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백반은 백반답게 (2)
오늘도 선우네 백반에는 단골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는 오랜만에 가게에 찾아온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늘 7분 만에 김치찌개를 후루룩 해치웠던 ‘7분 김치’.
이제는 강박증을 이겨 내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 이찬호다.
“이 집 김치찌개는 여전히 최고네요. 얘들아, 많이 먹어.”
“네, 쌤. 여기 김치찌개 진짜 맛있어요.”
“진미채도 완전 부드럽고 맛있는데요?”
“달걀 장조림도 짱!”
이찬호와 학생들은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가게를 찾아온 날이 또 하필 김치찌개를 하는 날이라니…… 어쨌든 이찬호와 김치찌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싶다.
“강사 양반. 그때는 김치찌개 맛을 느끼기나 했수?”
고종숙 여사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묻는다.
하긴…… 그때의 이찬호는 맛을 느낄 새도 없이 7분 만에 그 뜨거운 김치찌개를 흡입했으니까.
정말 맛을 느끼기는 했을까?
이찬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한 얘기지만…… 무슨 맛인지도 몰랐습니다. 하하. 그냥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누가 시킨 것도 강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루틴을 지키지 않으면 삶이 완전히 망가져 버릴 것 같았습니다.”
“쌤. 그게 무슨 얘기예요? 쌤도 그렇게 힘들 때가 있으셨어요?”
학생 중 한 명이 비엔나 소시지를 씹으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지금의 이찬호의 얼굴에는 밝고 건강한 미소가 가득하다.
뭔가 자신감으로 뭉쳐 있는 듯한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
왠지 같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힘이 날 것만 같은.
7분 김치 시절의 이찬호의 모습과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다.
“응. 쌤이 얘기 안 해 줬었나? 나도 한 때 많이 힘들었었어. 아마 너희들이 지금 공부 때문에 힘든 것과는 비교도 안 될걸?”
“에이…… 그래도 공부가 더 힘들죠. 우리는 매일매일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데…….”
그 말도 맞다.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이 어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게 아니다.
그들의 삶이 결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그런 삶이라는 말이다.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같은 삶.
단 하나의 목표, 그 작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모두가 한곳으로만 달려가는 삶.
뭐…… 사회에 나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과연 그럴까?”
이찬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진다.
모르긴 몰라도…… 아무리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이 힘들어도…… 그 당시 이찬호가 처한 힘듦과는 비교하기 힘들 거다.
고등학생들은 타인이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 낸 감옥에 갇혀 있는 거라면…… 이찬호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둔 거였으니까.
타인은 쉽게 생각한다.
왜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냐고.
그런데…… 본래 스스로 친 함정에 스스로 걸리면 아예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애초에 자기가 자기의 덫에 걸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니까.
어찌 됐든…… 지금의 이찬호의 모습이 너무나도 반갑다.
그는 어렵사리 스스로의 감옥에서 빠져나왔고 과거를 이겨 내어 스스로의 길을 찾아냈다.
저 밝은 얼굴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바로 그 증거이다.
“쌤. 근데 그 버스 광고에 붙어 있는 사진…… 그거 언제 찍은 거예요?”
“아…… 그거 좀 너무 과장됐지? 나도 그거 볼 때마다 민망하긴 해.”
“네. 누가 보면 무슨 아이돌인 줄.”
“맞아. 얼굴도 하얗고, 턱은 브이 라인에 눈빛은 거의 우리를 씹어 먹으려고 하는 줄.”
“하하하. 그게 그렇게 맘에 안 들었냐?”
“네.”
일제히 대답하는 학생들.
그나저나 벌써 버스 광고에 등장하는 명강사가 된 건가?
근방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다더니…… 몇 년간 병마에 시달렸어도 그 머리는 어디 안 갔나 보다.
빅터는 웬 중국인 친구를 데려왔다.
“선우! 오늘은 중국 펑요(朋友)와 함께 왔어. 헤이, 펑요. 싯 다운.”
“안녀하세요. 중국에서 온…… 리자준이라고…… 합니다. 반가습니다.”
자신을 리자준이라 소개한 중국 친구는 큰 키에 큰 덩치를 자랑하는 친구였다.
역시 키가 큰 빅터 옆에 있어도 전혀 꿇리지 않았고, 덩치는 빅터보다도 1.5배는 더 커 보였다.
리자준을 보자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친구는 도대체 얼마나 먹을까?
전생에서 내가 겪은 중국인들은 대륙의 기상을 품은 사람들답게 많이 먹었다.
그렇다고 다들 이초희나 유혜승처럼 먹지는 못했지만, 평균적인 식사량이 우리나라 일반 사람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 저렇게 덩치까지 큰 중국인은 정말 얼마나 잘 먹을지 상상이 안 갔다.
게다가 빅터의 친구 아닌가.
유유상종이라고…… 많이 먹는 빅터의 친구라면, 거기에다가 대륙에서 온 중국인이라면…… 많이 안 먹을 수가 없겠지.
잠시 후.
가게의 공깃밥을 빅터와 리자준이 거덜 낼 거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 빅터는 평소의 빅터 그대로였다.
나중에는 대접을 달라고 하더니 반찬들과 김치들을 때려 넣고 비빔밥까지 만들어 먹은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중국에서 온 리자준…… 이 친구는 정말 보기 드물 정도의…… 소식가였다.
그는 달걀 장조림의 달걀을 네 등분해서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여 천천히 하나씩 맛보았다.
“음…… 노른자의 관장 양념이…….”
