 어떻게든 뚫어야 하고, 제작자들은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한 인물을 찾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늘 많은 엇갈림이 일어난다.
이미지가 좋으면 연기력이 부족하고, 연기력이 좋으면 이미지가 맞지 않는 경우.
애써 오디션으로 배우를 캐스팅했는데, 난데 없는 인성 문제로 아예 그 배우를 쓸 수 없게 되는 경우.
이런 케이스가 너무나도 많다.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 한번 찾아봐야죠. 그게 제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그럼 김 실장님만 믿으면 되는 거죠?”
“뭐, 일단은요. 후후. 자, 그럼 한번 정리해 볼게요. 청순하고 예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잘 먹는 연기를 할 수 있는 여배우. 맞나요?”
“아, 연기이긴 한데 연기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잘 먹는 연기를 하는 건 맞지만, 실제로 잘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연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아…… 음……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요?”
“좀 그렇긴 한데…… 어쩌면 주연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이라…….”
“일단, 알겠습니다. 나이는 대략 어느 정도면 될까요?”
“음…… 극중 역할이 고등학생이니까…… 대략 그 정도 나이? 배우에 따라서 이십 대 초반 정도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고요.”
“네, 그럼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정리하면……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의 청순하고 가련하게 생긴 미녀, 그리고 연기를 잘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잘 먹어야 한다.”
그때 두 사람 앞에 유혜승이 나타났다.
“오미자 주스 조금 더 드릴까요?”
“네?”
고개를 들어 올린 캐스팅 디렉터 김종훈.
유혜승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폭죽 같은 게 펑- 터졌다.
‘십 대 후반…… 청순하고 가련한 미녀…… 잘 먹는…….’
그의 머릿속에 방금 전 말도 안 되는 식성으로 김치찌개를 먹어 대던 유혜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건 뭐 완전히…… 딱이잖아?!’
유혜승은 김종훈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