“간장이야, 리자준. 관장 아니고. 관장은 체육관장할 때 쓰는 말이지.”
그 체육관장 말고 더한 뜻도 있으나…… 그래 그 단어는 밥 먹을 때는 절대 떠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지.
“아, 간장…… 그래, 이 간장…… 달콤……하고, 짠…… 이 간장 맛이…… 이 노른자와 섞여서…… 음…… 쩐하오츠(眞好吃, 정말 맛있다).”
쩐하오츠를 연달아 외친 그는 간장에 적신 달걀 하나를 몇 분에 걸쳐 음미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고상한 클래식을 감상하는 것처럼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리자준 이 친구…… 대식가가 아니라 미식가였다.
그런데 궁금한 건…… 저렇게 먹고 어떻게 저 덩치를 유지하지?
하여간, 넓고 넓은 대륙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듯했다.
7분 김치 이찬호 씨도 가고, 시끄러운 빅터도 가고, 미식가 리자준도 가고…… 슬슬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오자 들어오는 손님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저희도 이제 식사할까요?”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거의 없으니 이제 우리 직원들도 식사를 하고, 오후 장사를 준비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때 가게 문이 스윽-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 식사 되나요?”
“네, 됩니다. 그쪽에 앉으시죠.”
브레이크 타임을 1분 앞두고 들어온 두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체구에 비교적 후덕한 인상을 하고 뿔테 안경을 낀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회사원의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감독님, 느낌 어떠세요?”
회사원 차림의 캐스팅 디렉터 김종훈이 마주 앉은 박찬희에게 물었다.
“음…….”
박찬희는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 이곳 선우네 백반을 가늠해 보았다.
‘일단…… 십오 년은 대충 넘은 것 같고…… 체인점도 아니고…… 주인장이나 직원들의 표정도 좋고…… 맛만 있으면…….’
“일단은 먹어 봐야 알겠는데요. 다른 건 다 좋아 보여요.”
“오…… 일단 기대하겠습니다.”
“네, 맛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김 실장님도 학교 근처까지 오신 보람도 있고.”
박찬희는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꼈다.
새로운 음식점에 온다는 건 언제나 그에게 큰 설렘을 가져다준다.
처음 와 본 식당의 음식이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자신의 맛집 리스트에 그 식당을 추가할 때는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마음이 풍족해지는 기분이랄까?
세상에 아군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랄까?
그건 박찬희의 크나큰 낙 중에 하나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앞에 김치찌개 한 상이 차려졌다.
‘음…….’
박찬희는 눈앞에 차려진 밥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게 동네 백반집의 담음새와 차림새란 말인가?
2인분이 한 뚝배기에 담겨 나온 김치찌개는 돼지고기와 두부, 김치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었다.
거기에 어슷썰은 파와 홍고추가 살짝 올라가 있어 김치찌개 전문점의 담음새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갈해 보였다.
반찬들은 또 어떤가.
문어 모양으로 아기자기하게 모양을 낸 비엔나 소시지 볶음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돋게 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진미채 볶음은 당장 한 움큼 집어 먹으면 진미채 특유의 짭짤, 고소,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차게 할 것만 같고.
왕 계란말이는 그 이름만큼이나 커다랗고 풍성해 보여서 한 조각 집어 먹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화룡점정은 바로 김치였다.
무슨 백반집의 김치가 이렇게 다양한가.
배추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갓김치에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 물김치까지.
김치만으로도 밥 여러 공기를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푸짐한 차림이었다.
각각의 김치가 저마다 싱싱하고 신선해 보이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감독님, 식사 안 하세요?”
멍하니 차림새를 구경하고 있던 박찬희는 김종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해야죠. 해야죠. 하하하. 자, 드시죠.”
음식은 눈으로 먼저 먹는 것이 맞다.
대부분은 눈으로 보기에 맛있는 음식이 실제로도 맛있는 경우가 많고.
하지만, 박찬희는 더러 그렇지 않은 경우도 목격한 바 있다.
보기에는 번지르르하고 때깔 좋아 보이는 음식이 실제로는 전혀 맛이 없다거나, 보기에는 투박하고 맛없어 보이는 음식이 실제 맛은 굉장히 뛰어났다거나 하는 경우.
그러니, 음식은 반드시 맛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자, 눈에 현혹되지 말자. 코에도 현혹되지 말자. 맛있어 보이는 것과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김치찌개부터 시작해 보자.’
박찬희는 국자를 이용해 김치찌개를 천천히 제 그릇에 덜었다.
두부, 김치, 고기, 국물까지 빠짐없이 덜어 온 그가 비로소 숟가락을 들었다.
우선, 국물부터.
호로록.
키야.
목 깊은 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맛이었다.
칼칼하고 새콤하면서도 고기 육수의 진한 맛이 엄청난 감칠맛을 만들어 냈다.
국물은 합격이고, 다음은 고기.
박찬희는 비계가 충분히 붙어 있는 고기를 슬쩍 들어 올렸다.
살코기와 비계의 비율이 2 대 1 정도로 보이는 돼지 앞다리살 부위.
그는 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와앙- 입으로 고기를 가져갔다.
오물오물.
몇 번 입에서 씹어 대자 고기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진한 맛.
오로지 신선한 고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깊은 기름의 맛.
와…….
역시 절로 탄성이 나오는 맛이었다.
이대로 계속 이 고기만 씹고 있어도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고기를 씹는 이 순간이 제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오직 맛있는 걸 먹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지고한 고양감이 박찬희의 마음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